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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역 직장인의 개

386만 원 주세요

by 이븐도 Feb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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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했고 순간 그 말을 도집어넣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잖아. 나도 당황스러웠다. 왜? 대체? 아니, 야야. 다시, 다시. 일을.. 아니 근데 어차피 돈이 잔뜩 있다면 그냥 계속 일해도 되는 거 아니야?

친구는 푸학학학학 웃지는 않았고 웃음을 잔뜩 참다가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게 니 본심인 거야. 야. 넌 평생 해라. 알겠지? 나는 쌍욕을 참았고 입술을 깨물어 실소를 삼키며 그녀를 쳐다봤다. 내 대답이 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아, 정말 효과적으로 이 삶에 길들여졌구나.













창밖으로는 허리를 꼿꼿이 편 흰 강아지가 녹색 돔 형태의 유모차에 모셔져 길을 가고 있었다. 귀여운 애가 있나 싶어 돌아보면 강아지인 적이 상당히 많았다. 저런 건 얼마나 할까.

"나보다 자세 좋아. 저 당당한 눈빛 . 발도 안 시리겠다. "

그래,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는 기운, 보살핌 받는다는 걸 아는 애티튜드. 빛이 난다고.

"좋은 건 승차감도 좋겠지? 사람 것처럼. 나도 저런 거 누가 태워서 바깥공기 쐬게 해 줬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때 내 친구가, 자기 다시 태어나면 패리스 힐튼 강아지로 태어날 거랬는데."

뭐? 언제 적 패리스 힐튼이야. 아무튼 나초와 포케와 타코는 참 맛있었다. 우리는 둘 다 탄수화물에 사족을 못 썼다. 정말로 그랬다. 그녀의 개라, 똑똑한걸?

"아니. 근데 그 얘길 언제 한 거야?"

"대학생 때. 현명했던 것 같지 않냐."

응. 조금. 그리고 패리스 힐튼까지 안 가도 될 것 같아. 하하. 난 이 부근 직장을 다니는 월급쟁이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런데 자유가 없잖아."

"우린 있냐?"

친구는 세 시간을 자고 나왔고 나는 어제를 그렇게 보냈다. 하루종일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착실히 축적된 집안일을 했고 그다음 날 이른 출근을 해야 했다. 난 있냐고. 누가 나 대신 내 인생 좀 살아 줘. 아하하. 이 삶과 거기서 비롯된 모든 귀찮지만 필요한 일들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해.




-




"저 가게 되게 이쁘다. 뭐 파는 데지?"

벽돌 위에 붙은 폰트, 우드 인테리어의 내부, 은은한 간접 조명. 넓지 않은 면적.

"내가 아까 찾아봤거든? 이뻐서. 근데 뭐였게."

"공방? 소품샵?"

"강아지 용품 파는 데야. 개랑 고양이 꺼."

아. 그렇구나. 그래. 요새 강아지들은 다 때깔이 좋았다.

"디게 럭셔리하네. 내 것도 저런 데서 안 사 입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아니, 강아지들 부럽다."

"아냐, 이 삶도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가? 이곳의 직장인들도 때깔이 좋았다. 이게 연말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냥 그들의 상대적으로 괜찮을 경제 사정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에 맛있는 것과 친구가 있는 내 기분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주변의 퇴근한 사람들은 낯빛이 좋아 보였다. 회식 자리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

"당연히 개보단 우리가 낫긴 하지. 부러운 거랑은 다를걸."

"정말? 과연? 야. 털 윤기나는 거 봐봐, 유모차랑."










아냐, 아닐걸. 야. 돈을 그냥 주냐, 다 고생시키는 만큼 주는 건데. 막상 버는 사람들은 쓸 시간도 없어. 돈이랑 체력이랑 시간의 합은 그 절대치가 정해져 있어서 하나가 올라가면 나머지 두 개가 내려가고 하는 식으로 조절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짧은 돈벌이나마 해 본 내가 느낀 건 그랬다.


