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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랬엉

Where typical fragility came from

by 이븐도





결핍은 과시로 드러난다. 아무튼 뭔가 지나치게 모자라면 그걸 감추는 데 급급한 모습에서 그 구멍을 더 추론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친구가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주는지를 줄줄이 티내는 사람을 오히려 조금 안타깝게 보게 되는 거, 후줄근한 복장의 누군가를 엄청나게 무시하는 모습에서 외려 좀 부족하게 컸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거.



그런데, 멀리 갈 거 없이 내 글이 그랬고 내 삶의 태도가 그런 것 같았다. 대체 왜? 난 그렇게 불행했던 적이 없는데. 집안의 가장이었던 적도 어딘가에 갇혀 있던 적도 묶여 있던 적도 뭔가를 박탈당하거나 양보해야 했던 적이 없는데. 진짠데. 근데 왜 이럴까. 왜 이런 엄청나게 억눌리고 빼앗기고 쫓아오는 사람인 것 같은 부담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글을 쓰며 일상을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 정확히는, 왜 이러고 있을까? 자유? 생존?달리기? 뭐 누가 잡으러 와? 어디 억류당했어?






모양새만 보면 사실 나는 '갓생'을 사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딱딱 출퇴근하고, 배달음식 잘 안 시켜 먹고, 술 잘 안 마시고, 담배 안 하고, 스트레스는 달리기와 글쓰기와 덕질로 풀고. 번 돈으로 공연을 보러 다녔고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급여 수준에 맞는 물질적인 욕망을 쫓았다. 얼마나 건전해. 진짜 너무 건전해서 재미가 없을 정도라고.

다이어트 안 하는데? 라고 하기에는 과일을 싸서 다니고 어딜 가나 프로틴바나 저당 스낵바를 챙겼다. 누군가를 만날 때가 아니면 과자나 디저트와 빵을 가능하면 안 먹으려고 했다. 이런 건 갓생이 아니라고? 아. 그렇다면야. 아무튼 조건만 늘어놓고 보자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아니. 문제까지는 아닌가. 여하간 흥미로운 점은 사실 그냥 일 다니고 가끔 운동하고 음식 조절을 조금 하려는 저 별것 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주제에 나는 너무나 항상 힘과 기합이 들어간 상태라는 것이다. 몰랐는데 내 글들에서 그게 질척일 정도로 드러났다. 왜 이러고 살지. 별 것도 아닌게. 뭐 나랏일 해? 근데 돌이켜 보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뭐더라, 몇 년 전 함께 풍등을 날렸던 상대방은 내 걸 보고 '대선 출마할 거야?' 라고 했다. 아마 병원 잘 버티자 이런 내용이었을 텐데 막상 문장으로 드러나니 그 정도의 비장함이 느껴졌나 봐. 조금 짜증이 났고 많이 쪽팔렸다. 이유도 모른 채. 응, 아니거든. 하고 말았겠지?






사실 너무 약해빠지고 종지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천성은 변하지 않으니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아닌 척하며 살았고 그게 훌륭히 체화되고 있을 뿐.

나는 기억력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몇 가지는 기억이 난다.


아빠 동료들의 가족들과 모임을 했다. 아마 삼겹살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내 또래 또는 몇 살은 더 많은 초등학생 언니오빠들과 함께 노래방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그 때 내피가 연하늘색이었던 흰 잠바를 입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화가 모자 같이 생긴 까만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엄마가 단단히 다시 씌워준 그걸 쓰고 잠바를 입고서는 정말 얌전히 구석에 앉아 있었다. 쑥쓰러웠고 언니 오빠들을 귀찮게 하기 싫었다. 정말 눈만 깜박이면서 그 움직이는 화면들과 노래가 진행됨에 따라 글자 색깔이 바뀌는 걸 보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너도 해 볼래? 했던 말에 나는 소리도 안 내고 웃었다. 배시시. 아마 그 단어를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웃었다.

싫다는 뜻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다섯 살 때인가, 둔산동에 있던 이마트였다. 스폰지밥 테마의 바비인형이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 인형을 사 달라고 하면 엄마아빠가 왜인지 나를 혼낼 것 같아서 말을 못 했다. 그냥 영원히 그 앞에 가서 서 있기만 했다. 땡깡을 부리느라 안 움직였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서 있었다. 가자, 하면 얌전히 엄마아빠를 따라 다른 층으로 내려갔다. 마음속에 그 인형을 몇 날 며칠을 담아둔 채. 그 이듬해까지도 기억했을까? 근데 지금도 기억이 난다.




