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평생의 난제
책상에 향수와 유리컵과 뚜껑이 열린 렌즈통이 그대로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죄다 쓸어 버리고 싶은 걸 참았다. 안 했으니까 된 거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티셔츠와 드라이어가 분리된 상태로 놓여 있다. 옷걸이, 계약서가 들어 있던 종이봉투, 내가 막 퇴근해 던져 놓은 가방이 나뒹군다. 나뒹군다는 표현이 딱이다. 오늘 알았다. 나는 이 방을 이렇게 어질러 놓은 채 외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 늦어서 택시를 타는 한이 있어도 집은 늘 정리했다. 방이 가장 깨끗할 때는 내가 바깥으로 나가기 전이었다.
3일 쉬고 싶다. 아니. 4일? 벨소리도 알림음도 지겹다. 지겨운 게 아니고 너무 싫다. 내가 매일매일 달리고 다른 대상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스트레스를 잊어야만 이 일상을 제정신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사실, 나한테는 이게 꽤 버겁다는 뜻이잖아.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 모든 관심을 요하는 것들이 싫고 귀찮고 지겹다.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다가 알았다. 내가 잔뜩 몰린 상태였다는 걸. 정말 모든 것이 나를 돌아버리게 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울분? 짜증? 피로? 뭐라고 정의 내려야 편할까.
밤낮이 바뀌어 반나절은 깎여나간 그런 쉬는 날들 말고, 온전히 아침부터 밤까지 쉬고 싶다. 아무것도 안 보고 안 듣고 안 하고 싶다.
고운 말로 포장해야 하는 모든 진심이 버겁고 힘들다. 그런 에너지가 지금 없다. 어떤 이해심도 가질 수 없다. 반대편 벽에 곱게 붙여 놓은 포스터를 찢어 떼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스스로가 지금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조차 지나가겠지. 나한테 아프다고 하지 마, 힘들다고 하지 마. 내 앞에 들이밀지 마. 눈에 띄지 마. 정말 병원에 누워 있거나 사선을 건넌 게 아니라면 징징거리지 마. 어떤 부정적인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거든.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정신력으로 그런 것을 가여워해 주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을 알았다. 알았다? 그냥 늘 알고 있었다. 아닌 적 없었다.
쉬고 싶다. 이런 못된 나에 대한 것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많은 것들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나는 단지 그런 사람인 거다. 그냥 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필요한 사람. 이 방 한 칸의 귀여운 무질서가 낯설어 보일 정도로 정리정돈을 해대고, 어떤 것도 진심이 아니면 그래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 쓴 모든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가 아깝고 아쉽다.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위선을 떨어 왔을까.
어차피 가까운 이들에게 이 정도 치명상을 입히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일을 스스로 만드는데. 그들 앞에서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죄다 날카롭고 추한 생각들뿐이다.
혼자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심하다. 이어,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일 같은 건 무시한 채 일차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이런 나에 대한 생각도 좀 그만하고 싶은데 안 된다. 쓸데없이 피곤할 만큼 돌아가는 머리가 그래도 최소한의 사회성은 늘 탑재하고 있어 조금은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래도 비어져 나오는 허점들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거고.
안간힘을 쓴 채 에둘러 말하고 포장해 건네는 게, 그게 안 되는 대상들이 있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의 것을 주고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할 수 있을 때 많이 준 후, 한계에 다다르면 후회 없이 떠나 종결시킬 수 있는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나는 그들과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엮여 있을 것이다. 마음 쓰이는 만큼 해줄 수 없음이 안타까운 동시에 맞댄 채 이야기를 할수록 틀렸다는 생각이 들며 언성이 높아진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미련도 없이 내뱉고 그런 스스로를 동시에 강하게 혐오한다.
괴롭다. 그냥 안 만났다면 어땠을까. 어떤 추억도 상처도 없는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허구 같은 생각을 일을 시작하며 했다. 왜 내가 소리 지르거나 울 때 가만히 내버려 두거나 문을 닫고 돌아섰는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레퍼토리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스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만 신기하리만치 악을 쓰는 재미없는 드라마 같았다. 그들은 내가 왜 우는지를 묻고 나는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들을 여과 없이 소리친다.
스스로도 지겨워서 그만하고 싶은 말들. 병원, 카페, 식당, 버스, 지하철.. 나열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응축된 채 덮여 있던 감정들이 거기서 다 터진다는 걸 알았다. 어떤 환경에서도 이유를 치환해 참을 수 있었던 울분과 억하심정이 그들 앞에 서면 가라앉을 끄나풀을 찾지 못해 그대로 도화선이 된다.
