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드립니다 글러 먹었어용
사실 아니다. 84번째 글이 올라가 있고 예약을 해 둔 다섯 개의 글이 올라가고 나면 89개가 된다. 운이 좋게도 이것까지 올라간다면 90개가 된다. 내가 브런치에 올린 글의 갯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쪽팔림을 반복적으로 감수한 공식적인 횟수기도 하다.
달리는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나는 글렀다.
작가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것, 달리기를 잘 할 수 없을 거라는 것, 어쩌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것.
나는 지금 사연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뭐든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문장을 쓰며 기침을 한다. 병원에서 받아온 감기약이 똑 떨어진 게 마침 금요일 저녁이었고 그 다음날도 근무였기 때문이다. 새벽 내내 기침을 했다. 좀 처량할 뻔했지만 기침만 심했기 때문에 그냥 그랬다.
약국에서 테라플루를 샀고 투썸의 작은 종이컵에 그걸 부어서 마셨다. 카페가 아니고 대학 도서관인 것처럼 애들이 많다. 비가 내리다 말았다. 오늘 콜드플레이 게스트는 방탄소년단 진이라고 한다. 내가 취소한 티켓이 며칠 거였더라?
22일이었나 그랬다. 원래 다 그렇다.
우중 콘서트라, 우비를 입고 괴성을 내지르는 공연이라, 개쩔 것 같은데. 진짜 개쩔 것 같은데. 아쉬워 죽겠다. 사실은 아쉬울 것도 없는데. 그 공연은 언제나 내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이 아프다. 오늘 나의 몫은 수많은 대학생들과 붙어앉아 있는 이 저녁 시간과 징하게도 안 떨어지는 기침과 한 번의 비공식적인, 이 오피셜 포기뿐이다. 공식. 비공식.포기. 맞아. 기빙 업. 콜록콜록콜록컬럭콜록.
예감,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다. 다만 시간이 축적되었을 때 불현듯 때 등장한다. 스치듯 느끼고 있던 것이 쌓여 마치 계시인 것처럼 들려오는 것이다. 넌 못 해, 라고 말했다.
교보문고의 서가와 매대를 몇 백번쯤 지나고, 읽지도 않을 책을 열몇 권씩 잔뜩 빌려 와서 쌓아만 놓던 기간과, 노트북에 이어 태블릿으로 이것저것을 화풀이하듯 쏟아 놓던 때를 거친 내가. 브런치의 수많은 엄청난 글들을 탐험한 내가. 글 뒤에 진하게 묻은 흥미로운 인생들과 사람과 사연과 표현과 레이아웃과 개성을 구경한 내가.
간호사 말고, 출근하는 날 아무튼 해야 하는 그 일 말고 글쓰기가 내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도 나에게 그런 일거리는 없었다. 수상 경력도 출판 경험도 관련 학위도 없는 내게 무슨. 당연하지. 그래서 스스로 일을 만들었다. 나 혼자 꾸민 조용한 일이었다. 브런치에 글 올리기.
일주일에 하나씩 올리면 일 년이면 48개. 그렇게 일 년 하면 그래도 60개는 되지 않을까. 그래도 한 번씩은 몇 개씩 올릴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그러면 그 중에 열두 개는 쓸만하지 않을까? 아니면 일주일에 두 개. 그럼 백 개가 넘어. 그러면 정말 열 개 정도는 괜찮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가 괜찮은데? 뭘 하기에 쓸만한데? 라고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마 이런 실망감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그 글 한 페이지가 내 인생에 엄청난 활력을 가져다주고 자신감을 주고 나를 알 수 없지만 환상적인 미래로 데려다 줄, 그런 마법이라도 부릴 줄 알았나 봐.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법은 당연히 없다. 내가 지금 기대하는 마법은 테라플루의 마법뿐이다. 제발 오늘 새벽에는 기침에 깨지 않길 바란다.
