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백구십칠 Mar 23. 2024

P의 Stussy

 평소 P가 머릿속에 가장 자주 떠올리는 말은 아마도 '귀찮다'일 것이다.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먼저 말을 거는 일, 취미생활을 갖는 일, 흥미로운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일 등 건실한 사회인이라면 응당 해야 할 많은 일들이 P에게는 귀찮음의 영역이었다.

'아휴 귀찮아'

P는 늘 머릿속에서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일상을 살아갔다.


온 힘을 다해 삶을 귀찮아하는 P이지만 가끔 어이없을 정도로 과감하게 귀찮은 일을 해내 버릴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P는 최근 이직을 감행했다. P의 평소 성정을 생각한다면 안정적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회사로 옮긴다는 것은 심각한 귀찮음을 야기하는 일 일 텐데 P는 갑자기 그런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그것도 3단계에 걸쳐!), 새로운 사람들과 조직 구조를 파악하고,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회사의 일원으로 흡수되어갔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문득 생각했다.

'잘도 그 귀찮은 과정을 견뎌냈군'


P가 압도적인 '귀찮음'을 떨쳐내고 이직을 감행한 것은 '근묵자흑'의 원리 때문이었다. 한없이 게으른 P였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인으로서의 위기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P의 경우 안락한 기존 회사 생활에 빠져 살다가 '이만하면 됐지'하고 성장을 멈출 것 같다는 위기감이 있었는데 '근묵자흑'이라는 말처럼 주변 환경과 사람들이 달라지면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P는 과감하게 이직을 감행한 후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배울 점들을 최대한 흡수되려고 애썼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 그들이 정보를 얻는 창구, 그들의 만들어 낸 성공 캠페인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주변 환경이 달라지며 P가 흡수한 건 일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다. 옷차림 또한 P가 새롭게 흡수한 영역이었다. 원래 P가 다니던 회사는 마포구의 빌딩 밀집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P가 평소 자주 마주치던 사람들은 대부분 정장 차림이었다. P의 회사는 복장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그래도 단정한 셔츠와 슬랙스 바지 정도의 차림이 주류였다. 특별히 옷차림으로 튀고 싶지 않았던 P는 대세를 따라 단정한 셔츠를 주로 입으며 출근했었다.


하지만 P가 새롭게 옮긴 회사는 완전 분위기가 달랐다. 새로운 회사는 이태원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태원은 스트릿 패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태원역에서 나와 회사를 향해 걷다 보면 헐렁한 핏의 카고 바지와 후드티 차림의 젊은이들이 태반이었고, 새기 팬츠를 입고 어슬렁거리는 외국인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새로운 회사의 사람들 역시 거리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스트릿 스타일의 옷차림이 많았다. 이곳에서 P의 단정한 옷차림은 오히려 눈에 더 띄는 '블랙스완'과도 같았던 것이다.


P의 쇼핑 위시리스트는 점점 새로운 패션 브랜드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기존에 입던 스타일과는 판이하게 다른 헐렁한 바지와 박시한 티셔츠들을 다루는 스트릿 브랜드들의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여러 스트릿 브랜드들 중에서도 P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스투시였다. 말도 안 되는 가격 자체가 상징인 슈프림이나 P가 입기엔 너무 과한 디자인의 베이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부담 없는 가격과 심플한 로고 플레이가 마음에 들었다.

서핑보드 매니아들의 브랜드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스투시는 숀 스투시와 프랭크 시나트라 주니어가 함께 만든 브랜드이다. 특히 숀 스투시는 서핑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초창기에는 직접 서핑보드를 만들고 거기에 로고를 박아 넣어 판매하기도 했다고 한다. 숀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스케이트 보더, DJ, 아티스트들과 교류했고 그들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소개하며 그들의 문화 속에 스투시가 흡수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스투시의 옷들에는 서핑 매니아나 스케이트 보더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묻어났으며 어떻게 움직여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 넉넉한 핏의 제품들이 많았다.


사실 P는 평소에 서퍼들에게 작은 동경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서핑 같은 과격한 취미생활을 할 일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바닷가에서 파도 위를 자유롭게 서핑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량해졌다. 그리고 짜디짠 바닷물을 마시면서도 계속 거센 파도에 도전하는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주변 환경이 달라지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일하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관심사도, 그리고 옷차림도.  혹시 모를 일이다. P 같은 심각한 귀차니스트도 서퍼들의 옷을 입고 그들 사이를 기웃거리다 보면 언젠가 파도에 몸을 맡기는 날이 올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