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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Nov 18. 2022

집에 있는데 집에 가고 싶어

#이제 저 집에 좀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아 여기가 집이군요

마음이 한없이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내 주변을 더 나아지게 바꿀 수 없다 느껴질 때 좌절을 느낀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안간힘을 써도 제자리인 것 같이 느껴질 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새벽 기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생각하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 결과들이 다 마음에 안 들고,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아무도 찾지 않는 내 방 내 침대에 누워, 극세사 수면 바지에 내가 좋아하는 익숙하게 목 늘어난 면티 입고 배달 음식 하나 시켜서 맥주 한 캔 들고 넷플릭스나 틀어 놓으면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질 것만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가정 주부이고, 자의 반 타의 반 집에서 있은지 벌써 6년째이다. 이제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은데 이미 집이라는 것이 큰 문제다. 


가사 노동이 주 업무인 가정 주부에게 집은 끊임없는 일터다. 쉼 없이 엄마를 불러대는 아이들에게 24시간 둘러 싸여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 결혼 전 독립해서 혼자 살 때 퇴근 후에 돌아갈 곳이 있는 집이란 나에게 안전하고 평온한 한 평 나만의 안전지대였는데 더 이상 이제는 아니다. 육아와 가사 노동의 현장이며, 매일이 치열하고 귀여운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긴장하고 업무에 집중하고 업무가 끝나면 무장 해제 상태로 휴식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새벽에도 아이 울음의 알람이 울리면 즉시 일어나 앉아야 하는 대기조의 삶을 산다. 그나마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가 아프지만 않으면 그래도 업무 강도는 낮은 편이다. 그러니 매우 감사해야 하는 상태이다.


가사와 육아 노동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즉 집이 업무 공간이 아닐 수 있는 상황에서- 익숙하고 편한 나의 집을 오롯이 나만 쓸 수 있는 시간과 상태가 주어진다면 난 무엇을 하고 싶을까. 우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익숙하고 늘어난 츄리닝을 꺼내 입을 거다. 물론 갑갑한 속옷은 벗어던져야지. 그리고 정성스럽게 라면을 끓일 테다. 한국이라면 바로 폰을 들어 배달 음식을 시킬 테지만, 여긴 미국이니까 해 먹어야 한다. 하지만 가사 노동에 이 귀한 시간을 오래 쓰고 싶지는 않다. 라면은 끓이기 쉽지만 의외로 애들을 데리고 가장 먹기 힘든 음식 중에 하나이다. 면이 퉁퉁 불거나, 다 식어버리기 전에 가장 맛있을 때, 가장 맛있게 먹기가 어렵다. 뜨거워 죽겠는데 당장 입에 넣지 않으면 언제 다시 편안히 먹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입에 쓸어 넣게 된다. 입천장에 다 데면 서럽다. 먹긴 먹었는데 뭘 먹었는지 모르겠고 애들이 뜨거운 국물에 손이라도 델까 어서 먹고 치워버리지 않으면 불안하니, 온전히 그 맛을 즐기며 먹기에 은근히 사치인 음식이다. 그러니 진짜 정성스럽게 계란도 넣고 파도 송송 썰어 내가 좋아하는 상태의 너무 불지도 너무 덜 익지도 않은 면을 건져 올릴 테다. 거기에 맛있는 맥주 한 캔을 딸 테다. 라면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먼저 따서 벌컥벌컥 들이키며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를 고를 테다. 라면이 딱 알맞게 준비되면 호로록호로록 면치기를 하며 맛있게 먹고 몰입해서 드라마를 볼 테다. 


배가 부르면 가장 좋아하는 아로마 오일을 욕조에 풀어 따끈하게 반신욕을 하며 이북으로 다운로드하여 놓고 아직 못 끝낸 책을 읽을 테다. 시간 관리가 어쩌고 하는 자기 계발서와 읽다 만 원서들은 싹 다 밀어 놓고, 겁나 한국 작가가 맛깔나게 써낸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게 아까운 몰입도 쩌는 소설이면 좋겠다. 그렇게 목욕을 끝내고 개운하게 나와서는 산후조리용으로 중고로 사두고 작동되는지 확인 차 한 두 번 써보고 차마 써보지도 못한 다리 마사지 기계를 꺼내 와 다리를 풀며, 셀프 네일 아트를 하고 싶다. 손톱은 대체 왜 이리 빨리 자라는지 한탄하며 급하게 바싹 깎아내지 않고, 여유롭게 하나하나 트리밍 해서 길게 길게 다듬을 테다. 마치 손 쓰는 일은 하나도 안 해도 되는 사람처럼 여유를 부릴 테다. 제일 맘에 드는 셀프 네일을 사다 놓고 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며 5년이 지나버린 그 스티커 네일 세트를 꺼내서 하나하나 공들여 붙일 테다. 잘 가꿔진 손톱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겠지. 


이제 냉장고를 열고 마스크 팩과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꺼내 올 테다. 살짝 무게감이 있는 포근하고 따뜻한 순면 이불 안에 들어가 전기장판을 수면 모드로 은은하게 틀고 앉아서 일기를 쓰고 싶다. 애들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 먹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느끼며 감사 일기를 쓸 테다. 그러다 잠이 오면 명상 음악을 틀어 놓고 가벼운 감사 기도를 하고 수면 마스크 팩을 올린 채 잠이 들 테다. 아무도 깨우지 않을 때까지 자유 의지로 눈이 떠질 때까지 푹 자고 싶다. 암막 커튼과 휴대폰 무음은 필수다. 소리도 빛도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게 하고 싶다. 


이제 곧 11월도 마무리되고 곧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찾아오겠지. 할 일을 산더미 같이 쌓아 두고 해결해야 할 일들은 아주 당차게 미뤄 놓고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생생하게 상상하니 기분이 몹시 좋아진다. 허둥지둥할 일을 해내야 할 미래의 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은 잠시 정성스러운 멍 소리를 이리 풀어내야 속이 풀리겠다. 


이제 진짜 저 집에 좀 보내주시면 안돼요? 아, 여기가 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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