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엄마 자격이 없다. #가정 폭력 자진 신고 에세이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다. 등과 엉덩이를 내리치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아이의 작은 어깨를 잡고 온 힘을 다해 흔들었다. 아이를 확 밀쳐 내고 문짝이 부서져라 차 문을 닫았다. 아이도 기절할 듯 울고 나고 울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이성을 잃었다. 육아를 시작한 이후 나는 오늘 최악의 엄마였다.
만약 이 장면을 지나가던 경찰이 봤다면 나는 당장 아동 학대로 잡혀가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을 것이다. 집도 아니고, 주말 대낮에 사람들이 멀쩡하게 지나다니는 교회 주차장 구석이었다. 어쩜 이런 공공장소에서 나는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을까.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 자격이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 놀이터에 놀다 작은 생채기만 나도 마음이 아렸던 귀한 내 새끼. 그 작고 보물 같은 아이에게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을까. 분노 조절에 실패한 정신 미약 상태로 느껴졌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안전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한참을 흐느껴 울다 이성을 되찾은 나는 숨을 고르고 아이를 데려와 꼭 안았다. 아이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가 손을 벌리자 바로 매달려 안기고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귀에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를 연신 속삭였다. 아이를 끌어안고 "민아 미안해, 엄마가 진짜 미안해. 아무리 화가 나도 너를 때리진 말았어야 했는데 엄마가 못 참고 때려서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사과를 아무리 해도 죄책감은 가실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씻기며 찬찬히 아이 몸을 들여다본다. 온 힘을 다해 잡고 흔들었던 어깨에 살짝 붉은 기가 남아 있다. 미안함에 다시 몸에 힘이 쭉 빠진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정말 이 위험천만한 나의 정서 상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이는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나에게 보인다. '엄마가 씻겨줘. 엄마랑 잘래. 엄마가 안아줘. 엄마 엄마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모든 요구에 응한다. 고단히 잠든 아이를 안아 주고, 뽀뽀를 하고,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아이는 잠드는 순간에도,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는 순간에도 내 품에 기어들어 온 애정으로 나를 쓰다듬고 보듬으며 행복해한다. 이미 다 용서한 듯, 그리고 다 잊은 듯 아이는 똑같이 밝기만 하다. 아이에게 진지하게 다시 한번 엄마가 잘못했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리고 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고백 성사를 한다. 주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귀한 생명을 함부로 다룬 것에 대해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했다.
미운 네 살을 겪고 있는 이 아이는 정말 한참 속을 뒤집는 환장기를 지나고 있다. 민이는 아이 셋 중 가장 힘든 아이다. 1,2,3번 중 육아 난도가 가장 높았다. 셋 중 유독 충동성이 높고, 말보다 몸이 앞서는 아이였다. 성격은 급한데 예민하고 목소리는 크고 잠은 가장 없었다. 그래서 어느 시기를 지나던 한결같이 쉽지 않은 아이 었고, 나이대 별로 힘든 이유는 달라졌다. 두 살이 다 되도록 아기띠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아 잘 걸으면서도 늘 안아 재워야 했다. 자정이고 새벽 2시고 깨서 울면 아기띠를 하고 나가 걷고, 또 걸었다. 한 시간을 걷기고 두 시간을 걷기도 했다. 낯선 환경을 싫어해서 새로운 시도는 다 거부했다. 그래서 몸이 힘들었다가 마음이 힘들었다가 몸과 마음이 같이 힘들었다가 그랬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덜 예쁜 것도 아니다. 엄마가 키우기 힘들다고 아이가 안 예쁜 것도, 엄마가 힘들다고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기의 불편함을 크고 분명하게 표현했고 그걸 버티는 나의 마음의 자세가 어떨 때는 여유로웠다가 어떨 때는 여력이 없었다.
돌아보니 아이의 어려운 순간을 지혜롭게 넘겼을 때는, 나의 상태가 좋을 때였다. 그리고 신랑과의 관계 역시 매우 단단한 순간들이었다. 어제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폭주했을까 한 주를 찬찬히 돌아보니, 내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아침부터 신랑과 시댁 문제로 정말 오랜만에 언쟁이 오갔고 나는 서운했고, 신랑이 불편했다. 사실 지난 주중 내내 아이들과 24시간 잠시도 떨어진 순간이 없었고 벅찼으며 주말이니 '날 좀 쉬게 해 줘요, 도와줘요.'의 신호를 보내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그럴 수 없었다. 도도하게 신랑의 호의를 발로 뻥 차버리고 나 혼자 알아서 할 거라며 객기를 부리고 나와 잔뜩 마음에 먹구름이 낀 상태였다. 당연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가 온갖 지인 문제들까지 겹쳐 '내 인생 대체 왜 이런가, 친구들은 거지 같고 시댁은 병신 같아. 다 리셋해버리고 싶다. 땅으로 사라지고 싶다.' 이런 흑주문을 맘으로 중얼거리며 난폭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애 셋을 데리고 애들 주말 활동을 하러 자진 독박 육아를 시작했다. 돌아보면 아이들은 한결같았는데, 나는 형편없는 정서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상태라면 더더욱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다. 나는 지금 아이를 돌볼 수 없는 마음 상태이니 반나절만이라도 도와달라고.
무슨 이유가 있었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엄마의 감정이 아이에게 전달되어서는 안 되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아무리 그 행동이 반복되더라도, 다시 알려주어야 했다. 끝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복하여 단호하게 알려주는 것이 교육이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쓰는 것은 교육이 아니며, 애정을 기반으로 한 행동은 더욱 아니다. 아이는 이 잘못된 모델링으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화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직접 보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사과하고 어떤 이유더라도 다시 반복되서는 안될 것이다.
이 부족한 인간이 엄마라니. 정말 엄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나는 이미 엄마 자격이 부여되었고 이 자격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새삼 어깨가 무겁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어도 육아는 지속된다. 실수를 해도 나는 엄마다. 훌륭하게 육아를 해도 나는 엄마다. 이 부끄러운 고백을 이 공간에 토해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엄마다. 의지를 가지고 빠른 시간 안에 나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이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기록한다. 행여나 잊지 않기 위하여 혹여라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다시 한번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는 날은 브런치가 아니라 경찰서로 가든, 정신과로 가든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