원인? 발원지? 찾으면 늘 그들이거나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청소하듯 치울 수 없고 환불하는 것처럼 바꿀 수 없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그렇다. 단어들로 집을 지어 온갖 인류애는 닥닥 긁어모은 것 같은 글을 아닌 척 잘도 쓰면서, 왜 이들에게는 도저히 그게 안 되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단지 귀찮아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지겹고 같잖고 한심한 내 인격을 바깥에서 포장하는 데 여력을 다 써서, 이들에게는 그게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나를 내버려 두다 이제야 묻냐는 말에, 그럼 내버려 두지 뭘 해야 하냐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것들을 알아버린 탓이다. 학교에서 배운 애착 유형, 양육 태도, 혼자 찾아본 성격 검사와 유튜브의 상담 영상들. 시간이 많아 그런 것이나 생각하고 있던 내 잘못이다.
이곳에는 그런 답은 없다. 밖에서 뭐라고 그것을 표현하고 정의 내려준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이 공간, 내가 관계를 맺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그건 언제나 혼자 너무 부풀려 생각한 거고 소설을 쓴 건데.
많이 슬프다. 동정과 공감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내가 그나마 논리로 그 기전을 설명한 사연을 담은 글들을 주기적으로 박제하는 입장이 됐다.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고. 지나치기 쉬운 장면에서 그것들을 발견해 사랑이라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처럼, 엄마와 아빠 역시 나를 사랑한 게 맞다고 납득했다. 나는 늘 그들을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슬픈 점이다. 나는 늘 그들을 생각했으나 정작 입 밖에 낸 것은 울지 말라는 말과 나는 당신이 제일 싫다는 말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으나, 나한테 학생 때 했던 말들을 기억하냐는 질문에 기억 못 한다는 말을 듣자 그럼 결국 똑같은 거니 슬퍼할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엄마의 눈물이 가슴 아픈 동시에 후련했다. 어차피 잊히지 않는 것들이잖아. 같잖은 것들, 그때는 그냥 화나서 그랬다는 말이 따라붙는 말들, 별 것 아닌 것들. 그게 별 것 아니었고 기억도 못하는 말들인 만큼, 나 역시 화나서 그랬다고. 때린 사람은 어디 가고 맞은 이만 기억하는 이 만고불변의 진리.
그래도 그들에게는 페널티가 있다.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인간이니,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큰 것이고 당신들이 나를 온전히 이렇게 개차반으로 키운 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아, 엄마아빠도 그때 어떤 상황이 어때서 나한테 그랬겠구나, 하는 말로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비긴 건가. 상처의 값이? 그들은 부모라서 나는 영원히 못을 박은 자식이 되는 건가? 나의 잘못이 언제나 더 큰가? 글쎄. 꼴에 소아과를 다니며 부모의 사랑을 다양히도 목격했다. 남녀 간의 사랑과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사랑을 말하는 단어가 똑같이 사랑인 것이 아니꼬울 정도로 후자는 크고 진했다.
0 아니면 1이라고 서술한 적이 있다. 그렇지. 그들은 그런 식으로 나를 사랑한다. 나도 사랑한다. 그게 어떤 건지 일하며 곁눈질해 익혔고 정체를 더듬었기에 안다. 방을 뒤덮은 취향의 시작점이 된 추억과 시간들이 다 어디서 왔을지를 꼽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그들과 나는 이어져 있다. 사랑하는 우리는 사실 동등하다. 나 역시 그들을 잔뜩 생각한다.
그런데 방법이 틀린 것 같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에게는 틀린 방법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틀린 방법을 건네고 한 번씩 고장 난 시계처럼 우연히 들어맞을 때 웃고 추억을 남긴다. 그들과 웃을 때는 예쁜 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언제 깨질지 슬슬 두려워지며 나는 마침 지하철역이나 기차역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이쯤에서, 여기까지만 하고 싶어서. 나는 그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언제나. 그들에게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며 '우리가 뭘 그렇게 못해줬나'는 그 똑같은 질문을 띄워 놓고 이야기하게 되는 논쟁거리.
그러게. 폭력적이거나 가난한 환경 같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리 스스로를, 우리를 가엾게 여기는 일들을 만들고 있는 걸까. 내가 그리 사고뭉치에 시간이 넘치는 사람은 아닌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나이가 든다. 더 안타까운 건 이 관계를 리셋시킬 수 없다는 거지만. 슬픈 일이다. 하필 이런 자식을 만나다니.
