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적인 나의 여가생활. 그러니까 누군가 스몰토크로 "퇴근하고 주로 뭐 하세요?" "주말엔 뭐 하며 보내요?" 라고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주로 독서, 산책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독서와 산책은 누가 듣기에도 모나 보이지 않으면서 귀찮은 추가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을 법한 무난한 여가생활이라고 판단되었기에 늘 그렇게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은밀한 사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내가 여가시간에 가장 애정하는 행위는 독서와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2위와 3위 정도이고 진짜 1위는 '봤던 예능 프로그램 다시 보기'이다.
안다. '그게 뭐야'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이상한 여가생활이다. 이미 아는 내용을 또 보는 게 도대체 무슨 재미냐고 물을 수 있지만, 봤던 것을 또 보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 재미가 있다.
퇴근 후 차가운 맥주를 준비하고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들의 리스트를 훑어본다. 그중 다시 본지 가장 오래되어 '어떤 내용이었더라?'하고 살짝 갸웃하게 되는 하나를 골라 다시 보기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차가운 맥주와 함께 느긋하게 감상을 시작한다.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똑같은 지점에서 다시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곧 나올 장면을 예감하며 한 박자 미리 미소 짓기도 하고, 때로는 '아 이런 장면이 있었구나' 하고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골치 아프게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프로그램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게임들을 보며 '누가 이길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출연자에 감정이입하여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장면을 놓치지 않을까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다른 짓을 해도 전혀 무방하다.
이런 취미를 갖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직업의 영향이 크다. 광고 기획자라는 일은 어찌 보면 생각이 업무인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데이터에 숨겨있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찾고, 어떻게 하면 지금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기획서 시나리오를 짜낸다. 그렇게 하루의 절반을 '생각'이라는 노동을 하며 보내고 나면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게 된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만큼은 시동을 끄고 엔진을 식히듯 더 이상 뇌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게 된다. '인지적 구두쇠'다운 여가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지적 구두쇠는 생각을 깊게 하면 뇌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에너지를 아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할 때 깊게 고민한다기 보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바탕으로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에 뇌는 에너지를 덜 소모하게 되고 그만큼 머릿속이 편안해진다. 인지적 구두쇠인 나는 즉각적 판단을 넘어 여가생활에 있어서도 최대한 생각을 자제하고 뇌를 휴식시키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인지적 구두쇠의 이 은밀한 여가생활은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는 꽤 효율적인 체계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이래도 되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구두쇠'라는 썩 좋지 못한 어감의 표현에서 예감할 수 있듯이 아주 건강한 심리 체계는 아닐 것이다.
구두쇠가 돈을 아끼듯 생각을 아끼기만 한다면 생각의 근육이 자라날 리 없다. 창의성의 불꽃이 튀어오르기 위해서는 생각의 연료가 필요한데 매번 똑같은 컨텐츠만 봐서는 연료 창고가 쌓일 리 없다.
여가 시간은 휴식의 시간이자 인풋을 쌓는 시간이 되어야 하기에 앞으로는 그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뇌가 간절히 휴식을 원할 때는 지금의 여가생활을 계속하지만 때로는 조금 피곤하더라도 새로운 컨텐츠를 접하기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무한도전이나 다시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