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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료가 싫은 이유

호로새의 생존

by 이븐도 Feb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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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정확히 말하면 박쥐와 무슨.. 뭐더라. 기니피그 같은 작고 귀여운 쥐와 눈이 빨갛고 파란 줄무늬 같은 깃털을 가진 호로새와 마못 등이 등장한다. 제목은 '프렌즈 퍼스트'였다. 친구가 먼저다, 로 번역다.









일이 힘든 게 나은지 사람이 힘든 게 나은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면 대답이 갈렸다. 예전의 나는 고민을 좀 했다. 물론 둘 다 빡세다는 선택지는 정말로 아예 제쳐 둬야 한다.

보통은 둘 중의 하나를 깔끔하게 선택하기 힘든 환경도 많다는 게 이 질문의 꽤나 열받는 포인트지만, 일단 접어 두고. 나는 이제 고민 없이 전자를 고른다.


 좀 적응이 되어서 그런? 그래서일 수도. 맞다. 일은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게 안 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외모, 표정, 말투, 또 표정, 말투, 사용하는 단어, 뉘앙스 파악은 항상 새롭다. 다채롭게.. 뭣 같다. 하하.








그의 목소리만 들려도 기분이 확 변하는 걸 느꼈을 때부터 나는 노력했다. 노력해야 함을 알았다. 이야기하고 웃고 또 이야기해야 할 때 어떤 티가 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런 시도들이 잘 먹혔는지 안 먹혔는지는 알 수 없다.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를 싫어하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힘썼다는 것이다



이건 그 사람이 왜 싫은지 성토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나는 그 사람과 친해질 정황이 많았다. 그런데 전혀 친하지 않다. 친하기는커녕, 퇴근길 버스에서 난데없이 아프리카 대륙의 생물들에 발찌를 채워 놓은 채 사람들이 실컷 따라다니며 나름의 분석을 열심 해 놓은 그런 영상을 튼 데는 그 사람이 꽤 큰 영향을 끼쳤다. 딱히 별 일이 있던 건 아니고.. 그냥 뭐든 좀 봐야겠는데 아무것도 안 보고 싶었고, 정말 아무것도 안 보기엔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들 것 같아서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싫다.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그가 싫다. 생김새도, 말투도, 행동거지도, 목소리도, 말할 때의 입모양도, 눈빛도 다 싫다. 어떤 게 어떻게 싫은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싫다. 돌아보면 꽤 긴 시간 그를 보았지만.. 싫다. 싫은 건 싫은 거다. 나는 그가 싫다.










그가 왜 싫은지에 대한 이유를 그의 등장부터 불쾌했던 그때에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 나니까. 원인은 내게 있다. 둘 사이의 기억하지 못하는 일일 수 있고, 단지 이목구비가 취향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성으로 누를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할 수 있잖아? 나는 내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같은 논리로, 그가 똑같이 나의 외양 등을 싫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에너지가 상당히 든다. 반대로 말해, 누군가를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것은 그것이 한 때 짙은 관심이자 애정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정도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면 역으로, 그렇게 싫어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의문이었다. 왜 싫어하는 걸까, 우리는 항상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친하지 않았고 인상 깊은 사건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일터에서 마주치는 사이일 뿐인데 왜 자잘한 일들을 '바빠서 그랬겠지, 걔 성격이 그런 거지' 하며 넘기지 못하고 이렇게 기분 나쁜 기억들로 남겨두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궁금했다. 역시, 내가 좀 못된 탓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호로새는 그 초원에서 살아남기에 유리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나레이션이 알려 준다. 굳이 안 알려 줘도 다 보이한다. 유전자 변형이 좀 잘못된 칠면조같이 생겼으니까. 통통한 몸통은 커다랗고, 깃털은 화려해 아주 눈에 잘 띈다. 까맣고 작은 목과 머리 (머리가 내 손바닥만 할 것 같다)에 새빨간 눈.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 없다. 약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힘이 굉장히 쎈 기린 같은 '힘숨찐'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냥 새 같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다리는 가느다랗다. 그 뚱뚱한 몸통을 지탱하면서 도무지 빨리 뛰지 못할 것처럼 생겼다.



그들이 가장 취약할 때는 먹이를 먹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라고 한다. 거대한 몸통 아래쪽으로 내가 한 번 비틀면 뿌드득 하고 망가질 것 같은 가는 목을 숙여 작은 부리로 끼니를 챙기려 할 때, 맹수들이 습격을 해 온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또 다른 식사가 된다는 뜻이다. 안타까운 일 아닌가. 아니, 안타깝기보다는 그리 멋지지는 않잖아. 거기 무슨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땅바닥에 있을 뭔가를 먹어야 생명유지를 할 수 있는데 그러는 순간에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기가 가장 쉽다니. 흠.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질문은 '동물들 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할까요?'였다. 사하라 사막과 아프리카 케냐와 어디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야생의 연구소 등등을 거치며 동물들의 습성을 연구한다. -이제 보니 다 작은 동물들이네? 작지 않더라도 여하튼 약자에 속하는 개체들만 나왔다는 느낌이 든다- 결론은, 존재한다는 쪽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사실 보면서 우정이라기보다는 생존하기 위해 협력하도록 그들이 진화한 걸 그렇게 표현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 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그들은 무리를 짓고, 그 안에서도 더 친밀한 개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사실 맞지. 그렇게 혼자 살아서는 그들은 정말로 당장 내일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우정. 실제 동물들이 디즈니나 픽사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어딘가를 구경 가거나 하지는 않잖아. 물론 뭐 가끔은 사자와 호랑이 간의 우정, 같은 식으로 사진이나 영상이 화제가 되긴 하지만 그건 그런 게 특수한 경우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람이랑 다르지. 생존해야 하는 게 먼저잖아. 그런데, 정말 사람이랑 다른가?

