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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가 프리만 Nov 30. 2023

파리에서 3개월 살면 5㎏ 뺄 수 있다

[마흔에 파리가 좋아질 줄이야] 우리집은 엘베없는 4층-2편 

눈앞에 복숭아 빛이 아른거리면 눈을 떴다.


파리에서 3개월을 보낸 집에서 아침을 맞이할 때 느낌이다. 우리 가족은 열띤 토론 끝에 3구 마레지구 내에 위치한 작은 집을 에어비앤비를 통해 잡았다. 월세는 350만원을 조금 넘었다. 후덜덜.


집은 정동향. 아침이면 빼꼼 솟은 태양빛이 넓은 창문을 관통해 침대에 널브러진 한 남자의 얼굴에 매일 닿았다. 그 빛 색깔이 복숭아 색 같다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다. 


수수(아이의 아명)도 이 햇살에 매일 깬 게 분명하다. 안방에서 아내와 함께 자던 수수는 해가 뜰 때쯤이면 거실에 위치한 내 침대로 와서 누웠다. 그렇게 뒹굴뒹굴 대다보면 "오늘은 어딜 가보지", "아침은 뭘 먹지" 따위의 대화를 나눴다. 주섬주섬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낭만이었다.

마레지구의 이 집을 구한 건 분명 행운이었다. 커피를 내리다 창문을 열면 시원한 공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파리의 아침 공기는 미세먼지가 없어 청량하다.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마레지구지만, 창문은 아담한 중정을 향하고 있었다. 큰 나무가 눈앞에 들어오고, 배경에는 파리 특유의 짙은 푸른색 지붕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조용한 집이었다.


아침만 탁월했던 게 아니다. 보랏빛 혹은 분홍빛 낙조를 보며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기쁨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밖을 보며 낮부터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비도 오는데 와인이나 한 잔 때릴까?"와 같은 말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 같다. 밤이면 반짝반짝 빛나는 별 같은 야경이 펼쳐졌다. 


파리의 찻집(salon de the)을 다녀봐도, 마레지구 우리집 정도의 분위기를 내는 곳은 흔치 않아보였다. 비싼돈 내고 찻집을 왜가나. 우리집에서 마시자. 


처음 이 집에 도착했을 땐 당황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 물론이었고, 무엇보다 계단의 각도가 너무 높았다. 비행기 이코노미클래스 탑재 규정 23kg을 딱 맞춘 대형 캐리어 4개를 근육이라곤 없는 하찮은 남자가 들고 올라가기엔 가혹했다. 그리고 분명 3층이라 했는데 4층이었다. 프랑스는 1층을 그라운드플로어로 치고, 2층부터 1층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첫날부터 뼈에 새겼다.


이 계단을 짐을 들고 오르내리다 두 팔이 빠질뻔한 기억은 악몽처럼 남아있다. 캐리어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장을 보고 들어온 후 다음날이면 어깨의 영혼이 탈출하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특히 생수를 사와야 하는 날이나, 와인 욕심을 과하게 부린 날에는 더욱 혹독했다.

딸에게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처음에 수수는 무서워서 이 고각도의 계단을 제대로 오르내리지도 못했다.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수수는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도 그렇게 했다. 특히 난간 중간중간에 이가 빠져 있어서 저기로 아이가 쑥 빠져버리면 어쩌지와 같은 생각도 했었다.


인간은 놀라운 적응의 동물이다. 우리 가족은 고각의 계단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몇 주 지나자 수수도 제법 빠른 속도로 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됐다. 엄마 아빠와 계단 내려오는 시합을 펼치는 건 아이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문까지 먼저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라고 외치고 다다다 내려간다. 너무 서두르다 다칠까봐 적당히 천천히 내려가주면 아이가 대문에 도착해 깔깔대며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계단의 놀라운 유용성. 파리에서 3개월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 아내와 나의 체중은 5kg 내외로 빠져있었다. 계단의 역할이 컸었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다. 아침 산책을 갈 때, 슈퍼를 다녀올 때, 바게트를 사러 갔다 올 때, 시내 구경을 다녀올 때, 일 하러 갔다 올 때마다 이 계단을 하루에 4~5번씩은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파리에서의 3개월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후. 12층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계단을 오르내린 적이 없다. 고각도 아닌 완만한 계단이건만 발길이 잘 닿지 않는다. 파리에서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건강을 위해 계단을 이용해볼까" 생각만, 그저 생각만 해본 적은 꽤 있다.  


그런데 최근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휘황찬란한 신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버렸다. 결정타다. 계단을 이용하기에는 새 엘리베이터가 너무 쾌적하다. 새 엘리베이터, 놓치지 않을 거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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