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과 함께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의 나는 집안일엔 손 하나 까딱 안하는 K-아들이었다. 가끔은 엄마를 돕는 누나와는 달리 집안일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지역축제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역으로 치부했었다. 특히 에너지 넘치는 남자아이답게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도 라면 정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도 의욕도 없었던 철없는 시절이었다.
이런 나태한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 건 대학에 입학하며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된 뒤 부터다. 말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청소를 해주고 부족한 생필품을 채워주고 끼니를 챙겨주는 존재가 사라지자 야생에 막 놓여진 방생 동물처럼 필사적으로 환경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청소와 정리 정돈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필품들의 최저가를 비교하고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스스로 끼니를 챙기는 일 또한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처음에는 배달음식이나 편의점 간편 조리식에 기댔지만 몇 달이 지나자 그런 음식들은 더 이상 쳐다도 보기 싫을 지경에 이르렀다. 뭐가 되어도 좋으니 집밥이라는 것이 간절해지자 저절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레시피를 찾아보고 필요한 재료들을 사다가 어설픈 칼질로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주부 블로거분들이 올려놓은 집밥 레시피에서 고난도의 과정이나 자취생이 구비해놓기 어려운 세부 재료들은 과감히 생략되었으나 대기업 맛에 찌들어있던 자취생에게 직접 만든 음식들은 작은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과 집에서 직접 재료를 다듬어 만든 음식은 뭐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각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결혼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내의 요리 실력이 나보다는 월등했으므로 대부분의 집밥은 아내의 손에 탄생했지만 아내가 야근하는 날의 저녁 식사나 아내가 잘 해주지 않는 자극적인 음식들, 혹은 아내의 생일과 같은 대형 이벤트 때에는 여전히 어설프지만 뚝딱뚝딱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다.
그동안 스스로 탄생시켰던 몇몇 음식들을 떠올려보자면 캔 참치와 스팸, 두부가 잔뜩 들어간 김치찌개, 고향에서 보내 준 대량의 무를 처리하려고 만들어 보았다가 필살기 메뉴로 자리 잡은 소고기뭇국, 부모님과 아내, 장인어른, 장모님 등 가족들의 생일 때 순회공연처럼 만들고 있는 미역국, 철저히 사진촬영 용으로 만든 하트모양 맛살전, 야채무쌈말이 등이 떠오른다. 여전히 자취생 때 수준을 크게 넘어서진 못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 리스트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꽤 뿌듯한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 온 여러 음식들 중 특히 겨울이 다가올수록 생각나는 음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제 만두이다. 아내와 나는 집에서 만든 이 만두를 4D 만두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한다.
4D 만두의 탄생은 신혼 초 겨울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릴없이 함께 TV를 보고 있던 중 마침 ‘집밥 백선생’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자취생들의 구원자 백종원 님이 집에 있는 재료들로 만드는 요리들을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우리가 보았던 편이 만두 편이었다. 다른 요리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만두를 굽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만두 한쪽 면을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굽다가 한쪽이 익을 때쯤 소량의 물을 붓고 뚜껑을 덮어주면 ‘촤악’, ‘지글지글’하는 소리와 함께 나머지 한쪽 면이 수증기로 익어간다. 그렇게 완성된 만두는 한쪽 면은 군만두처럼 바삭바삭하고 또 다른 한쪽 면은 찐만두처럼 촉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다가 일시정지를 눌러버렀다.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꽤 늦은 밤이었지만 다음날도 아니고 지금 당장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우리는 냉장고를 뒤져 김치, 두부, 남은 돼지고기 등의 재료를 확보하고 냉장고에 없는 만두피, 부추 같은 재료들은 집 앞 슈퍼로 후다닥 뛰어나가 사 왔다.
김치, 두부, 돼지고기, 부추 등 재료들을 작게 다져 큰 보울에 몽땅 넣고 섞어 만두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입해 온 만두피를 펼쳐 만두를 하나하나 빚기 시작했다. 파는 만두처럼 예쁜 모양으로 빚어내는 아내와는 달리 크로와상 모양, UFO 모양의 개성 넘치는 만두들이 탄생했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어느새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시시덕 거리며 만두소가 다 떨어질 때까지 만두를 빚었다.
그리고 방송에서 본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쪽 면을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굽다가 물을 붓고 뚜껑을 덮어주는 방식으로 만두를 구워냈다. 그렇게 완성된 첫 번째 만두를 접시에 담고 차가운 맥주를 잔에 꼴꼴꼴 따라 둔 후 일시정지 해둔 방송을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다음 만두들이 구워지는 동안 첫 번째 만두를 한입 베어 물었다.
눈으로는 방송에서 백종원 님이 특유의 말투로 제자들을 혼내며 만두를 만드시는 장면이 나오고, 귀로는 프라이팬에서 기름과 수분이 튀며 나는 소리가 들리고, 코로는 만두가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 마지막 입으로는 너무나 담백한 맛과 바삭하면서도 촉촉한 식감이 만족감을 주었다. 그야말로 4D 영화를 볼 때처럼 생동감 넘치는 야식이었다.
어쩌면 대기업에서 만든 유명 만두 제품이나 만두 맛집이라고 소문난 중국집의 만두보다는 재료나 스킬 면에서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4D 영화와도 같은 생생한 경험과 이케아 효과로 인해 지금까지 먹어 본 가장 맛있는 만두로 기억되고 있다.
이케아 효과는 이케아의 가구를 직접 운반해 와서 하나하나 조립해 직접 만들면 다른 가구보다 더 애착이 생기는 것처럼 본인이 공들여 만든 결과물에 대해 더 애정이 생기는 편향적 심리를 말한다. 내 손으로 직접 고생해 만들었다는 애착이 객관적 완성도를 뛰어넘는 콩깍지를 씌워주는 것이다.
가구뿐만 아니라 직접 만든 요리에도 이케아 효과가 깃든다고 믿는다. 누군가 해준 요리를 대접받거나 완성된 제품을 데우기만 해 먹는 것도 편하고 좋겠지만 스스로 만든 요리를 먹는 것 또한 번거로움을 뛰어넘는 즐거움이 있다. 혹시나 누군가 요리에 재능이 없다는 괜한 걱정으로 직접 만들어 먹길 머뭇거리고 있다면 어설프더라도 일단 한번 만들어 보기를 권해주고 싶다. 이케아 효과라는 생각보다 강력한 조미료가 부족한 맛을 채워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