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고 읽는
공연장에 일찍 도착했으나 할 게 마땅히 없었다. 포토존 사진도 어제 다 찍었는데. 전철로 오 분 거리의 쇼핑몰로 갔다. 주말의 쇼핑몰에는 사람과 봄옷과 애들이 많았다.
러닝화를 사기로 했다. 병원에서 근무화로 신으라고 분기마다 신청을 받는 것. 사실은 땀이 너무 차고 불편해 정작 일할 때는 신지 않는 그것. 달리기도 못 하는데 신발만 좋은 걸 신으면 웃기니까 신은 것. 반 년은 되었으니까 이제는 돈을 써도 되지 않을까? 구멍이 날 때까지 신으려 했는데.. 이제는 너무 더러워졌고, 그렇다고 빨기까지 해서 신기는 싫었다. 그냥 돈이 쓰고 싶었을지도. 그래. 맞아. 돈이 쓰고 싶었다.
이건 이거랑 뭐가 달라요. 아, 이건 중장거리용이고, 이건 하프 뛰시는 분들. 얼마 정도 뛰세요. 이건 발목을 잘 잡아 주고 안정감이 있구요, 이건. 신어 보세요. 네, 이건 추진력을 좀더 주고.. 맞아요. 충격을 완전히 줄여 줘요. 이렇게 가볍다구요? 아, 이건 좀 덜 가볍네. 네, 그래서 조금 나이 있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려요. 그래서 신어 보셔야 합니다. 아하하. 순전히 기능만으로 신발을 사는 게 처음이었다. 신기했다. 신발을 사서 지하철 로커에 넣어두고 공연을 봤다.
이브닝 출근 전. 처져 있던 며칠이 그새 관성이 되어 나가기 싫었다. 신발도 샀고, 오늘은 정말 새 민증을 받아와야 했다. 옷을 입고 새로 산 신발을 신고 나갔다. 이제는 달릴 때 장갑을 끼고 겹겹이 껴입을 필요가 없었다. 머지않아 하의도 짧은 걸 입어도 될 것 같았다. 다시, 위아래 옷에 바람막이만 하나 딱 입으면 바로 나갈 수 있는 그 때가 올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땀 찬 패딩을 매번 뒤집어 걸어놓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오리발을 신고 수영하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추진력을 얻게 된 느낌. 양발에 불꽃을 달고 쿠구구궁 하고 우주를 향해 솟는 아톰 같이. 신고 걷는 느낌은 별로였지만 달릴 때는, 내 종아리 안에까지 스프링이 내장된 것처럼 걸음 걸음이 강하게 튀는 듯했고 속도를 줄일 때도 무릎에 덜 줘도 됐다. 그러니까, 덜 아팠다. 내가 반 년간 내 몸을 쓰는 법을 익힌 것도 있겠지만, 이 장비가 알아서 충격을 줄이고 내 하체 모든 부분 부분의 움직임을 도왔다.
이야, 이래서 장비빨 세우는구나. 이제는 시린 맞바람에 속도가 더디게 나는 날도, 슬쩍 언 길을 조심해 뛰어야 할 일도 없잖아. 이 신발과 함께라면 정말로.. 5km를 30분 안에 뛰는 게 상반기 안에 가능할지도 몰랐다. 한 시간 십 분 대에 10km를 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니, 그냥 기분이 좋았다. 비싼 이어폰을 새로 사서 이 음악 저 음악 들어보게 되는 것처럼 매 내딛음이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이런 걸 신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보통 운동화를 신고 열심히 달렸다. 부슬비가 오는 날도 단단히 언 땅도 낙엽이 바스라지는 길도, 그게 젖어 진창이 된 길도. 무릎도 발목도 정강이도 다 잔뜩 아팠었다. 그렇게 출퇴근길에 저 멀리 보이는 버스를 향해 컨버스와 반스와 닥터마틴을 신고도 안정적으로 잘 뛰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내 발과 무릎 어디에 어떻게 힘을 줘야 삐끗하거나 아리지 않은지 체득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 내보일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나만의 것을 얻었다.
길을 돌아서 주민센터로 가는 횡단보도에 서자 내가 현금을 건네줬던 교회가 나왔다. 러닝밴드에 끼웠던 휴대폰을 빼서 카톡들에 답장을 했다. 워치를 멈추고 앞의 메가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형사 몇 팀으로 사건이 배당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담당 형사는 바뀌지 않았다. 아직 진행 중이다. 아메리카노가 엄청 시원했다.
날이 따뜻해져서인지, 2천만원을 잃어서인지, 아니면 이제야, 나머지 잔고까지 그 다음날 전달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 대책 없이 두려운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 날이 따뜻하고, 밝았고, 아드레날린이 아직 나오고 있었고, 콘서트도 이틀이나 보고 왔고, 이 비싼 신발을 신고 뛸 날이 많았다.
새마을금고에서 현금을 인출했을 때, 그리고 이틀이 지나 계좌를 정리하러 갔을 때 둘 다 같은 직원이 나를 응대했다. 그녀는 나한테 온장고에 있던 초코에몽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같았다. 임시신분증을 발급받은 날 아침, 그리고 지금 다시 나에게 새 민증을 교부한 직원이 같았다. 그 때는 안경을 낀 얼굴이었고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때,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교통사고 후의 내상처럼 후유증은 한 박자 늦게 왔다. 민증이 참 깨끗하고 맨들맨들했다. 앞머리를 내린 대학생 때 찍은 사진이 아니라, 머리를 넘기고 정장을 입은 사원증의 사진과 같은 것이 박혀 있다. 어떤 주소변경 내역도 없다. 그 날의 날짜가 박제되어 있다. 지나온 것이다.
하나로마트에서 딸기와 방울토마토와 고구마와 천혜향 한 봉지를 샀다. 색깔이 정말 파프리카의 그것들 같아서 지금까지는 안 샀던, 플라스틱 통에 든 방울토마토였다. 진한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갈색. 종이 박스에 든 것보다 비쌌다. 더 맛있었다. 스테비아 토마토 같은 단 맛이 아니라 정말 방울토마토답게 맛있었다. 딸기는 꼭지를 따서 물기가 없는 그 상태 그대로 밀폐용기에 넣었다. 고구마를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두고 밥을 먹었다. 오전에 달리기를 하고 이브닝 출근 전에 먹는 밥이랑 국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어떤 메뉴도 필요없다. 안 먹어본 조미료를 잔뜩 넣은 것처럼 너무 맛있다.
퇴근하면 그냥 자느라, 항상 그다음날의 출근 전에야 하던 샤워를 이제는 제때 하려 한다. 발라야 할 것을 잔뜩 바르고 귀마개를 끼고 눕는다. 멍하니 벽을 보고 앉아 있지 않는다. 이런저런 곡들을 듣는다. 어릴 땐 줘도 안 먹던 과일들을 과자 대신 먹기 위해 노력한다. 내일의, 이틀 뒤의 달리기를 위해 스트레칭을 한다. 먹는 것으로 기분을 올리려 하지 않는다. 이전에 지향하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취소했던 공연들을 다시 예매했다. 콜드플레이와 리버틴즈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4월의 공연을 기다리면서.
2천만원을 잃고도 왜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느냐고 한 쪽에서 내가 작게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 사건이 내 삶에 더 이상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기로 했다. 스스로를 그만 쑤시기로 했다.
아닌 날도 오겠지. 그 금액과 그 날의 기억들이 다 떠오르는 날들이. 그러면 다시 이렇게 기대기로 했다. 다른 방식에, 또는 이전의 나를 살게 하던 이 방식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