여덟 살 때인가 눈꺼풀 수술을 했다. 눈썹이 자꾸 눈을 찌른다는 게 이유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수술은 수술이었다. 입원 전 엄마를 따라 하얗고 조용한 병원의 진료실에 앉아 있었더니 나오는 내 손에 하얀 곰인형이 들려 있었다. 털이 부드러웠다. 집에 인형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한 것들은 아니었다. 아. 집에는 인형보다 책이 더 많았다. 아마 그림책의 부교재로 따라왔을 동물 인형들은 많았지만 정말 인형 자체로 존재하는 그런 인형은 없었다. 당시에는 한가인이 원투쓰리포버블버블 노래에 맞춰 세탁기 광고를 하던 때였다. 그 곰도, 이 곰도 하얬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사랑하기로 했다.


사실 그 인형은 내가 안고 자기에는 좀 컸지만 나는 그걸 잘 데리고 다녔다. 유치원에도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고 집에 오면 그 옆에서 학습지를 하고 동생에게 짜증을 내고 어디 얼룩이 묻지 않았는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그 하얀 몸집을 붙들고 열심히 살폈다.



몇 달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구들의 집을 여러 번 가보다가, 나는 나의 진짜 욕망을 마주했다. 곰돌이 푸 말고, 미키와 미니 말고, 가짜 트롬 곰인형 말고. 전래동화 속 주인공이라 인형극을 할 수 있는 토끼와 호랑이 말고, 잔뜩 핑크색이거나 반짝이는 옷을 입은, 길거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이 가지고 싶었구나. 맞잖아. 그랬잖아.

초딩 첫 어린이날, 노트북으로 동생과 마다가스카를 보다가, 나 인형 사 줘, 했다. 사실 그 말도 너무 작게 해서 몇 번을 다시 했던 것 같다. 인형? 너 인형 많잖아. 아니야.. 인형. 무슨 인형. 뭐 갖고 싶은데? 나는 바비인형, 이라는 말을 삼켰다.

곰인형. 곰인형? 쟤들은? 쟤들 다 곰 아니야?






그리고 엄마아빠는 인터넷으로 '이거 비싼 거야' 하며 원피스를 입은 테디베어를 주문해 주었다. 그런 것 같았다. 곰인형 주제에 원피스 아래에는 속옷도 입고 있었고 원피스에는 곰인형들의 표식처럼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크도 붙어 있었다. 그렇구나. 근데 사실 마음에 안 들었다. 엄마아빠가 내게 보여준 것과 달랐다. 내가 그나마 마음에 들어한 건 연하늘색의 원피스를 입은 거였는데, 이건 할머니 옷 같아 보이는 파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걸 열심히 좋아하는 척했다. 그러다 보니 좀 좋아하게 되긴 했다. 실제로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근데 어떻게 안 그래. 하루종일 집에 있는데, 학교 갈 때 말고는 늘 집에 있는데. 하간 나는 안과 병원의 흰 곰과 함께, 그 인형을 학교를 세 번 졸업할 동안 잘 데리고 살았다. 욕망하던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시간과 마음이 깃들었으니까.






나는 공부를 못하지 않았다. 한글도 빨리 뗐고 덧셈뺄셈도 빨리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영어 발음이 꽤 좋았다. (이건 지금은 뭐 확인할 길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으니 자랑도 아니다. 그냥 그 땐 그랬다) 또래 애들과 어떤 학습지를 해도 내 진도가 항상 빨랐다. 그림그리기와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수학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쁘지는 않았으나 정말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좀 욕심이 났던 것 같다. 기탄수학을 나쁘지 않게 하자 기탄 사고력 수학을 가지고 왔고 유치원에서 돌아온 나를 옆에 앉혀 놓고 내가 뺄셈을 틀리지 않는지 딱 붙어서 지켜봤다. 사고력 수학. 지금 생각해도 토나온다. 짜증나.



