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구하러 가던 길
나는 항상 공주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못 됐다.
대신 기사가 되었다. 도망친 공주를 찾으러 떠난.
이건 달리기에 대한 글이다. 요즘의 달리기.
날씨가 뜀박질에 딱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운 게 나랑 동생 생각을 했기 때문인 줄 알았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백 프로는 아닌 것 같았다. 그거 보고 왜 울었어? 어디가 슬픈데? 라고 물은 내 말에, 한참 딴소리를 하다 니네 쪼끄말 때 책 읽어주고 그랬던 게 벌써 이십 년 전이야, 아이구. 세월아. 언제 이렇게 다 늙었냐. 좋은 시절 다 끝났어, 아빠는. 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애한테 졸음을 참으면서 맨날 똑같은 내용들의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게 어떻게 좋은 시절일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 울어? 안 울어. 아빠는 대답은 그렇게 했는데 아마 내가 몇 마디 더 건드렸으면 울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지. 아빤 고생했고 나랑 성준이는 잘 살 거야, 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 날 본가에서 집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아, 달릴 때의 내가 항상 좋은 시절이었으면 좋겠다.
내 자유는 비싸잖아. 이 월세, 커다란 공원, 저녁 시간대의 적당한 인구 밀집도, 이 계절의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직 연골이나 근육이 나가버리지 않은 나. 이 정도의 모든 적당함이 갖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좀 추우려나, 생각했던 바람막이 차림이 적당해졌을 때. 뛰어서 뜨끈하게 올라간 체온과 서늘한 공기의 낮은 온도가 맞을 때. 아, 개쩐다. 생각한다. 바스락거리는 감촉, 널널한 천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어딘가에 땀이 맺혔다가도 금방 식는 듯한 그 기분.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느낄 때도 있다.
날씨가 완벽한 저녁,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씩씩거리면서 지날 때. 살면서 그 무엇에서도 앞질러 본 적 없는 내가, 커피를 들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이들을 얍삽하게 지나쳐 갈 때, 여덟 시 반쯤 다 어두워진 놀이터에서 학원 가방 던져두고 타던 그네의 기분이, 엄마아빠가 저 앞 애기처럼 어렸을 내 손을 한 쪽씩 잡고 슈우웅 하고 팔힘으로 나를 땅에 들어올렸을 때의 기분이, 얇은 바람막이 천이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더운 느낌이 들었다. 환상적이면서 편안했다.
왼쪽 귀 근처를 훑은 바람이 등을 싸늘하게 지나쳐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느낌이 좋았다. 벚꽃이 지자 나무에는 연두색 잎들이 가득해졌다. 아무것도 안 열릴 줄 알았던 나무에는 핑크색 겹벚꽃이 화려하게 피었고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연보라색 라일락이 지자 하얗게 풍성해진 이팝나무가 등장했다.
작년의 내가 저거 딱 마지막이네, 하고 지나쳤던, 한 장의 단풍잎이 우그러든 채 붙어 있던 나무에는 아기 손같이 작은 이파리들이 잔뜩 자랐다. 너무 좋으면 잃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뭘? 아마 이 순간들. 내딛는 걸음 걸음이 가볍고 달았다.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한국 아이돌 곡들을 들으며 뛰면 그렇다. 대체로 뭐 어디 이세계에 억류되었거나 안 이뤄질 것 같은 누군가를 찾고 갈망하는 듯한 감정을 노래하는 곡들이 많다. 그래서 그랬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공주는 말고, 기사. 왕자도.. 아니다. 공주는 안 되고. 기사.
달리는 거지. 이렇게 바람이 부드럽고 평화로운 밤에. 혼자 달린다. 대열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꼭 내 잘못만은 아냐. 나는 그 공주가, 이미 정해진 혼처의 그 왕자가 아닌 다른 애인과 마주 본 채 볼을 붙들고 정원 같은 곳에 서 있는 걸 봤거든. 에휴, 여기 눈이 몇 갠데 저러고 있나, 생각했고.
들쑤시고 싶지 않으니 못 본 척했다. 잠에서 깼을 땐 숙소의 다른 인원들은 애진작 출발한 후였다. 어디로? 공주가 납치되었을 거라 추정되는 곳으로. 아, 그분 납치된 거 아닌데. 자발적 도피였는데? 진짜 다들 몰랐단 말이야? 근데 나는 왜 놔두고 가. 포상 나눠야 하니까 그냥 떨구고 간 게 틀림없다.
뭐 그리들 피곤하게 사나. 어차피 걔는 딴 애랑 알아서 행복할 거란 말이야. 근데 잘 갔을라나 모르겠네. 어설프게 잡히지 말고 행복하시길. 다들 눈이 벌게져서 온 숲이고 들판을 다 뒤질 테니까. 잠깐, 도망쳐서 행복할 수가 있나? 글쎄. 그건 왕족인 그녀가 어련히 알아서 할 거고.
