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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Feb 26. 2023

나의 무료하고 소중한 골디락스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면 여러 가지 곤란한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글을 써서 올려놓고 한참 후에 치명적 오류를 발견한다거나, 내가 써놓고도 너무 재미가 없다거나, 팔자에도 없는 악플을 목격하게 된다거나 등등. 이런저런 곤란한 상황 중 하나는 쓸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순간이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지만 열흘 이상 새로운 글을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해지며 '빨리 무언가 써내야 할 텐데...'하는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뭐 대단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전혀 궁금해 하지 않을 평범한 아저씨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심리학, 경제학과 엮어 쓰고 있는데 이야깃거리가 떨어진다는 것이 나조차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점심에는 쌀국수를 먹었고 아기를 유아차에 태워 산책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따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무리 아마추어 작가라고 할지라도 부끄러운 일이다.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그래! 오늘은 이런 사건이 있었지’할 수 있는 작은 굴곡이라도 생겨야 그것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나의 일상을 돌아보면 특별한 일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해 낼 수가 없다. 특별한 이벤트도 없고 딱히 큰 고민거리도 없는 요즘이다. 대체로 평화롭고 기꺼이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별일 없이 산다. 어쩌면 이런 요즘이 내 인생의 골디락스 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골디락스는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딱 좋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를 말하는 경제학 용어인데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한 집에 사는 세 마리 곰이 각자 냄비에 수프를 끓인 후 잠시 집을 비웠는데, 그 사이 골디락스라는 이름의 소녀가 집을 찾아왔다. 소녀는 배가 고팠던 나머지 냄비에 들어있는 수프를 맛보았는데, 첫 번째 수프는 너무 뜨겁고, 두 번째 수프는 차가웠고, 세 번째 수프가 먹기 딱 좋은 온도였기에 소녀는 세 번째 수프를 먹었다고 한다. 적당히 식은 골디락스의 수프처럼 경제학에서는 물가 상승을 우려할 만큼 과열되지도 않고, 경기 침체가 우려될 만큼 냉각되지도 않은 딱 이상적인 상태를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인다.


요즘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골디락스의 수프처럼 심각하게 머리 아픈 고민도 특별히 흥분되는 사건도 없다. 아내와 함께, 아기와 함께 평범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상이 재미없다기 보다 평화롭게 느껴진다. 글 쓸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주 좋은 리듬감이다.

경제 상황으로서의 골디락스는 아마도 쉽게 만날 수 있거나 나타나더라도 길게 유지되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이상적 경제 상황이 오래 유지되었더라면 골디락스 같은 특별한 이름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내 일상의 골디락스 기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언제든 일상의 평화로운 리듬을 깨뜨릴 사건이 생겨날 것이다.

‘조만간 익숙했던 패턴은 사라지고 무료한 기분은 저멀리 사라지겠지’하고 격하게 출렁거릴 리듬을 마음 속으로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금의 알맞은 일상을 느긋하게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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