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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May 05. 2023

모라벡의 역설과 인류의 희망

 AI 때문에 다들 난리다. ChatGPT의 등장이 불을 지폈다고 봐야겠다.

사실 AI라는 이름을 단 서비스들은 그동안에도 많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객 응대용 챗봇처럼 큰 임팩트가 없거나 알파고처럼 신기하지만 일상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서비스들이었다. ChatGPT의 등장은 그동안의 AI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의 실질적 일상과 업무에 AI가 아주 깊숙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뚜렷한 예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보고서 작성을 위한 마케팅 사례를 구글링하려다가 시험 삼아 ChatGPT에게 한번 물어보았다.

"최근에 한국에서 진행된 에코 마케팅 사례를 알려줘"

1분도 채 되지 않아 10가지 사례를 줄줄이 뽑아낸다. 그중 일부는 너무 뻔한 사례라 써먹기 어렵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같은 양의 사례를 내가 직접 찾아야 했다면 최소한 두세 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다시 한번 질문해 보았다.

"최근 친환경 제품을 출시한 전자제품 회사들을 알려줘"

역시 순식간에 5가지 글로벌 전자회사들을 알려주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친환경 제품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

'이거 진짜 편하잖아?' 하는 생각과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직까지는 ChatGPT가 제공하는 정보의 정확도에 대한 의문이 있는 듯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기존의 문제를 보완한 버전은 금방 등장할 것이다.

장차 사람이 찾는 속도 보다 빠른 것은 물론이고 정확도 높은 정보를 찾아주는 AI가 등장한다면 나와 같은 직장인의 쓸모는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경쟁사와 경쟁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AI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AI를 이용해 마케팅용 카피를 생성하는 서비스들이 등장했고 디자인 영역에서 AI 활용은 꽤 익숙한 일이 되었다. 먼 미래에나 일어날 줄 알았던 'AI가 인간의 자리를 빼앗아가는 세상'이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온 것이다.


인간이 AI 보다 월등한 부분은 없는 것일까?

한때 AI는 결코 인간의 예술적 감각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AI의 퍼포먼스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에서 디지털 아트 부문 우승작으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라는 작품이 선정되었는데 이 작품의 출품자는 이 작품을 AI 프로그램 Midjourney를 이용해 제작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작년 뉴욕 패션위크에서는 AI 아티스트 '틸다'가 인간 디자이너와 협업해 패션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AI가 만들어낸 작품의 예술성과 그 가치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테크닉이라는 측면에서는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경지까지 올라온 것이다.


선천적 비관론자인 나의 머릿속은 더 빡빡한 미래의 경쟁 상황을 그리기 바빠졌다. 결국 이렇게 AI에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AI는 뛰어나지만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AI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만의 무기가 있을 것이다. 모라벡의 역설이 희망을 준다.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 컴퓨터에게는 쉽고 반대로 인간에게 쉬운 일이 컴퓨터에게는 어렵다는 역설을 '모라벡의 역설'이라고 한다. 미국의 로봇 공학자인 한스 모라벡이 ‘어려운 일은 쉽고, 쉬운 일은 어렵다’는 표현으로 컴퓨터와 인간의 능력 차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데에서 유래했다.


얼마 전 있었던 한 상황이 떠올랐다. 경쟁 PT에서 패하고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된 날, 퇴근을 하며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 PT 떨어졌다ㅠㅠ 우울한 하루네'

그러자 ChatGPT보다 빠르게 아내에게 답변이 돌아왔다.

'팍씨. 사내자식이. 까짓것 소주 한잔 하고 잊어버리자. 닭발 시켜 먹을래?'

내가 평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매운 음식을 당겨 한다는 사실을 이미 학습한 아내는 너무나 손쉽게 솔루션을 내렸다. 뭐. 거칠긴 하지만 나에게는 위로가 되는 답변이었다. 매운 닭발에 소주 한잔하며 아내와 수다를 떨다 보면 오늘 하루의 힘들었던 일들도 곧 희미해질 것이다.


'다정한 말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하루 종일 꽃을 피운다'는 말이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늘 소중한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살아간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이 기본값을 설계된 것처럼 말이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인간 특유의 능력이 적제적소에 다정한 말을 건넬 수 있게 한다.

AI가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이렇게 별것 아닌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마음에 꽃을 피울 수 있을까? AI는 결코 건넬 수 없는 다정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인간만이 지닌 최후의 무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무기를 잘 활용한다면 AI와는 다른 인간만의 존재가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인류에게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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