아무튼.. 문제를 읽으라고, 문제를, 을 몇십 번을 듣고 꿀밤을 맞아 가며 그 지옥 같은 오후들을 보냈다. 밖에서는 다 나보고 잘한다고 했는데 집에만 오면 무서웠다. 동생은 한글도 느리게 뗐는데 걔가 지지부진한 모든 것을 다 훌떡훌떡 진작에 뛰어넘은 나한테는 칭찬도 안 해주면서 못한다는 말만 했다. 칠 더하기 육이 뭐야, 왜 2 써. 여기 몇 개, 몇 묶음이라고 되어 있어. 잘 읽어 봐.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해! 입 다물고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아, 그 놈의 입 다물고 그렇게 앉아 있지 말라는 말.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 안 그래도 잔뜩 화가 나 있는데. 거기서 모르겠어, 라고 하면 엄마는 얼마나 더 소리를 지를까. 사고력 수학은 못 풀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무서워서 울었고 모르겠어서 울었고 꿀밤이 아파서 울었고 그렇게 터진 울음을 멈추기 힘들어 울었다. 그렇게 어떤 문제집들의 페이지는 빗물에 젖었다 마른 것처럼 온통 우글우글해져 있었다.

저녁에 아빠가 퇴근하면 그 힘겨루기가 끝났다. 아빠에게 오늘은 늦는다는 전화가 오면 너무 슬펐다. 정말로 슬펐다. 한 번은 엄마가 그랬던 것도 같다. 울어, 너 왜 우냐? 아빠 오면 그만할 줄 알아? 이거 엄마 좋으라고 해?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울었을까? 아냐. 그 땐 그런 일말의 반항심도 없었다. 꼴보기 싫으니까 울지 말라는 말을 듣고 나는 끅끅거리면서 울음을 참았다. 빨리 안 참아져서 힘들었고 슬펐다.




학교에서 대회를 나가면 항상 상을 받았다. 그래, 그땐 다들 그렇지. 아무튼 그래도 그건 상이었다. 금은동이냐의 문제였을 뿐인데 나는 내심 동상은 상으로 안 쳤다. 어차피 엄마는 내가 뭘 받아 와도 잘했다는 말을 안 했다.

그리고 내 눈으로 봐도 딱히 기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그림들이랑 경쟁을 하니 그랬지, 맞춤법도 다 틀리는 애들인데 걔들 것보다는 차라리 내 게 낫겠지 생각했다. 그들의 작품을 깔본 그런 게 아니었다. 다만 이게 그렇게까지 기쁜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좀 주지시켰다.


두 번의 충격이 있었다. 3학년 때인가, 친구가 상을 탔다. 우리 집 아래아래층에 살았다. 그 친구는 전국대상을 타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 친구는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반 대항전에서 몇 골을 넣은 것만큼이나 파이팅 넘치게 집 현관문을 열고 엄마를 찾았다.

엄마아! 나 상 탔어! 어머니는 정말 그 땡그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떡볶이를 먹고 가라고 했다. 떡볶이만 먹지 않았다. 피자도 먹었고 엄마아빠는 이빨 썩는다고 안 사주던 배스킨라빈스도 대령했다.




4학년 때였다. 단짝이 내게 한 번 말했다. 너는 왜, 상을 받아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아? 그 즈음의 나는 조금 복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갖지만 어쨌든 교실에서 상을 받으러 내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그 시간 동안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관객이었기 때문에, 상을 못 받은 애들은 좀 슬플 거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사실 '오, 정말?' 했으면서도 아닌 척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그 박수를 들으며 나아갔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럴 성격도 안 됐지만 다른 까불이 남자애들처럼 막춤이라도 추면서 나가면 다른 여자애들이 나를 싫어할 수 있잖아. 친구는 그게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실 좀 짜증을 감추는 기색이었다. 나는 덜컥 걱정이 됐다.


아아, 나는 니가 이번에는 이 상밖에 못 탔어, 하느라 그런 줄 알았어. 아니야, 그런 거. 다른 애들도 그런 얘기 해? 응? 아니야. 애들이 나 싫어해?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 말을 반은 믿었고 반은 안 믿었다. 아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어디다 말하기도 그런 고민을 했겠지? 상을 받으러 나갈 땐 어떤 리액션을 취하는 게 좋은가요, 를 고민하는 열한 살이라..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그게 더 재수없는 모양새긴 했을 것 같은데 그 땐 거기까지 생각할 사고력은 안 됐다.