아, 마법은 없어도 달라진 건 있다. 온갖 잡념들을 아닌 척 꾸며 보려는 습관이 들어버린 탓에 요령 좋은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든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럴 것이다.
나는 출간작가가 아니다. 이 당연한 문장을 쓰고 있자니 정말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다. 나는 숨을 쉰다, 라고 쓰면 괜히 좀.. 당장 그 문장을 지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브런치는 내게 자격을 요구했다. 이 어플을 통해 몇 만명이 뭔가를 올리고 있을 텐데 이런 걸 제대로 검수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바 지원서를 냈던 것처럼 제출했다. 대충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떨어졌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무려.. 7년쯤 전이다. 그 때 내가 설정했던 닉네임은 '장우동'이었다. 장우동은 7년이 지나 이븐도가 되었다. 학과 공부가 싫고 학교가 싫고 스스로가 싫었던 한심한 대학생에서 그냥 내일의 출근이 싫은 간호사가 되었다. (직업이 있다는 것의 장점이다. 똑같이 한심한 점이 많으나 그 직업 뒤에 조금 숨을 수 있다) 장우동은 고등학생 때까지 살던 동네에 있던 프랜차이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내가 다니던 영어학원과 수학학원과 독서실 등등의 반경에 있었지만 정작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
".. 아무튼 글을 계속 쓰세요. 브런치도 있고 매체는 많아요."
라고 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 말이 진짜 시작이었다. 차갑고 냉혹하고 또 추워서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체험시켜 준 고등학교에서 나는 그 한 마디만의 인정을 받았다. 사실 인정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무튼 쓰세요. 그는 그 말 이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충 알았다. 저 말이 내 능력치에 건넬 수 있는 최선의 격려겠거니. 진짜 사회의 체험판일지도 몰랐던 고등학교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가끔 그 말에 기대어 살았다. 쪽팔리게도 그렇다.
국어 선생님은 수행평가로 애들에게 동화를 쓰라고 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방대한 분량의 과제를 제출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때는 특히 그랬다. 원고들은 출판이 됐다. 관계자분께서 오셨으니 네가 대표로 와서 사인하시라고 선생님이 그랬다. 와우, 생각해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아무튼 내가 쓴 뭔가가 들어간 게 어디 재고가 남아 있는 서점에 존재는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브런치에서 떨어진 게 성의없는 지원서 및 자기소개가 아니라 그런 게 모자라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끌어다 와서 출간작가, 라고 선택했다.
항상 몇몇 분들이 꾸준히 읽어 주시던데 혹시 이것도 읽는 중이시라면 전하고 싶은 고백이다. 저는 출간작가가 아닙니다. 이 설정은 어디서 바꾸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냥 산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나, 싶어서.
뭘 쓰든 많이 썼다. 그게 다 허섭쓰레기일지라도 많이 썼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한테 물어봤다. 아빠, 소설가는 뭘 해야 돼. 경험이 많아야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기자였다. 고등학교 때 영자신문부에 들었다. 학교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이 많았다. 중국,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 미국, 또 미국.. 껍데기와 소울이 반쯤만 한국인인 또래가 참 많았다. 처음으로 기사 원고를 가져갔을 때 부장이던 동급생은 빨간 펜으로 문법이 틀린 부분과 부자연스러운 단어와 숙어들을 잡아냈다. 빨갛게 난도질당한 것 같은 원고를 주며 그녀는 웃었다. 네 기사 덕분에 우리 신문이 나올 수 있는 거야, 정말 멋져. 이걸 영어로 말했다.
