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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Jul 15. 2023

내 작은 영감의 바닷속 브루잉 효과

 아무래도 직업 관계상 아이디어가 업무의 결과물이어야 할 때가 많다.

광고주의 OT를 받고,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조사를 하고, 분석을 마친 후 대략적인 방향성이 정해지면 광고주의 과제를 해결할 솔루션을 내기 위해 깊고 깊은 아이디어의 바다에 뛰어든다. 그리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깜깜한 생각 속을 유영하다가 '이거다!' 하는 아이디어 보이면 수면 위로 스윽 끄집어내어 문장이나 비주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뭔가 전복 채취 과정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아이디어의 단초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결정적 순간이 본격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겠다고 작정하고 파고들 때는 마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이디어는 오히려 전혀 상관없는 순간, 이를테면 샤워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멍을 때릴 때 떠오를 확률이 더 높다. 이런 빅 아이디어 점지의 순간을 마주할 때면 '조상님이 나를 가엽게 여기어 아이디어를 내려주신 건가?'하는 망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이런 현상을 '브루잉 효과'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상님의 측은지심과는 별 상관없는 것 같다.


브루잉 효과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탐색을 멈출 때 비로소 결정적인 영감이 떠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순금 왕관의 진위 여부를 어떻게 증명할지 오랜 시간 고민해도 해결하지 못하다가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다가 넘쳐흐르는 물을 보고 '유레카!' 하며 답을 찾아낸 것이 대표적인 브루잉 효과 볼 수 있다.

나는 단지 고민을 멈춘다고 해서 번뜩이며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브루잉 효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논리와 분석의 영역에서 무의식과 공상의 영역으로 사고를 이동시켰을 때 나타나는 창의력 증폭 현상에 가깝다. 무의식 속에서 내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경험과 지식들이 불규칙하게 융합되고 그 과정 끝에 논리와 분석으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던 생경하고도 적합한 결합이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언제가 보았던 영화 속 한 장면이 전혀 관련 없는 제품의 특징과 결합되어 광고 스토리라인이 되기도 하고 여행 중 가보았던 이국적인 공간에서의 경험이 지구 반대편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 컨셉으로 발전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최근 나는 이런 아이디어 승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요즘 뜨는 밈과 트렌드를 바탕으로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내는 후배들과 유연한 생각의 확장과 노하우를 통해 정제된 아이디어를 들려주는 선배들에 비해 늘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뻔한 아이디어만 수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반성하고 있는 요즘이다.

사실 아이디어를 내고 그럴싸하게 정리하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던 때도 분명 있었다. '역시 나는 천재임이 분명해!'하고 콧김을 팡팡 내뿜었던 자신감 넘치던 시절. 그런데 그 시절과 비교해 최근의 나는 무엇이 문제이 부족했던 것일까? 자체 분석결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재료가 되는 인풋이 소진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럴 만도 하다 요즘의 일상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업무에만 집중해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후에는 집안 일과 육아에 집중한다. 이 단순하디 단순한 일과 속에서 새로운 영감의 재료가 되는 인풋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아니다. 사실 다 핑계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도를 꺼려 하는 나의 태도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

익숙한 선택은 안심이 된다. 자주 가보았던 곳에서는 나 같은 길치도 여유롭다. 익숙한 카테고리를 주제로 한다면 유려하게 대화를 주도해갈 수 있다. 그렇게 익숙함이라는 안온함을 즐기는 사이, 영감의 바다는 바닥을 보이며 메말라 버렸다.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진짜 메말라 버린 바다를 채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영감의 바다를 채우는 일은 언제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동네로 모험을 떠나자'

'어린 친구들이 몰리는 장소를 기웃거려보자'

'불호하는 장르의 음악을 들어보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고전을 들고 여행을 떠나자'

'이상한 단어를 검색해 보자'

건조해진 바닥에 서걱서걱 메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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