크게 다를 게 있나? 단지 사람의 생김새 다 똑같아서 내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공원에 달리기를 하러 갔을 때 원앙들을 본 적이 있다. 원앙. 사진으로만 봤던 귀엽게 생긴 새들. 그 호수에는 대체로 시꺼멓고 뚱뚱한 새들만 산다. 기억하기로는 그렇다. 가마우지들이다. 표지판에 쓰여 있었다. 민물가마우지. 한밤중에 봐도 다 까만 덩어리들뿐이다. 자기들끼리 덜 얼고 덜 녹은 뭍에 잔뜩 모여 있다. 신기한 (안 신기할지도) 사실은 그들끼리만 다닌다는 것이다.



가마우지 세 마리, 저쪽에 원앙 여섯 마리. 이쪽에 가마우지 네 마리, 원앙 두 마리. 원앙 세 마리, 가마우지 한 마리. 좀 같이 놀아주지, 생각했는데 그들은 그들대로 물살을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분명 지켜보니 그 한 마리 가마우지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거였는데 그들은 섞이지 않았다. 각자 자기들끼리 만든 무리를 유지하며 둥둥 떠내려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종이 같지만 다른 무리에 속했다는 걸 내가 자꾸 잊는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데, 그게 나와 상대방을 위한 것 같기도 하다.

싫다고 도장을 찍어 놓는 것은 불쾌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함이다. 일을 하러 온 곳에서 동료가 아니라 친구나 연인에게서나 기대할 것을 찾는 나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모여들고, 각별한 사이의 이들은 친구가 먹이를 먹을 때 맹수로들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일터에서 만난 이들은 나를 보호해 줄 필요가 없다.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외양을 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기에 착각이 길었다.





주토피아, 라이온 킹 다  종이 잔뜩 다른 동물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결국 친구가 되고 잘 섞여 살고 그러던데.. 보면 뭐 하나. 하긴, 만화에서야 소녀와 원숭이도 친구가 되고 지도는 말을 하고 눈사람도 말을 하고 사람은 순록과도 친구가 되잖아. 그럴 수 없으니까 만들어내는 거다.

물론 선을 넘나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혼한다. 내가 건넨 친절을 보답받았을 때, 생각지 않은 호의를 받았을 때, 내게 도움을 요청할 때. 그건 그때뿐이다. 일터니까. 나는 먹이를 찾으러 왔고 그들 역시 그렇다. 보호는 나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이 아주 쪼끔 안된 사실 같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항상 모두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잖아. 상대방이 슬프면 나도 덩달아 울적하고, 잘 되면 나도 답답하다. 그래서 집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막역한 이의 불행 비슷한 것을 내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나는 법관이 아니고 그 또는 그녀의 부모님도 아니다. 그냥 한 사람으로 그 일화를 듣고 할 법한 생각을 해야 하는지 친구로서 그 입장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데..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이 초원에서 우리는 서로가 약할 때 도와주라고 이렇게 가까워진 것일 수도 있잖아. 그게 아니라면 이 관계는 딱히 쓸모가 없는 거니까. 시간을 들이고,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것에는 그런 효용성이 필요하다. 내게는 그렇다.

좋든 싫든, 어떤 순간의 호불호를 떠나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직장 상사도 내게 월급을 주는 사람도 아닌 존재와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쓸모는 그런 것이다. 목덜미를 내놓고 있을 때 가려주는 것. 바깥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방어를 해 주는 것.



뭐.. 그렇다. 나는 다시 먹이를 사냥할 초원으로 간다. 아니면 내가 사냥당하는 존재일 수도. 원래 다 상대적인 거잖아.

오늘의 나이트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괜찮다. 달리기하고 출근하는 날은 오히려 잘 버틸 수 있다.








+

새 사진이 있어요.






얘들이다. 딱 봐도 잘 못 뛰게 생겼다.얘들이다. 딱 봐도 잘 못 뛰게 생겼다.




항상 한 번씩 하는 생각인데, 저런 동물이나 자연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한 번씩 상영해 줬으면 좋겠다. 대충 보다가 자도 되고, 내가 아프리카나 브라질이나 극지방까지는 갈 수는 없잖아. 그렇게 큰 화면으로 아예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참 좋을 텐데. 좀 아쉽다.


모 인강 강사가 집에 정말 영화관이나 다름없는 홈시어터를 만들어 놓았던데 이 생각을 하니 부럽다. 영화관은 영화관으로서의 묘미도 확실히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걸 항상 그렇게 집중하며 볼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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