캘리포니아 햇빛에 담갔다 뺀 것 같은 진짜 영어와 그 미소. 나는 그 종이뭉치를 받고 웃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인생 전반에 걸쳐 한 번은 강하게 체득해야 하는 감정을 그 때 느꼈다.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항상 격무에 시달리고, 당신의 창의적인 수행평가 또는 수업 방식에 애들이 은은하게 또는 대놓고 품는 불만을 모르지 않았을 같은 국어 선생님이 내가 쓴 뭔가를 읽는 시간.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귀찮지 않을까, 너무 길기만 한가, 난 왜 저렇게 길게 썼지, 창피하고 집에 가고 싶다. 그 때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내가 쓴 글을 면식이 있는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능이 끝난 2월의 교무실에서 내게 저 말을 했다. 어쨌든 쓰시라고. 잘 계시려나 모르겠다. 그게 뭐든 한 맺힌 것처럼 중요하지도 않을 과제에 열을 올려 잔뜩 써 오는 학생에게 그 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였다. 부족한 재능도, 그 말도 사실은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니까 더 칭찬을 받지 못한 게 슬펐나?아무튼 최선이었다. 언젠가는 뽀록날 능력치, 과찬받을 필요가 뭐가 있나.
그 때도 지금도 쪽팔린 일이다. 두 겹으로 쪽팔린 일이다. 내가 내 손으로 긁어낸 내 내면의 뭔가를 활자로 드러내는 게 첫 번째로 쪽팔리고, 그걸 다 인지하고 있으면서 공적인 곳에 이것을 게재하려는 스스로를 견디는 게 두 번째로 쪽팔린다.
게재한 글의 수에서 최소한 3을 곱해 본다. 나는 그만큼의 쪽팔림을 감수한 뻔뻔한 사람이다. 부끄럽게 창피하다 한심하다 다채로운 단어로 잘도 써 왔으나, 모든 글은 그래도 세 번씩은 읽었을 거고 그 후에 업로드가 됐다. 90회쯤이 올라갔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어림잡아 못해도 300번은 창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앞뒤가 안 맞고 두서가 없는 글들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경이롭다.
사실 나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뻔뻔하게 지금까지 밀고 왔다니.
그런데 왜 글렀다는 생각을 했나. 하필 달리다가. 원래 달릴 땐 그런 생각이 든다. 찰나의 반짝임.
퇴근 후 지하철에 실려서, 나이트 때 졸음과 짜증을 씹으며 하는 생각들은 쓸모가 없지만 달리기 때 드는 생각은 그래도 좀 쓸모가 있었다. 계시였다.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진한 이상형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졌다. 아무것도 쓰지 않을 땐 다 쉬워 보였던 도처의 글들이 내가 그래도 처음과 끝을 낸 뭔가를 쓰기 시작하자 그 난이도가 가늠이 되는 것 같았다. 별로라고 생각했던 문체들에도 나름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삶을 떠나서 쓸 수 없었다. 거창하게 표현했으나 생업을 글쓰기로 둘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간호사를 그만두고서도 뭔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까 하는 질문을 했다. 중요한 건 간호사든 서점 직원이든 내가 도중에 관둔 몇 개의 알바들인지가 아니었다. 나는 방구석에 살며 글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답은 노.
글은 본디 매력에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이든, 그가 유명인이라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매력이든, 그 직업이 주는 매력이든, 그 글에서 드러나는 재력이 주는 매력이든. 글은 결국 그 사람이었고 글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내게는 그랬다. 그 사람이 짊어진, 치이는 중인 삶에서 스며든 얼룩이 그 글을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했고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아니면 기똥차게 재밌는 줄거리를 생각해 낸다거나. 그런데 줄거리도 결국은 등장인물의 매력과 성격이 끌고 가는 거 아닌가.
육십 개쯤 쓰면 쓸 만할 게 나오지 않을까, 했던 질문이나 했던 나는 아주 막다른 골목에 와 버렸다. 완성해 지나온 글은 그냥 당시의 표상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그랬다.