그렇게 버는 돈을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다 쓸까. 바로 저 친구들한테 쓰는 거다. 나는 집에 없지만 우리 똘이가 있으니까 보일러를 온도 맞춰 틀어놓고, 유기농에 살이 덜 찌는 온갖 재료들로 만든 사료와 간식을 사다 정량대로 먹이고, 철 따라 옷을 사 입히고, 알러지가 생기지  않을 성분으로 만든 샴푸 등으로 손수 목욕을 시켜 주고.

나는 사람 빽빽하고 냄새나는 지철이나 버스에 낑겨 서 있거나 내 돈으로 기름값을 확인해 주기적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차를 스스로 운전해 다녀야 하지만, 이 친구는 바퀴는 어떤 충격을 특히 잘 흡수하고 쿠션은 어떤 재질로 되어 있고 공간도 충분히 넓은 이동용 장치 우는 거지.




"야, 저 사람들이 쟤들을 허투루 키우겠어? 좋은 거 먹이고, 따뜻하게 재우고, 저런 가게에서 파는 거 사다 입히고, 때 되면 털관리해 주고."

"그건 그렇지."

나도 누가 좀 씻겨 주면 좋겠다. 먹을 거 다 소분해서 냉장고에서 넣어 주고 그거 쓰레기도 알아서 버리고, 보일러 잔뜩 땐 관리비 내주고, 아프면 내 병원은 안 가도, 심지어 내 병원비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내고서라도 재깍재깍 병원에 데려가고, 투실해졌다 싶으면 먹을 거 양 조절시켜 주고. 물론 저 친구들은 그들의 사랑이겠지.




-




지긋지긋한 일과 끝 현관에 섰을 때 나를 향해 내달려오는 존재, 또는.. 이 공간 한 켠에서 하루종일 그 어느 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잠에 빠져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 이 친구를 저렇게 보좌해 준다는 것으로 나는 행복감을 잔뜩 느낄 수 있잖아. 돈을 벌 이유를 찾잖아. 돌본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 기쁨을 주잖아.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 행복을 주지만 나는 아니지. 그러므로 혼자 알아서 먹고살 궁리를  나를 보살피고 신경 써 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번 달의 월급에 대해 감사와 푸념을 동시에 늘어놓으며 케이크를 각자 한쪽씩 시켰다.


평생에 걸친 의문이었다. 대체 왜 케이크를 하나 시켜서 나눠 먹는 걸까. 케익을 잘라서 각자 앞접시에 한쪽씩 덜어먹는 건 우리 집만 그런가? 아닌데. 그림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케익은 저 N분의 1 한 피스가 1인분이던데. 하여튼 카페라는 곳을 드나들게 된 나이부터의 진지한 궁금증이었다. 왜 하나를 시켜 이렇게 소극적으로 포크질해서 먹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너무도 당연히 '티라미수 시키자. 나는 아메리카노. 너는?'라고 음료에 대한 응답만을 내게 넘기는 질문에 토를 달기는 그래서 그냥 참고 살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생각보다 먹성이 좋은 편이며 또래 여자애들은 나보다 적게 먹었다. 어떻게 이걸 남겨?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꽤 오래 봤다. 여드름이 나고 곱슬머리가 정리 안 된 채로 교복을 입고 다니던 때부터.

"우리 둘 만날 땐 케이크 하나씩 시키자."

"좋아."

시트를 빙자한 초콜릿이 두터운 케이크와 가벼운 생크림이 발린 밝은 시트의 케이크를 하나씩 시켰다. 그걸 나란히 퍼먹으면서 생각했다. 참, 호화롭다고.

"사치스럽다. 진짜."

"그러게. 아, 근데 진짜 보너스 안 줘?"

"며칠 있다가 들어오는 게 다래. 올해는 더 없댔어."

"짜다, 짜. 야. 이게 엄청 다니까 이걸 먼저 먹는 게 낫겠다."

"이렇게 시키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 좋지 않냐."




