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백구십칠 Nov 20. 2022

아기라는 우주의 탄생과 조망효과

 

 신혼 초에 나는 남몰래 딩크족을 꿈꿨었다.

특별히 아기를 싫어하거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아내와 단둘이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을 뿐이다. 각자가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한 후 퇴근길에 만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술을 한잔하는 일상. 특별한 계획 없이 늘어져 책을 읽거나 손잡고 발길이 닿는 대로 산책을 하는 주말.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먼 곳으로 훌쩍 떠나는 휴가. 둘이 함께 이렇게만 계속 보낼 수 있다면 이런 게 바로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아기가 태어난다면 이런 일상이 어그러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어려움들이 생겨날 것이 자명해 보였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도 줄어들 것이다.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고 묻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아기를 위해 새롭게 공부해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한 생명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양육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온 어떤 일의 무게보다 무거울 것이다.


물론 아기가 태어나면 지금까지 겪었던 행복과는 또 다른 행복이 생겨날 것이라고도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더 힘들어지는 변화는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생겨나는 긍정적 변화는 추상적이었다. 자녀가 있는 지인들에게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점이 좋은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대답은 비슷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세상이 열려"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후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거라고 보면 돼”

단둘이 살아가는 일상에 대만족하고 있는 한 사람의 결심을 되돌리기엔 너무나 두리뭉실한 이야기들이었다.


2022년 여름, 아기가 태어났다. 막상 아빠가 되어보고 나니 예상대로 어려움과 행복함이 교차한다.

그리고 행복함의 실체는 생각보다 거대하고 예상대로 추상적이다. 당장 누군가 '아빠가 되어보니 어떤 점이 좋아요?'라고 묻는다면 이전의 지인들이 해주었던 답과 비슷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 것 같아요"

훗날 과거의 나처럼 아이에 대한 확신이 없는 친구나 후배가 질문을 한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대답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가 되고 나서 달라진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 몇 가지 기록하고자 한다.


첫 번째, 멀티태스커가 된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나는 입버릇처럼 '난 멀티태스킹이 잘 안돼'라고 말을 해왔다. 실제로도 하나의 일에 집중하면 그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다른 일에는 잘 신경 쓰지 못하는 타입이었고, 하나의 일에만 집중해서 빠르게 정리하고 다음 일로 넘어가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선제적 방어처럼 그렇게 얘기를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되고 나서는 하나의 일만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아기는 언제나 지켜봐주어야 하는 존재이고 언제 어떤 이유로 울음을 터뜨릴지 예측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존재이다. 때문에 아기가 태어난 후엔 자연스럽게 멀티태스킹 능력이 좋아지고 있다.

밤새 칭얼거리는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브런치 글감을 공상한다. 가끔 재택근무를 할 때면 눈과 손으로 분유의 물의 양을 맞추며 귀와 입으로는 업무 관련 통화를 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글을 쓰거나 아이디어를 정리할 때면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아기가 잠시 잠들면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급작스러운 집중력을 발휘해 빠르게 일을 처리한다. 그리고 아기가 깨어나면 다시 육아 집중 모드로 전환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모드 전환이 이루어진다.

어쩔 수 없는 변화이기는 하지만 이런 멀티태스킹 능력 향상은 앞으로 업무를 하거나 새로운 일들을 벌일 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몇십 년 동안 나는 심각한 부끄럼쟁이로 살아왔다.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주목하기라도 하면 귀는 빨개지고 입술은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더듬거렸다. 어떤 모임이든 장기자랑 시간은 가장 큰 고난의 시간이었고, 노래방 회식 같은 것은 갖은 핑계를 대며 피해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고 난 후 그런 부끄러움이 조금씩 무뎌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기는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고 과장된 몸짓으로 춤을 춰주고 안면 근육을 최대한 이용하여 감정 표현을 해주었을 때 비로소 방긋 웃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서 절대 노래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멋쟁이 토마토'를 부른다. 돌이킬 수 없는 몸치지만 아기가 웃기만 한다면 땀이 날때까지 망치춤을 춰준다. 감정 표현에 소극적인 사람이었지만 아기 앞에서는 연극배우라도 된 것처럼 호탕하게 웃고 우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훈련을 통해서도 바뀌지 않았던 나의 소극적 감정 표현은 아기를 만나고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 이 또한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나의 일이나 앞으로의 인생에 분명 도움이 될 변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일상의 고민이 한없이 작아진다.

요즘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긍정적 변화이며 나는 이것을 아기가 가져온 '조망효과'라고 부른다. 조망효과는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극적 심리 변화에서 탄생한 심리학 용어이다.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에서 지구를 보게 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본 지구는 한없이 작아보임과 동시에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압도적 아름다움 같은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경험 이후 많은 우주비행사들은 이전의 삶과는 다른 가치관의 변화를 겪었다고 한다. 이처럼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조망했을 때 이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현상을 조망효과라고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어려움이 부딪힌다. 업무적 어려움으로 인해 고민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에 상처 입기도 한다. 하루 종일 엉망이 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길엔 그날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되며 바보 같았던 자신의 대응에 대한 후회와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점점 더 부정적인 감정의 심연으로 빠져들 때가 많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아내와 아기가 있다. 방긋 웃는 아기를 안아들고 가만히 숨소리를 듣다 보면 나를 옭아매었던 부정적 감정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뭐 아무렴 어때. 우리 아가만 건강하면 됐지’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에 붕 떠 있는 것처럼 포근한 안정감과 따뜻함만이 나를 감싸준다. 아기라는 새로운 우주를 목격한 후, 일에 지배받았던 하루의 중력과 감정을 다루는 기존의 관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잠투정을 부리는 아기를 안고 깜깜한 우주와 같은 밤을 유영한다. 낮에 있었던 멍청한 실수와 내일 있을 클라이언트 미팅에 대한 걱정은 몇억 광년 떨어진 별빛처럼 점점 희미해져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