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었다는 착각
비에 젖은 출근길에서 야자 냄새가 났다. 야간자율학습의 냄새. 집에서 오십 미터도 안 떨어져 있던 학교에서 여섯 시 땡 치면 나와 집으로 들어와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다시 아쉬워하며 들어가던 때의 냄새. 원디렉션과 더스크립트와 그 달의 빌보드 핫백 차트의 노래들을 들으며 오가던 그 짧은 길에서 나던 냄새. 눈 떴다 감으니 봄이 오고 있었다. 온 게 맞나? 오고는 있다. 다시 눈을 떴더니 눈이 왔지만 다 녹았다. 이제는 길이 얼어서 러닝을 못 나갈 일은 없다. 없을 것이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자주 꽉 쥐고 있게 된다. 그럴 수 있다. 아직 시간이 덜 지났으니까. 검지손가락을 엄지에, 나머지 손가락을 손바닥에 깊이 찌른다. 사람은 역시 본인 편한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계획을 세울 거라면 어차피 그 조달책에 불과할 쌍놈의 새끼들을 하루빨리 잡도록 경찰을 재촉하거나 내 정신상태 등등의 회복을 위한 방책을 찾는 게 이롭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죽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정말 그러려던 건 아니고,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잘 관리되지 않은 남은 약들, 적당한 크기의 바늘, 나 말고 해 본 전적이 있는 사람도 공공연히 있는 듯한 방법. 죽음이 생각보다 가깝다는 오만하고 꽤 오싹한 생각을 했다. 주의만 기울인다면 일주일 안에도 못할 것은 없다. 눈을 크게 뜨고 찾으면 어디든 굴러다닐 만한 약물이다. 사람은, 나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좀 더 덜 귀찮은 방법을 더 자세히 찾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벌어진 일을 악착같이 해결하려는 것보다는 도망갈 방식을.
팔자 좋게 초고층의 카페에 앉아서, 내가 헉헉거리며 달리던 커다란 공원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흘려보냈다. 공원이 생각보다 더 컸다. 그런데 막상 뛸 때는, 이 공원으로 오기까지의 길이 항상 더 길었던 것 같은데. 큰 교회와 백화점과 쇼핑몰을 지나치던 그 길이 더 길었다. 여긴 항상 빨리 돌았다. 온갖 아이돌들 노래를 들으며 달렸던 이곳. 아마 올해도 뛰게 되겠지. 사람들이 내 손톱 아래 하얀 부분만큼이나 작고 호수의 오리들은 먼지만하게 보인다. 이런 높은 곳에 오게 될 때마다 느낀다.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저 손톱보다 작은 사람들 속에도 참 머리 아픈 사정들이 잔뜩 있겠지. 내 일이라고 다를 리가.
별 것 아니다. 유난 떨지 말자. 아니, 그러니까, 떨어야 하는 건 떨어야 하는 거고. 혼자 구태여 그 일을 자꾸 파먹듯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없어, 나한테는.
계절이 바뀌었고 고작 커피값으로도 이런 멋진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완전히 안 녹을 것 같았던 호수가 다 녹아서 반짝거린다. 많은 사람들이 뛰거나 걷는다. 딴에는 뛰는 거겠지만 그냥 크게 크게 걷는 것처럼 보인다. 나만, 왜 나에게 같은 생각이 올라오려 할 때마다 두 가지를 기억하려 한다. 죽을 방법과 고층에서 올려다본 이 호수를 도는 사람들. 죽는 건 별다르게 대단한 일도 멀리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제각기 돌고 돌며 무리 지어 산다. 잘 사는지 어쩌는지는 절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평화로이 시간을 보낸다. 지금의 나처럼. 그러니 그걸 무슨 한 방의 해결책 같은 걸로 생각하면서 대충 살지 말자.
결론 냈잖아? 치명적 정신적, 물적 피해를 입은 그 애는 죽었다고. 죽은 거라고. 하하.
4일 정도를 꽉 채워 떠나 있던 병동에서는, 11월에 첫 진단을 받고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던 애가 연명의료중단 상태가 되어 있었다. 상태? 아무튼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진료과도 부모도 받아들였다. 나이트 내내 애는 눈을 희부옇게 뜨고 온몸으로 말을 하는 것처럼 힘겨워했다. 나는 그 애에게 줄 약이 많았고, 말을 건넬 정신이 없었다. 죽어 가는 애를 보는 건 그게 힘들다.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하는데 딱히 위로될 말도 도움 되는 말도 적당히 떠오르지 않아 마음만 쓰인다. 거기에, 나는 상당히 속이 시끄러웠다.
치료받을 의지가 없는 다 큰 성인 여자애, 1개월짜리 애를 놔두고 자꾸 자리를 비우는 보호자. 우는 애 앞에서 내가 노트북만 보고 있자 내 옆으로 성큼성큼 와서 애를 쳐다보고 가던 다른 보호자.