-




난 어른이 되면 조금 더 폼나는 걸로 행복을 느낄 줄 알았다. 하이힐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와인잔을 서서 홀짝이는 뭐 그런 거. 프랜차이즈 카페에 컨버스에 청바지를 입고 앉아 케이크 두 개가 펼쳐진 광경에 포만감을 느끼며 함박웃음을 짓는 거 말고. 뾰족구두. 신고 나간 지 십 분 만에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몇 년 전 이후로는 한 번도 신발장을 나온 적 없고, 딱 붙는 원피스? 다른 친구와 옷을 바꿔 입어봤을 때뿐이었다.

욕창기록이 어떠니 퇴원약이 어떠니 무슨 연고가 어떠니 어떤 드레싱 제재 수가가 어떠니 낙상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를 욕과 한숨과 퇴사 생각과 섞어 한참 하다가 결국은 다시 월급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게 이 질문이었다.

"넌 로또 당첨되면 퇴사할 거냐?"










사실 지금 생각해도, 그러니까 저 질문에 대한 내 대답에 친구가 너무 웃어댄 후로는 주기적으로 저 질문을 생각했는데.. 항상 대답은 '아니'긴 했다.

번 돈으로 공연 보러 다니고 쓸데없는 거 사고 가끔 공원에 산책 가고 달리기하는 이 삶에 너무 익숙해졌나? 일이 지겹고 정말 짜증 나는 순간들의 연속인 것과 별개로, 굳이 그만두면 또 뭘 하나 싶다.

"그만둘 건 없고, 출근용 집을 하나 해 놓으면 되겠다."

"뭐라고?"

딱 좋을 것 같은데. 거기 돌려 입을 옷이랑 신발만 몇 개 갖다 놓고. 책이랑 충전기도. 그리고 오프 아닐 땐 거기서 자고, 최소한의 것만 하고 출퇴근하는 일상. 친구는 진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렇게 오바할 만한 건 아니지 않니. 




"넌 정말 일을 사랑하는구나."

"응, 아니야."

"아니라고."

"진짜야. 왜, 그 병원 앞에 더샵 오피스텔. 거기 전세로 해놓고 사는 건 그냥 나 사는 데서 계속 살고, 오프 때 가고."

"나는.. 출근용 집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봐. 야."

"당연하지. 내가 지금 만들어냈으니까."

"넌 절대 퇴사하지 마라. 어?"

왜 자꾸 악담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예 놀 것도 아니고..

"야, 근데 금액을 말 안 했잖아. 로또가 다 로또가 아닌데."

"그래. , 애들이 이제 금액을 구체적으로 묻더라."

"20억?"

"20억? 흠."

"15억."

"왜 20억은 안 돼."

"그러면 무조건 집부터 살 것 같은데. 그러고 나면 남는 게 없잖아. 상상의 여지가 없다. "

"20억 가지고 집 살 수 있어?"

"15억 아니면.. 30. 집 사고 딴 인생 살거면 30억."

"아. 되긴 되겠다. 이 주변에 평수 작은 거?"

로또는 내게 곧 인생 역전 같은 거였는데.. 결국 꿈꾸는 건 더 편안한 노동자의 삶이라니.




-




"난 안 힘든 게 아닌데. 어제도 진짜 같았는데. 뭘까?"

"그러니까 퇴사하지 마라고. 알겠지?"

"꺼져, 진짜. 야, 이 집 9억이다. 근데 오피스텔은 사는 거 아니랬는데. 전세가 나으려나? 아, 근데."

"또 있어? 출근용 집보다 더한 게?"

에이씨. 넌 그럼 그만둘 거냐고 하는 질문에 그 친구도 역시 아니라고 대답했다. 어이없어. 야, 인류애가 없어진다며. 학생 때는 그렇게도 욕을 안 쓰려 노력했던 친구는 험한 말이 상당히 늘었고 답 없는 환자와 보호자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안 그만둔다고. 돈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이 소박한 월급들이?











