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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앞가림

I'll put your poison in my veins.

by 이븐도 Jan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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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보다 다른 잔상이 더 진하게 남았다. 아쉽다. 많이.공연보다 다른 잔상이 더 진하게 남았다. 아쉽다. 많이.








일부러 일찍 간 학교의 텅 빈 교실. 모든 창문을 다 열어놓고 이어폰을 꽂 앉았다. I lived. 가사가 단순한 그 곡을 들으며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떠올렸다. 지겨운 교복, 지겨운 선생님, 지겨운 애들.. 아직 사춘기가 덜 끝난 모양인 나에게 고등학교는 그냥 거대한 염증 덩어리였다. 그 속의 나도, 그곳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 싫고 싫었다.


한참 문송합니다, 헬조선 같은 말이 오만 데서 들리는 때였고, 나는 그 '지방, 여자, 문과'를 다 갖춘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싫을 만도 하다. 희망적인 게 아무것도 없다고 떠들면서, 열몇 살 짜리 학생한테 그 모든 요건들을 공부로만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종용하는 꼴인데.












원리퍼블릭 내한 공연에 갔다. 그렇게 음이 좋은 공연장은 처음이었다. 온갖 현악기를 다 갖다 쓴 것 같은데 소리가 하나도 찢어지지 않았다.

작년 9월인가 티켓을 예매했었다. 동생도 노래를 꽤 들었다. 누나가 이제 이렇게 컸다, 하는 마음으로 좌석을 한 자리 따로 예매했다. 공연 당일, 공연 전날, 전전날, 그보다 전날 모두 다 너무 바빴다. 힘들었다. 동생 것을 같이 예매해 내가 다 가지고 있던 티켓만 아니었으면 그냥 안 갔을지도 모른다. 콘서트 당일 눈을 떠서 한참을 생각했다. 어떻게 안 갈 수 있을까. 내가 안 가도 동생은 가야 하니까 어쨌든 그 티켓을 주기라도 해야 했다. 어떡하나, 가야지.






사실 아는 노래도 없지 않나. 팝 불모지나 다름없는 여기서 (체감상 그렇다. 아니라고? 그럼 어쩔 수 없고) 탑건 OST가 빵 뜬 최근에는 노래를 들은 적이 없는데..라고 생각했으나 모든 리스트의 전주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음. 아,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 내 문화 사대주의의 시작이었다. 몇 년 전 막을 내린 내 나름의 사대주의. 딱 10년이었다. 10년 전.










집에서 이어폰 양쪽을 다 꽂는다는 건 곧 반항이나 다름없었다. 아침 여섯 시였다. 나는 일부러 조용히 일어나 음악을 들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방문을 열고 들어와 이어폰 줄을 잡아 뜯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일찍 갔다. 엄마는 나를 정말 물심양면으로 지지해 준 사람이 틀림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도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싫었다. 그래서 등교를 아주 일찍 했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건 급우들이 오기 전의 교실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도망치자고 생각했다. 영국, 미국, 호주 등 아무튼 동양인인 나를 인간 취급도 안 할 그 나라들의 노래들만 들었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고 문자로만 닿아 한 번은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가사들이 나를 스쳤다. 언젠가는 아프리카의 평원이나 미국의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달리면서 그 노래들을 다시 듣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호주의 이름도 모르는 해변들이나 극지방의 시리게 드넓은 파란 바다 앞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풍경만을 쳐다보고 싶었다. 우중충한 교복에 그보다 더 우중충한 표정을 하고 세상 심각한 척을 하면서 사실은 그런 망상들을 했다.












엄마아빠는 아닌 척했지만 상당히 남의 이목을 신경 썼으며 안정적인 삶을 추구했다. 동생과 나 역시 그럴 것이다.

하루종일 들어온 말들을 남들은 듣지 않고 컸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쩌다 놀러 간 친구 집의 분위기가 우리 집의 그것보다 너무나 부드러워 그 집의 모든 요소가 넘실대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때, 틀어놓은 온갖 TV 채널에서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그 단어가 널리 쓰이는 이 사회적 배경에 대해 진지하게 또는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빠의 직장 동료인 옆 동 누군가가 어느 대회를 나갔느니 안 나갔느니 걔는 상을 어떻게 받았고 공부를 어떻게 하느니 하는 말을 하는 엄마를 마주칠 때마다 듣고 맞받아쳐 대거리를 할 때, 몹시 지겨워졌다.