내가 뭘 더 해야 하나, 생각했다. 내가 그들 또는 다른 이들에게 쏟았던 친절한 척하던 에너지가 나에게는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 돈을 떠나 딸에게 벌어진 일에 엄마 아빠는 더 가슴 아파할 그럴 일로. 지나고 보면 그제야 보일 흔적을 내게도 남기고서. 본인 애를 볼 뜻이 없는 보호자에게 내가 뭐 얼마나의 호의를 베풀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다고 돈을 더 받나? 나는 뭐 착한 간호사 같은 게 되고 싶었던 건가? 그게 뭔데? 하등 쓸데없었다. 주어진 일이나 제대로 하면 된다.
보호자가 내 옆으로 왔을 때 나는 어떤 게 필요하세요, 물었다. 아동학대 정황이 보인다고 인계가 내려온 그의 눈이 무서웠다. 애가 빽빽 우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억하심정으로 일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나는 탁아소 직원이 아니었다. 애가 떨어지지 않는지 보고, 주사가 멀쩡한지나 보면 그만이었다. 내 마음이 지옥이었다. 애는 원래 울잖아. 무슨 급한 사정이 있는지 애를 버리고 떠난 부모 대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할 일 이상을 했다. 그 친구 말고도 봐야 할 환자가 열한 명이었다. 날더러 뭐 어떡하라고.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잔뜩 써 왔다는 걸 깊이깊이 느꼈다.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던 보호자들, 항의들, 맞춰 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엄마와 아빠와 또 엄마와 아빠들. 그들에게 건넸던 말들, 애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시도들.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과 이 근무 환경을 이해하려 해 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이해했다. 아,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이런 것들조차 신경 쓸 여유가 없구나, 하고. 그래서 그 부모들이 감사를 모르고 무례하게 가지각색으로 억지를 부려댔구나. 본인들에게 제일 소중한 게 위태해진 상황에 처해 있어서,라고. 몸이 그 생각을 못 따라줬지만. 그리고 스스로를 좀 비웃어 줬다. 위선 떨지 말고 니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인계를 넘기고 퇴근했다. 통상 나이트를 하고 와서 자면 점심때쯤 한 번 깬다. 오전에 사망선언을 했다는 동기들의 카톡이 떠 있었다. 멍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날이 추워질 때쯤 와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간호사들을 기억했다. 날이 풀리자 떠났다. 첫 나이트를 내가 마치고 옷을 다 갈아입었을 때는 잔뜩 어깨를 들썩이며 쉬었다. 담당 교수는 일주일도 안 남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다음 주 내내 근무였다. 내가 그 애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랐다.
장례식장은 타원 어딘가였다. 작년에, 한 친구가 그렇게 갔을 때 나는 순전히 나를 위해서, 식장을 알아내 조문을 갔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하나. 나는 내가 왜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걔한테 말을 몇 마디 더 걸지 못해서? 몇 시간 후 죽을 건데 아무런 정서적 지지도 해주지 않아서? 핑계가 아니라, 나는 바빴다. 한 타임에 그 친구에게만 주사약 대여섯 개를 연속으로 줘야 했다. 나머지 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대체 얼마나 친절하도록 길러진 건가.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 줄걸. 내 이름 한 번 더 불러보라고 할걸. 모른 척 하기도, 안 하기도 힘들다. 사실 나랑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의 일인데, 왜 이다지도 마음이 쓰이도록 만들어진 걸까. 나나 잘하지. 자꾸만, 애가 죽으면 조문객도 없다고 하던 엄마아빠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누가 제일 먼저였더라, 이제는 순서도 떠오르지 않는 그들 중 한 명의 장례식에 갈지 말지 고민하던 내게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다.
왜 나는 주제에, 남의 불행을 그렇게나 보아 넘기지 못할까. 간다면, 내가 대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가야 하는 걸까. 어차피 살면서, 모든 걸 다 소화시키고 맞닥뜨려 풀어놓고 이해할 수는 없는데. 슬프다. 나는 내 인생도 제대로 못 챙기는데 이런 일에 신경이 쓰이는 게.
죽음은 내가 좌지우지할 일이 아직은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다. 오만하게 죽느니 사는 했던 내가, 사는 건 어렵고 죽는 건 쉽다는 윌슨 박사의 말을 다시 상기한다. 망가진 처키 인형처럼 누워서 괴로워하던 그 애의 모습이 생각난다.
죽음은 언제나 추하다고, 거기에 존엄성 같은 건 없다는 하우스의 그 대사가 떠오른다. 걔는 죽었는데. 돌아오지 않을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던 그 애는 갔는데, 이런 일에 새로운 다른 애는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울적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일이잖아. 이건 좀 그래도 되는 일들의 연속이잖아.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