나는 더 이상 뭔가를 개선하거나 노력하려고 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노력은 영원히 다른 방향을 향할 테니까. 나는 이들 앞에서 언제나 별종이고 확대해석하는 인간일 것이며 나는 이제 그 관점에 지쳤다. 실제로 존재할 나의 그런 모습조차도 너무 익숙해져서 지겹다. 수술해서 도려낼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다. 밥벌이나 간신히 하고 살기에 다행이지만. 이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구나.
어떤 조언도 쓸모는 없다. 어차피 이 안에서의 문법과는 미묘하게 다를 테니까. 우리는, 이 집안의 나와 그 바깥의 나는 영원히 다른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이걸 집을 나와 산 지 거의 8년이나 되어서야 생각한다. 같을 수 없음을.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릴지언정 차라리 늘 진심이려 했는데,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들과 나는 다른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문자를 쓰는 탓에 착각이 꽤나 길었다.
나는 많이 지쳤다. 지친 걸 지쳤다고 말하지 뭐라고 표현하겠는가. 잠도 오랜 시간 안 잤고 밤낮이 바뀌는 건 예사이며 그 와중에도 나는 제정신과 나름의 즐거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루쯤 이런 게 다 밀려오는 날도 있는 것이다. 내게 병원이 힘들었냐고 묻는다. 글쎄. 이제 그런 건 알아서 잘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눈물이 났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직업은 익숙해져 갈 뿐 여전히 힘에 부친다. 부치는 건 사실이다. 누군가 내게 힘들게 일한다고 하면 나는 어휴, 고생하셨어요, 하고 여유 있게 대답을 건넬 수 있다. 나는 그 어떤 이들보다 더 힘들게 일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힘든 축에는 드니까.
시끄럽고 억척스럽고 또 시끄럽고 정나미 떨어지며 시끄러운 환경. 내게 이 일이 힘겹다. 보잘것없는 내게는 일에 드는 감정소모가 심하다. 알량한 나는 어쩔 수 없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하는 와중에도 끝난 후에도 노력해야 한다. 그들을 성숙하게 떠나 삶을 꾸릴 기회는 당장의 이 생업과 맞붙어 있으니까. 더 멀리, 멀리 가버리고 싶다. 조금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선택한 일을 잔뜩 하고 와서 나는, 또다시 독립을 궁금해한다.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독립해야 독립일까.
그리고 하나도 불쌍한 구석이 없는 나에 대해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을 그렇게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동안은 알아서 꽤 잘 살았잖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다양하게 표현했고 웃었고 차려입었고 또 웃었고 질문했고 본심이 아닌 것을 잔뜩 잘도 말했다. 이 작은 생을 영위하기 위해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던 게 나에게는 사실이다.
다시 다 원점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어떡하겠어. 내일 죽을 것도 아니고.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주고받을 필요 없는 관계가 있을까. 모든 관계가 피곤하다. 그리고 구태여 이런 내가 싫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나는 또 할 일이 많다. 이건 작은 감기 같은 거다. 잊고 지내면, 기침과 인후통과 피로에 익숙해진 것 같을 때쯤 또 사라져 있는, 그런 지나가는 날이다. 내일 휴대폰을 던진 채 어딘가로 숨을 것도 죽어버릴 것도 사직을 할 것도 아니니까. 다 지나가니까. 그들이 영원히, 서서히 늙고 병들고 그 상처는 흔적으로 가진 채 나와 공존하는 것처럼.
그러니 질문은 그만하기로 한다. 나는 많이 피곤하다. 자고, 이제는 정말 방을 치우고, 할 일을 하고 나면 또 밤이 올 거고 오늘은 뛸 수 있을지 기온을 체크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스스로 내가 끝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알잖아. 굳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불행은 갖가지로 찾아온다는 걸. 끝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사건들은 들이닥치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알잖아.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 만들어 둔 제목과 배경.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 몰랐다. 언젠가는, 이걸 보며 그땐 그랬지,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라고 스스로를 같잖아하고 있겠지. 그런 날을 위해 남긴다. 원래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랬다.
비극. 잠을 못 자고 못 쉬어서 비극이다. 그런 피곤하고 모자란 인간인 게 비극이다. 잠이나 자면 될 걸 이런 걸 쓰고 있어 희극이다. 다 지나갈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