봄밤이 아름다웠다. 어차피 나 말고도 수백 명이 흙먼지를 내며 달리고 있을 그 길을 같이 쫓기에는 꽃이 어쩌고 바람이 어쩌고.. 아무튼 좋다고, 아깝단 말이다.
그리고 이내 좀 불안해지는 거지. 지금이라도 좀 빨리 따라잡아서 사실 너무나 아파 못 일어난 거였다고. 열병이 좀 심하게 나서 나를 깨우는 그런 소리도 못 들었다고 거짓말을 좀 칠까 싶은 거다. 그냥 있는다고 잘리지는 않겠으나 혹시, 쟤들이 다 허탕치고 오면.. 구조조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 농땡이 깠다고 다른 애들이 날 먼저 비방하면 어떡해? 가란 델 안 갔으니 기실 틀린 말도 아니긴 한데. 아이씨, 지금이라도 가야 하나? 이대로 괜찮나? 아니. 모르겠는데. 흠.
나는 공주가 될 수 없었다.
안경 쓴 공주가 어딨어. 그것도 빨간 안경 쓴.
공주는 드레스를 입는다. 드레스? 입었던 거.. 기억하기로는 아주 어릴 때 말고는, 4학년 때인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갔을 때다. 나는 그 때도 안경을 쓰고 있었다. 드레스도 딴 걸 입고 싶었는데 엄마가, 이게 낫네. 했다. 핑크색 허리 리본이 붙은 흰색 드레스였다. 빨간 안경에 흰 드레스?거기다 분홍색 리본? 드레스 입을 기회를 이런 식으로 허비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뿐만이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가 부채춤 선녀춤 등등을 할 때도 나는 안경을 써야 해서 아무튼 어떤 종류의 공주도 될 수 없었다.
커서도 되지 못했다. 동네 친구이자 이제는 같은 병원 동료가 된 그녀가 카톡을 보냈다. 대충 힘겨웠던 내용이다. 누가 그랬어, 내가 혼내줄게, 언제 보자. 했더니 그 날만 기다리겠다고 했다. 기다리지 마, 이쁘게 살아, 했더니 맞아. 공주는 이쁘게 살아야 해, 고마워. 했다.
공주? 공주는 응급실에서 환자가 잔뜩 올라오는 일 같은 걸로 힘들어하지 않는데. 걔는 노동을 안 한다고. 체험으로 그런 일을 하더라도 딴 데서 커버쳐 줄걸?
그래서 커서도 공주는 못 됐다. 물론 그녀와 함께 근무스케줄을 공유하는 방 이름은 '누구공주와 누구공주'긴 했지만. 못 될 걸 알아서 그렇게 써 놨나봐.
달릴 때의 그 온도가, 얇고 바스락거리는 그 어두침침한 파란색의 바람막이의 감촉이 주는 느낌이 그 때, 좀 추웠던 무대에서 맘에 안 드는 드레스를 입고 잔뜩 긴장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냥 그 차가움이, 시원함이 비슷했다는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공주는 못 됐다는 걸 알았다.
항상 이탈 중이었다는 것도 비슷하긴 하다. 이대로 괜찮나? 생각한다. 그 기사는 어떻게 했을까? 없는 꽁지가 빠져라 그 대열을 뒤따라 갔을까, 쌍욕을 하면서? 요새 젊은 사람들은 모여서 '임장'을 다닌다고 하던데. 난 뭐 하냐.
달리기의 장점이긴 하다. 공주와 기사가 어떻고 하는 망상을 공원의 커플들과 나무와 꽃들을 보며 하고 있어도, 아. 나 밖에서 뛰고 왔어, 하면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 나도 몰랐지. 스물여덟이나 먹고 이런 상상이나 하면서 살 줄은. 그래서 뜀박질 하잖아. 합법적으로 딴 생각 하려고.
그래서 진짜 그 기사는 어떻게 됐을까? 만일의 그 구조조정이 없었어도 그 몸이며 체력이 영원하지는 않았을 거고, 애초에 하고 싶던 일도 아니며 딱히 열의도 없었을 보직 아니야? 탱자탱자 밤구경이나 하며 자리를 보전하기엔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인력들이 많았을 텐데. 그렇게 몽상가처럼 굴다가, 정말 어떻게 됐을까? 사실 이거 내 얘긴데. 난 어떡하지. 이대로 살아야 하나?
모르겠는데. 진짜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튼 달리기는 계속하기로 했다. 운동으로 보이는 거긴 하잖아. 지겨운 세상. 지겨운 나. 바쁜 사람들. 아름다운 밤. 공주 얘기요? 기사? 누가 나이 먹고 그런 얘길 해. 저는 러닝, 해요. 멋있죠? 네. 그 러닝이요. 임장? 그런 것도 있구나, 뭔데요? 우와, 대단하다.
정말 어떡하지. 항상 모르겠다.
잘 살고 있는 건지. 그게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