상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전과목에서 한 개를 틀려도, 두 개를 틀려도 엄마는 좋아하지 않았다. 잘 그린 그림? 잘 써서 담임선생님의 엄청나게 따뜻한 코멘트를 받은 일기? 모두 엄마에게 '쓸데없는 일'이었다. 난 그렇게 영재도 뛰어난 애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내가 그런 줄 알았나 봐.


5학년, 진짜로 전교 1등을 했을 때, 그리고 거듭된 부반장이 아닌 진짜 반장이 되었을 때 엄마는 정말 좋아했다. 재미있는 점은 반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를 훨씬 좋아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체 왜?

아무튼 엄마는 내가 반장이 되었음을 안 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늘 기분이 좀 안 좋았는데,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게 싫었는데. 친구들이 엄마를 무섭다고 생각할까 봐. 아무튼 그건 한 학기를 채 못 갔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전교 1등이자 반장의 자리를 원래 올림피아드 등등을 밥 먹듯 나갔으나 그 기말시험에서는 아쉽게 삐끗했던 한 남자애에게 얌전히 탈환해 주었다. 원래 그게 맞았다. 그리고 나는 그 해 10월인가, 1박 2일을 보며 거실에서 라면을 먹다가 엄마에게 생애 첫 반항을 했다.






바비인형 사 달라는 말도 못 하던 다섯 살짜리는 까만 티셔츠를 입겠다고 하거나 앞머리를 내리겠다고 하면, 니가 그렇게 우중충하게 다니면 사람들이 엄마아빠를 어떻게 보는 줄 아냐며 집안이 뒤집어질 것처럼 화를 내던 엄마와 지붕을 박살낼 것처럼 싸우던 중2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영재 비슷한 것일 줄 알았던 내가 그냥 모든 것을 어중간하게 열심히 하는 애였을 뿐임을 엄마도 나도 확인했다.


어릴 땐 내가 어딜 출전해 우주최강순금상을 받아 와도 거들떠도 안 보던 엄마는 갑자기 어디선가 학교 소식을 잔뜩 흡수해 야자를 마친 내게 '걔는 거기 나갔다던데 너도 뭐 냈냐?' 했다. , 대회? 어떻게 알았어? 나갔냐니까.

안 냈는데? 언제까진데, 몰라. 내일? 그럼 지금이라도 내. 수학 풀어야 돼. 그거 하고, 해서 내면 되잖아. 엄마가 깨워 줄게. 아, 싫다고. 이거 오래 걸려. 깨워 준다니까. 넌 왜 애가 이렇게 해보려고를 안 해. 아, 또 걔네 엄마한테 듣고 그러지, 그래. 가시나야. 너 어떡하려고 그래, 걔는 배치고사에서 다 1등급 나왔다더라. 그런 애도 하는데 넌 왜 안 하냐?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 쟤는 돼서 해? 그냥 해 보라고, 그러니까. 엄마,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어? 뭐, 이 가시나야? 맞잖아. 언제부터 내가 뭘 하는 거에 그렇게나 관심이 많았냐고. 너 내가 만만해? 엄마가 만만하냐, 너?



매일이 그런 일의 반복이었다. 어릴 때 나의 구세주이자 정신적 힐러였던 아빠는 전방으로 떨어져 객지 생활 중이었다.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기탄 사고력 수학도 못 풀었던 내가 블랙라벨을 술술 풀 수 있을 리 없었고 그걸 풀 줄 아는 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그렇게 안 보는 모양이었다. 상당히 괴로웠다. 슬프지는 않았고 개같았다.


그래서 그냥 학교를 엄청 일찍 갔다. 고2 4월인가. 아직 내가 자는 줄 알고 있을 시간, 나는 애진작에 일어나 교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서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아침 여섯 시였다. 고개를 돌렸더니 엄마가 붉은악마 티셔츠의 그 악마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지, 생각하기도 전에 엄마가 다가와 이어폰을 잡아빼고 그걸 갈갈이 분리해낼 것처럼 잡아뜯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나 역시 화가 났다. 대답할 말도 안 떠올랐고 엄마를 째려본 후 어차피 다 싸 놨던 가방을 그대로 집어들고 학교로 튀었다. 문이 더 세게 닫히길 바랐는데 그 정도로는 큰 소리가 안 났던 것 같다. 아마 내게 아침으로 뭘 먹을 거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자 방문을 열었다가 그 꼴을 보고 뚜껑이 열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 개빡친 상태였다.