이렇게 큰 머리를 가지고 저 프로그램들에서 말하는 '문송한' 인간이 되어 이 집에서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도서관에서 이어폰이나 끼고 숨어 있는 일상을 사는 모습을 상상했다. 안 될 것 같았다. 정말로 안 될 것 같았다. 스무 살을 넘긴다고 인생이 저절로 바뀔 리가 없었다. 대입만큼 취직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숨을 죽여 사는 신세이기 싫었다. 취을 못 한 나. 글쎄, 쓸모없는 존재 취급을 받거나, 아니면 이 집의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며 살 것 같았다. 럴 수는 없었다.












콘서트장에서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스탠딩 자리에 서서 도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공항이 있는 이 도시는 참 넓고 하늘이 예뻤고 내가 사는 곳에서 지지리도 멀었다.


그런데 집에 가고 싶었다. 나한테서 티켓을 받아가야 할 동생은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그 주변에 깔렸을 스태프들에게 여기가 몇 층 어디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묻는 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말을 흐렸으며 엉뚱한 대답이나 질문만 했다. 나는 내가 '성격이 더럽고 기가 드센' 데다 직업이 간호사, 인 사람으로 (기가 드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원래 성격이 못됐다. 엄마가 수없이 나한테 가르쳐 줘서 안다) 어디서든 보일 게 싫어서 항상 조심하려 했는데.. 좋게 말해서 화가 났고 솔직히 말하면 뚜껑이 열려 미친 듯이 열이 받았다.

우리는 각자 공연을 본 채 각자 헤어졌다. 좋았는지 어땠는지 모르겠고 나는 그냥 표값만 내 준 사람이 됐다.


좋은 누나척 좀 해 보려 했던 모든 시도가 다 수포로 돌아갔다. 스무 살을 훌쩍 넘어 놓고 모든 걸 다 내가 떠먹여 줘야 했고 성질이 뻗치는 나만 또 나쁜 사람이었다. 동생과 나는 모든 요소가 다 다른 사람이었고 이 집에서 나는 늘 성격이 더 나쁘고 못된 쪽이었다.







나는 그런 집이 싫어서 그 짧은 평생이나마 생각해 본 적 없던 직업을 택했다. 그러나 동생은 아니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크게 충격받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름의 상처가 있겠으나 나처럼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인 사람아니었다. 나는 싫은 게 많은 사람이었다. 켕기는 것도 빚지는 것도 싫었다. 동생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동생이 내가 사는 곳 근처로 올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여기저기서 거론되는 장소를 데려갔고, 남들 찍는 사진들을 찍어 주려 했고, 맛있는 걸 먹고, 옷과 신발을 사주고, 재밌게 봤다던 소설의 연극을 보여 주고.. 아무튼 나름의 도움을 주려 했다. 그런데 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십 년간, 그것만은 안 변했다는 사실이 나를 상당히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물론 티켓을 다시 전달하느라 공연장을 나갔다가 들어와야 해서 한참 뒤쪽으로 밀려났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콘서트고 나발이고 인생 전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려고 했다. 왜 항상 나만 나쁜 쪽인가.










2015년, 영국 간호사가 되자고 생각했다. 24년에는 거기서 적응하고 있자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좋은 노래들이 많고, 어릴 때 좋아했던 그림책이나 책들의 출신지이고, 귀여운 것들이 많고.. 뭐 그런 것들을 이유로.

당시 영국이 브렉시트를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던 때라 미래는 희망적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어떤 병원에 들어가 대충 어느 정도의 금액을 모으고 영국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입시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아무튼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 정도 외지가 아니라면, 집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런던의 성 토마스 병원에 취직해 빅 벤을 보며 밤의 산소포화도 모니터가 작게 삐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근무하는 상상을 했다 (이래서 상상이 무섭다). 영국은 가 보지도 못했고 그 꿈은 빛이 좀 많이 바랬다. 반만 현실이 됐다. 나는 새벽에 경기도 어드메의 병원 별관을 쳐다보며 모니터 숫자를 노려보고 다 들어간 주사제를 뗀다. 

(쓰다가 생각이 났는데, 정말 더 우스운 점은 그때 나는 소아과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체 왜? 심지어 여기서 나는 소아병동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대학 생활과 병원 신규 생활을 거치면서 나는 다시는 남과 공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느꼈다. 다시는, 이라고 하기에는 그 세월이 꽤 길긴 하다. 겨우 작년 봄에야 혼자 지내기 시작했으니까. 사람들은 선을 지킬 줄 몰랐고 지저분했고 시끄러웠고 나 역시 그랬다.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고 사는 건 꽤 품이 많이 들었다.