그렇다고 머리나 경험이나 재력이 비상해서 누구든 생각지 못할 참신하고 즐겁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낼 능력치는 안 됐다. 나는 반 년간 꾸준히 이것을 느껴왔는지도 몰랐다. 글렀다. 작가나 그 무엇이 되는 건 정말 글렀다. 다만 이렇게 계속 쓰면서 살겠구나, 사실 돌아보면 늘 그랬던 것처럼. 뭔가를 하며 부차적으로만 쓸 수 있겠구나.
그리고 좀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이제야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계속 짝사랑하느라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에야 그게 외사랑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거지.
사랑은 사랑이었다. 음. 과거형 아니고, 사랑이다. 그 때도 지금도 늘 그랬다. 이 자취가 사랑이 아니면 뭐냐. 사랑이지.
나름 백 번을 기념하는 중이다. 아직 안 왔지만.
나는 좋아해서 잘하고 싶었다. 모자란 역량이 부끄러워 좋아한다는 걸 좀 오래 부정하고 싶었는데, 좋아하는 게 맞았다. 좋아해서 잘하고 싶었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런데 부족했다. 끝이 안 나는 순환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졌다. 아무튼 나는 좋아한다는 것. 혼자 좋아한 거였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 골백 번의 쪽팔림을 견딜 만큼 좋아했다는 것. 앞으로도 좋아할 것 같다는 것.
기침이 아까보다는 덜 난다. 나는 아직도 40분에 5킬로미터를 조금 넘게 뛴다. 육 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크게 없는 것이다. 슬슬 짜증이 나서 때려치우고 싶었다. 마라톤 나가고 싶었는데 관뒀다. 전에는 새벽 두 시에 자도 달리기를 위해 다섯 시에 깼는데, 이틀만 못 뛰어도 나가고 싶어 몸이 다 꼬였는데, 이제는 5일을 안 나가고도 귀찮기만 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공원에 사람이 없을 때였다. 가는 길 횡단보도에 서 있던 나이키 바람막이에 빨간 러닝화. 내가 한참 전에 지나쳐 온 남자가 어느새 내 앞에 가고 있길래 열이 받았다. 나는 그를 앞지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천천히 뛰었다. 몇 분을 뛰어 한참을 앞서고 나니 헉헉거리며 멈춰야 했다. 그는 약 1분을 걷던 나를 다시 유유히 앞질러 갔다. 그 때 느꼈다. 나는 아직 달리기 대회 같은 걸 나갈 때가 아니라고. 그게 몇 킬로미터짜리든 앞뒤양옆 달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 이벤트에서 또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만 좋아하는 중이었다. 좋아해서 잘하고 싶었으나 그게 잘 안 돼서 심술이 난 거였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글쓰기에 대해서보다 더 명확하게 알고 있다. 내가 달리기를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잘할 수는 없으리라는 걸. 그냥.. 뭐, 아무것도 안 하던 일 년 전 나보다는 오십 배쯤 낫겠지만.
좋아할 뿐이다. 그래서 글렀다. 언제나 그랬던 사실인 걸 받아들였다. 이제야 좀 개운하다. 달리기도 글쓰기도 백 회를 얼마 안 남기고 있다. 평생 가야 할 거 아닌가. 멈추지 말고.
그리고 모두에게 짙은 감사를 드립니다.
멋지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멋진 삶을 언제나 잘 구경하고 있거든요.
+
임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그 때 학교 와서 애들이 와서 쓴 것 좀 봐 주지 않겠니, 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그 애들이 아마 대학교 졸업반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 때 저는 제 없는 능력도 저 자신도 부끄러웠습니다. 지금도 달라진 건 없어요. 다만 허세를 버린 것 같아요. 지금 보니 허세였고 괜한 기대였습니다.
당장 저는 그냥 저로 삽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다 제가 어떤 것들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글쓰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나 다름없었거든요. 아닌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과 그 일들을 자주 꺼내 먹으며 삽니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무슨 상이라도 받고서 이런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언제 한 번 찾아뵙고 싶네요. 마음은 자꾸 변하는 거니까 이렇게 박제해 놓기 위해 씁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