이 망할 집을 반드시 떠나야겠다고, 뭐 그런 생각을 했겠지. 죽고 싶지는 않았고 다만 사방이 뭣 같은 거 투성이었다. 실업률이 어쩌고 떠드는 뉴스, 수업은 대충대충 하면서 문과는 답이 없다는 푸념만 (왜 자기들이 푸념을 하는지는 지금도 참 모르겠는데) 해대는 선생들, 뭘 갖다대도 미달인 내 능력치, 어린 날의 기대치를 잊지 못해 매순간 괴로워하는 엄마. 지랄맞음의 총집합이었다.






나는 개복치처럼 잘 놀랐고 두부마냥 예민했다. 어쩌면 그걸 엄마아빠가 그렇게까지 부둥부둥 맞춰 키우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은 정말 험난하거든. 사실 내게는 고난이랄 게 없었다. 길게 써놓았지만 그냥 쓸데없이 걱정이 많고 겁이 많고 부끄러움이 많고 할말 못할 말 구분을 잘 못 해 다 참았던 평범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연을 내가 잊었으면, 못 느꼈으면 몰랐겠는데 나는 그걸 알고서 그냥 어딘가에 미련하게도 쌓아 뒀다. 도화선만 제때 타면 다 터뜨려 버릴 것처럼.


그래서 이 집에서의 나의 사춘기 시즌은 동생에게는 진짜 다른 의미로 개같았을 것이다. 엄마아빠가 한 마디만 하면 혼자 발화하는 폭탄이 되어 집안의 모든 것을 다 폐허로 만들어 놓고 학교로, 학원으로, 독서실로 떠났으니.

그리고 그건 지금도 사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스물여덟이나 먹었고, 대학 진학을 시작으로 8년 가까이를 집을 나와 살았으니 이제 그만큼의 거리로 서로를 볼 수 있게 된 당장도 나는 삼 일 이상 집에 있지 않는다. 그래도 슬슬 알고는 있다. 이제 엄마아빠는 나와 그렇게 대거리를 해댈 에너지가 없다는 걸. 그리고 조금 후면 정말 서른이 될 내가 그러고 있는 건 이제 진짜, 창피한 줄 알아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






기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타고난 종지가 작은 탓에 아무리 작은 사건도 크게 난리를 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그릇의 크기는 변하지 않아서 지금도 그러고 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별 거 아닌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왜 이렇게까지 기합이 들어가 있으며 매 순간 각오가 단단하며 비장한 인간인지. 안 변해서 그렇다. 떠나왔으니 어떤 것은 이제 내버려둘 수 있지만 그래서 항상 주지하며 산다. 나는 원래 좀 그런 편이니 이 도화선들이 라이터를 잘못 만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고.


그래. 그래서 좀 봐주기로 했다. 보잘것없는 인생을 이렇게나 붙들고 있는 게 참 짜치고 부끄러우며 꼴보기 싫지만.. 어쩌겠는가, 정말. 나는 그렇게 해야만 이렇게나마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붙들어 매고 또 조여 놓고 기합을 들여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위험한 세상에서.




지나온 일들이 말해 주잖아? 내 작은 세상이었던 집에서 그랬고 학교들에서 그랬고 그 둘의 집합체이던 어느 곳을 떠돌던 시점들에도 그랬다. 다 참고 닥치고만 있을 수도, 모든 것에 발작하듯 폭발할 수도 없으니 나는 늘 붙들어 매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유, 자유 하며 달리며 지내나 봐. 말했듯 그렇게 결박됐던 적도 피난이라도 떠나야 했던 적도 없는데 말야. 진짜 어떡하냐고, 별 수 있냐고. 이게 내 결핍이고 그걸 메우는 내 모습인걸.


평탄했던 인생, 부족할 거 없던 삶, 단추만한 구멍을 못 붙들어서 절절매는 매일의 모양새가 사실은 조금 웃프고 그렇다.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어. 근데 늘 그랬잖아? 진짜로. 종지가 작은 탓이다.




진짜 다섯 살 때였네? 출처는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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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엄마아빠, 나 키우느라 고생 많았어.

사랑하는 거 알지. 정말이야.

성준이 너도,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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