영국으로 간다면, 나는 언어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며 하루종일 일을 한 후 어떤 인종의 어떤 사람과 함께 사용하는 방이나 집으로 돌아와야 할 확률이 높았다. 급여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고 집세는 배를 뻥튀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영국으로 가는 선택지는 더 이상 내게 그리 빛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가장 이민이 쉬운 직종이라는 간호사는.. 막상 부딪혀 보니 투약이나 처치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안 하려는 이유가 있긴 있는 것 같았다. 더럽다고 여겨지는 온갖 것들이 널린 환경에서 각종 감정에 날뛰는 사람들상대해야 했다. 문자 그대로의 영어를 구사할 내게 그런 뉘앙스와 분위기를 잡아채고 응대할 능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여기서도 힘든데? 그렇게 10년 전의 목표는 선후관계가 뒤집힌 껍데기만 단단히 남았다.












그렇게 그 꿈은 죽었다. 나는 안 죽었지만. 슬프지만 괜찮다. 그래도 그때 바라던 삶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으니까. 그 정도면 그 꿈의 부차적 기능은 다 한 거라고 생각한다.

공연이 끝난 후 깜깜한 셔틀버스를 타고, 정말 딱 십 년 전 정말 많이 들었던 그 곡들을 다시 들었다. 글쎄, 이런 감정을 느끼려고 온 콘서트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나를 지나간 세월이 실감되는 기분이었다.

런던의 간호사는 못 됐고 그냥 간호사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싫어하며 없는 능력치로 토낄 궁리만 하던 때에 듣던 밴드는 아직 건재해 나는 내가 번 돈으로 공연을 보러 왔으며, 십만 원에 버스비까지 십오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그냥 버릴까도 생각하는 답지 못하게 사치스럽고 어이없는 고민을 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런 같잖은 허세가 생긴 대신 체력이 빠졌고 기진맥진한 생활을 한다. 집이 싫어 나왔지만 나는 결국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며 집을 싫어했을 때도 많은 도움을 받는 중이었다.



항상, 도망쳐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고 혼자 피해 주지 않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십 년이 지나도 그 난제는 풀리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가 독립의 영역인지를 진지하게도 생각했다. 나처럼, 알아서 살지 못하는 동생이 한심했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어서 슬펐다. 알아서? 나는 대체 얼마나 알아서 살고 있는 걸까.












1, 2년 전 동생은 중도에 그곳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아빠 생각을 했다고 했다. 아빠가 본인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걱정했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고 별로 놀랍지 않았다. 너무도 아빠가 했을 법한 생각이며 동생이 했을 생각이라 식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 그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품으려고 했지만 안 되는 게 다 티가 났다. 당장 본인 살아온 궤적이 그랬다. 말 안 해도 다 알았다.

아빠는 지금도, 나이를 감안해도 가장 이 집에서 '스펙'이 높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 오랜 시간을 일했고 나는 그런 아빠의 성향을 닮았다. 성향이야말로 역체감이 심한 것이라, 나는 아빠와 이야기할 때는 전혀 못 느꼈던 것을 엄마나 동생과 이야기할 때는 크게 느낄 때가 많았다. 그 이질감. 그리고 거리. 이해할 수 없으나 끌어안아야 하는 것. 안을 수밖에 없는 것.











사실은, I lived 가사를 동생이 알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알아서 잘 찾아먹는 사람이었지만 동생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각자 행복의 양상은 달랐겠지만. 그냥 그게 이 밴드의 내한 소식을 접했을 때의 내 마음이었다. 그랬다. 십 년이 지났지만 못 이룬 꿈? 꿈이야 뭐 기한이 지나 버려지게 됐으면 또 만들면 된다. 못 이뤄도 어떤가. 그 지향점으로 삶은 닮아가기라도 하는 걸. 하지만 상처는 남잖아.










10년간, 도망이 목적이었던 꿈을 위한 수단과 함께 살면서, 나는 나랑 어떻게 사는지를 꽤 많이 익힌 것 같다. 착오가 너무 많았고 지금도 쉽지는 않다. 그런데 천륜은 어떡해. 어떻게 그때도 지금도 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못된 나는 변하지 않은 걸까. 이런 거 싫은데. 나는 내 숙제를 늘 어떻게든 끝내려고 했다. 감정적인 것이든, 성과에 관한 것이든. 그런데 어떻게 그 세월을 지나고도 조금도 진전이 없는 구역이 있는 건지. 싫다. 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알아서 잘 살 수는 없는 걸까. 또, 알아서 잘 사는 게 뭔데? 아무런 도움도 안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내가 싫다. 공연이 끝난 지 일주일이 넘어간다.

눈이 잔뜩 내려서 며칠간 바깥에서 달리기는 못 한다. 헬스장 러닝머신이나 뛰어야 한다. 죄다 답답한 것들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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