그러니까 병원을 안 그만둔다는 시나리오라면, 어쨌거나 그 출근용 거처를 하나 소박하게, 그러나 위치는 안 소박한 곳에 마련하고 싶다. 짐은 절대 적게 해 놓고, 냉난방은 빵빵하게. 맨날 샐러디나 보울레시피에서 랩이나 웜볼을 시켜 먹고 냉장고에는 방울토마토랑 생수랑 아몬드 우유만 놔둬야지. 배달 포장용기 말고는 어떤 일거리도 안 나올 공간이어야 한다.


별관 주차장에는 비싼 차들이 많다고 들었다. 이 병원 VIP나 교수와 펠로우 레지던트 등등의 것들일 그 자가용들. 비록 지척에 살지만 아주 튀는 색의 비싼 차로 출퇴근하는 사치를 부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운전을 못 하지. 운전 연수 없이 그냥 운전 능력만 살 수는 없을까. 나는 도로 위의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너무 무서운데. 로또는 무슨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로또 당첨금으로 차를 운전할 수는 없다.

"근데 나는 로또까진 안 바래."

"그래. 어차피 일할 건데 뭔 로또냐."

"..아니라고. 그래도 마음의 안정감이 다르잖아. "

어떤 더러운 꼴을 보고 겪어도 어차피 나는 저쪽의 파란색 푸조 SUV를 타고 1KM도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한 깔끔하고 조용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돌아갈 건데. 안 그래? 그런 생각이 나를 버티게 할 거라고. 얼마나 평화로워. 그리고 쉬는 날에는 '진짜 내 집'으로 가는 거야. (정말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할만한 거 아닌가? 일하고 돌아가도 내 차, 내 집. 노는 날에는 진짜 진짜 내 집.




-




"그럼 뭘 바라는데."

"세전 금액? 명세서에 찍힌 액수만 받아도 바랄 게 없다. 어? 볼 때마다 화나서 이제 안 열어본다고, 메일."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지. 나는 그런 숫자가 병원 이름으로 내 잔고에 찍힌 걸 본 적이 없다. 아. 신규 때 연차수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런 날들은 존재하지 않겠지?


그리고 봉급의 같잖은 액수에 익숙해진 나는 다시 생각했다. 세금을 떼기 전 액수를 받는다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그건 사실 로또 당첨만큼이나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어차피 수중에 한 번에 떨어질 일 없으나 로또와는 비교가 안 될 대적으로 귀여운 금액. 이딴 검소한 환상은 필요 없.

"난 오백. 깔끔하지?"

꿈이 크네?

"깔끔? 진짜 너 십 년 구르는 게 아니면 죽어도 그럴 일 없어. 아. 딱, 390? 390도 많. 387만 원? 아니지. 이것도.."

"S병원 다니는 애들은 그 정도 받는댔는데. 이 씨."

"야. 태우는 거 상상초월이야. 그런 데 발령받으면 어떡하냐."

"그래서 얼마를 원하는데. 아. 390도 우리한테 많은 거야? 왜 자꾸 낮춰."

"현실성이 없잖아. 386만 원. 87은 좀 많아. 86."

딱이다.

"아."




뭔 느낌인지 알겠지. 알겠니? 난 그랬으면 좋겠어. 사백 얼마니 오백 얼마니 하는 건 다 진짜 뜬구름 잡는 소리고. 정말 현실적으로, 저 정도만 되어도 난 바랄 게 없어. 그러고 보재작년까지는 저것에 그래도 근접한 액수를 받았던 것 같긴 한데. 이제는 다 옛날 얘기가 됐다.

"너무 현실적이라 슬퍼."

"뭐가 슬픈 거야. 저 금액을 받을 일이 없다는 게?"

"넌 정말 착실한 노동자 같아."

"니도 때려치운다매."

"난 출근용 집을 마련한다는 생각은 안 해."

