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의시댁 #씨댁 #Thanksgiving #여우와두루미 #드러눕기
브런치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받은 나의 글들을 단연 시댁과 관련된 자극적인 제목의 글들이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속 편히 떠들 수 없는 이야기들도 글로 풀어놓으면 속이 시원해져서 내가 사랑하는 이 비밀의 공간에 잔뜩 풀어놨는데 많은 분들의 공감과 한 편 욕도 함께 던져주셔서 본의 아니게 과도한 관심을 받았었다.
지난 미국의 큰 명절인 Thanksgiving day 시누 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와서 지내다 가면 어떤지 물으셨다. 우리는 이민을 와서 시부모님은 한국에 계시고, 손위 시누 언니는 9시간 거리 타 주에 살고 있다. 한국의 설날과 추석처럼 미국은 온 가족이 추수감사절에 모인다. 시누 언니는 백인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인 시부모님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 그곳은 말하자면 시댁의 시댁이 될 터였다. 시댁의 시댁은 나의 시댁이 아니니 편해도 되는 것인가? 시댁의 시댁이니 두 배로 어려워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시댁이 편하지 않다. 시누는 불편하고 시어머니는 힘들다. 객관적으로 그들은 나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늘 생각하지만 아무 이해타산 없는 어느 동호회의 언니, 이모쯤으로 만났으면 우리는 꽤나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지만 혈연이 아닌 가족 구조로 만나는 가족은 그 안에 몹시 복잡한 계급, 이해 구조가 얽히고 만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다가가도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관계이다. 분명 서로 잘해주고 싶어 진심으로 다가가는데, 여우와 두루미처럼... 서로에게 먹을 수 없는 그릇에 음식을 들이미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릇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각자의 집 안에서 상대에게 맞는 그릇을 찾아보려 애를 쓰는데 내 집 안에 상대를 위한 그릇은 있지가 않다는 슬픈 사실을 인지했다. 밥이라도 제 때 먹으려면 각자 그릇에 각자 음식을 싸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난 여전히 3년 간의 시집 살이 아래 시어머니에 대한 좋지 못한 진한 기억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나에게 그들은 -겉으로 이제 용서는 했다고 하나- 여전히 다가가기에 용기가 선뜻 생기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최근에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구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모두 하늘로 보내드렸을 때, 가슴 한 편 깊숙이 '그래 나는 연하랑 결혼했고... 그의 부모님은 여전히 정정하 시구나.' 하는 것이 머리를 스칠 때 나는 한 번의 죄책감을 느꼈다. 대체 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튼 내게 시댁이란, 여전히 무겁고 커다란 마음의 짐이었다.
하지만 지난 2년 반의 여정 끝에 나는 용서 비슷한 감정으로 그들을 보내주었다. 그러니, 다시 다가갈 용기가 아직은 없지만 적어도 힘들었던 과거를 다시 회상하며 곱씹고, 괴로워하는 일에서는 적어도 자유로워졌다. 나를 위하여 더 이상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누 언니를 대할 때 더 자유롭게 그녀를 그녀 자신으로 더 봐줄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건강하지 못한 엄마에게서 평생을 가스 라이팅 속에 살아온 그녀는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그녀의 어머니의 손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 역시 온전하게 용서하지 못한 채 시누 언니를 만났으니... 우리 관계는 진흙탕이었다. 자꾸 그녀는 내 눈에 또 다른 시어머니로 보일 뿐이었고, 그녀는 완강히 부인했지만 그녀가 증오하는 그녀의 어머니과 똑 닮은 일을 내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처음으로 시누 언니네 집에 가서 편안히 드러 누웠다. 그녀가 요리를 해줄 때 안절부절못하며 뛰쳐 내려가 무엇을 도와야 할지 묻지 않았다. 그냥 허리가 너무 아파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침에 그녀가 내려가 집안일을 하면 얼른 따라가 거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 무시하고 늦잠을 자 보았다. 그리고 하루는 아이들을 다 맡기고 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아이들을 봐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그래서 두 시간 남짓, 아이들을 맡기고 나가서 지난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여유롭게 밥을 먹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정말 마음 깊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를 위해 집을 호텔같이 준비하여 내어 준 그녀에게, 감사했다. 아이들을 위해 헌신을 다해 노력하는 그녀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용기 내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아이들을 9시에 재우고, 새벽 4시가 다되도록 울고, 울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그녀도 기나긴 사투 끝에, 그녀의 엄마를 마음속에서 용서하는 과정을 겪었고, 이제는 분노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미국에 와서 딸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직 엄마를 보고 싶지 않으니, 오시지 말라."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2년 전 어머님의 아들을 통해 전했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로부터 우리는 선을 긋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자 우리는 우리 자체로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후하 후하!
그녀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이제 시작인 여정이지만 우리는 기뻤고, 처음으로 나는 그녀에 몹시 고마웠다. 순수하게 감사한 마음이 남았다. 이 빚을 갚아야겠다거나,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 없이 온전히 좋았다. 시댁의 시댁은 똑같이 편했다. 그냥 미국인 가정의 문화 체험처럼 편했고, 그녀의 건강한 남편의 부모는 온전히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한 가정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속할 수 있다니, 가슴이 따뜻하게 적셔졌다. 그래 다른 게 집이 아니구나.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이곳이 우리의 집, 우리의 가정이구나. 시댁의 시댁이라는 말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냥 아이들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 나도 시어머니, 시아버지께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엄마, 아빠'라는 호칭으로 그 따스한 미국 할머니, 할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지금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곳이 나의 집, 이 분들이 나의 엄마, 아빠 내 남편의 엄마, 아빠이구나.
올 해는 온전히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 진정한 Thanksgivin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