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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리어드 Sep 25. 2023

퇴직 후 중년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다.

58년 개띠의 공부 도전기 (4)

대한민국 남자 중 군대에 갔다 온 남자가 공통적으로 꾸는 악몽이 있다. 바로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이다. 꿈이 깨면 군대를 갔다 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꾸는 악몽이 있다. 출근하는데 정문 수위한테 제지당하거나, 전자키가 작동안해 사무실에 들어갈 수 없거나, 중요한 거래처를 만났는데 명함이 없어져 당황하는 꿈이다. 꿈을 깨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서글픈 한숨이 나온다. (나 역시 퇴직 한지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도 종종 이런 꿈을 꾼다)         

 

어찌보면 퇴직 후 중년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다.          

     

첫째, 정체성의 상실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년은 직장인이다. 50대 초중반부터 시작되는 퇴직은 대략 25-30년의 직장생활을 마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인간會士人間으로 젊음을 다 바친 우리나라 중년에게 회사 또는 직장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다. 회사와 분리된 나를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날 평생 몸을 담았던 직장에서 나오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평소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회사명함이 없어지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도 사라지게 된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퇴직 후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리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명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 동기 중 50대 초반에 조기 퇴직한 친구가 있었다. 한 때 방송사 기획본부장으로 잘나갔는데 갑자기 퇴직하게 되었다. 퇴직 후 그는 모임에서 사라졌다가 최근에 다시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퇴직한 직후 명함이 없어지자 사람들 만나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나 역시 퇴직 후 명함이 없어지자 사람들 만날 때마다 난감한 느낌들었다.          


둘째, 권위의 상실이다.     

베이비부머 시대의 한국 중년 남성들은 대부분 외벌이로 가정을 부양해왔다. 그런데 퇴직을 하게 되면 경제적으로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특히 요즘처럼 은퇴시기가 앞당겨지면서 경제적 능력 역시 일찍 소멸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가장의 권위는 경제력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돈을 벌어다 가정에 줄 수 있는 상태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유지되지만 퇴직 후 경제적 능력이 상실되는 순간 대부분의 경우 가장으로서의 권위 역시 사라진다. 소설가 김훈의 칼럼집 <밥벌이의 지겨움>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애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들아, 남자란 무슨 일이 있어도 밥벌이를 해야한다‘ 사실 동물의 세계도 비슷하다. 세렝게티 초원의 수사자도 사냥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무리에서 밀려난다.          



셋째, 관계의 상실이다.     

퇴직 후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 관계의 상실이다. 우리나라 남성들 관계의 절대적 부분은 회사 업무 관련, 즉 목적 중심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 퇴직하는 순간 공고해 보이던 관계도 일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에 고립된 느낌 또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에 빠진다. 현역 시절 귀찮을 정도로 오던 전화도 퇴직 후 2-3개월이 지나면 뚝 끊긴다. 어쩌다 오는 전화는 보험이나 대출하라는 스팸성 전화뿐이다. ㅎㅎ 대기업에서 임원급 정도로 잘나가던 사람이 퇴직을 하면 더욱 고립감을 느낀다고 한다. 기업에 있을 때는 거래처와의 수많은 전화나 약속도 퇴직 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단번에 끊기고, 어떤 퇴직자는 야속함을 넘어 분노감을 느낀다고 한다. 한 마디로 버려진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고립뿐만 아니라 가정 내에서의 고립도 퇴직자들을 괴롭게 한다. 젊어서는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가족과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 대화하는 기술도 서툴게 되어 퇴직 후 갑자기 가족과 대화를 시도하게 되면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다. 퇴직 후 중년 남성은 졸지에 고립무원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일본 유행어 중 ‘젖은 낙엽족’이란 말이 있다. 평생동안 오로지 직장 일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했던 탓에 퇴직 뒤에는 아내에게만 매달리게 돼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중 노년의 남성상을 일컫는 말이다. 퇴직 후 중년 남성의 관계상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넷째, 건강의 상실이다.     

보통 나이 50을 넘으면 신체적으로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젊어서부터 건전한 생활, 규칙적인 운동과 같은 건강생활을 했다면 몰라도 업무상 과로와 잦은 저녁 모임으로 20~30년을 보낸 대부분의 중년은 신체적 이상을 경험한다. 고혈압, 당뇨, 위장병, 관절 이상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눈이 침침해지는 노안현상이 두드러진다. 또한 기억력뿐만 아니라 욕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성욕도 감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건강의 상실은 자신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처럼 건강이 서서히 상실되기 시작하면서 건전한 정신도 상실되어 불안감, 우울감, 비관적 생각 등이 퇴직 후 중년의 남성을 괴롭힌다. 이로 인해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에 의하면 50대의 우울증이 20.6%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다고 한다. 또한 퇴직 남성의 우울증 위험이 정상적인 사람의 3배에 가깝다는 보고도 있다.     


이러한 상실의 시기가 닥치면 공허함이 마음에 가득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제까지 살아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공부다. 우선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잡는 공부가 필요한 시기이다. 퇴직 전에는 기능적인 삶, 역할적인 삶을 살아왔다면 퇴직 이후에는 존재론적 삶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시기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 평균 90세를 산다면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막연히 세월을 보내기엔 너무나 긴 세월이다. 공부야말로 잃었던 정체성을 되찾고, 자존감을 높이며, 삶을 풍요롭게 해줄 방법이 아닌가 한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의 저자 일본 메이지대학의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마다 책을 읽으면 서서히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삶의 호흡이 길어지는 공부를 하라’라고 한다. ‘호흡이 깊은 공부’는 새로운 지식으로 마음의 세포를 재생시켜 지친 마음을 치유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고 말한다. 퇴직 후 공부는 자칫 퇴직자가 갖기 쉬운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간, '잉여인간'이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게해 준다.          

그리고 공부라는 목표를 가지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적어도 치매에 빠질 확률은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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