그래서 나는 그게 내가 일을 사랑하고 이 근무의 힘든 점들에 통달해서 더 이상 굴곡질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정말, 어떤 일이든 해야 하는데 당장은 익숙해진 일이 저것뿐이며 온갖 고란을 겪은 후에 돌아갈 곳이, 그리고 그곳이 꽤나 굳건하며 빛난다는 사실이 나를 안정시키기 때문이라고 다시 설명해야 했다. 로또가 발한 재력의 마법이 빛을 다해도 어쨌든 삶에는 노동이 필요하니까.

거기다, 일이 끝나면 필요치 않은 자극을 안 받아도 된다는 사실 얼마나 축복이며 특권인가.










둘 다 어차피 이루어질 일이 없는 상상이다. 정자역 직장인의 애완동물로 나는 것이나 로또에 당첨되어 매매가 10억짜리 병원 앞 오피스텔에서 안온히 출퇴근하는 일상이나. 그러니까 차라리.. 월급을 그렇게 받고 싶다. 큰 욕심 아닌데. 백만 원을 뻥튀기한 것도 아니고, 두 배로 따따블시킨 것도 더더욱 아니고. 딱 저 정도만 받으면 소원이 없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이건 욕심이 아니다. 이런 현실적인 액수가 망상일 정도로 밥벌이 팍팍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금액이라 슬프고 웃기다.








+


그리고 우리는 저번 만남 때 겨우겨우 빙수를 먹었다. 그 친구는 아토피가 다시 해져 밀가루줄이는 중이라고 했고, 나는 아예 밥에만 집중하는 인생을 살아보고자 다시 시판 군것질거리에 암묵적인 안녕을 고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름의 타협점이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 돈 벌면서 내 몸까지 보살펴주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다.

 지하철역 근방 오피스텔 몇 층의 따뜻한 방에서 주인을 기다릴 그들을 생각했다. 비록 주인이 등장하기까지 매우 외롭고, 무료할 수도 있겠고, 본성이 동물인 만큼 실내에서 그렇게 있는 게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안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다 보살핌 받는 건 참 호화로운 일이잖아.



-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 한 동기는 고양이에게 무진 정성을 쏟는다. 캣타워를 들였다고 했다. 그녀는 그 고양이들이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먼저 말한 후에 원목이 어쩌고 목재가 어쩌고 하는 말을 했다. 원자재까지 듣고 나니 그것의 가격이 궁금해졌다. 얼마 줬니. 40만 원, 이라고 그녀는 가볍게도 말했다. 두 가지에 놀랐다. 그 가격을 먼저 언급한 게 아니라는 사실과 그 나무로 된 놀이 장치가 40만 원이나 한다는 것에. 전자제품을 빼고, 옷도 빼고. 그러니까 어떤 대외적인 목적과 쓰임새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의 유희만을 위해 단일 품목으로 40만 원짜리 무언가를 내가 산 적 있던가.


없는데. 진짜 없어. 어떤 사회적인 기능과 이목조차도 계산하지 않고 순수히 내 장난감이나 그런 시설을 위해 그 돈을 들인 적이 없다. 아. 정말 좋은 삶이구나. 니네 애들 너한테 잘해야겠다, 하니까. 잘하지. 봐, 엄청 이쁘지. 하면서 그녀는 내게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그래. 이쁘지. 고양이. 이쁘다. 본인은 당 범벅의 편의점 유부초밥을 사 먹어도 저 친구들을 위해서는 재료를 직접 삶고 쪄서 내놓는 그 정성을 받고 큰다면 누군들 안 예쁘겠어.





++


나를 저렇게 돌보는 것처럼 사는 삶? 좋겠지. 하지만 나는 피곤해. 기력이 없어. 저럴 돈을 벌기 위해 나는 시간과 체력을 등가교환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받고 싶다. 386만 원. 친구가 그 정도로 놀리면서 자꾸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지만 않았어도 잊어버렸을 일화인데, 자꾸 상기되어서 더 슬프다. 아주 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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