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일
날이 좋다. 내일 경찰서에 전화를 해 봐야지,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이천만원, 어디에 쓰였을까 생각했다. 비싼 유모차, 밝은 표정의 부부, 안 아픈 애.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셔링 잡힌 상의, 샌들, 흰 바지, 원피스, 얼음컵, 바람. 시위하는 사람들, 경찰들.
어디에 썼을까. 투자? 마약 유통? 술값? 성매매? 아픈 애들 치료하는 걸 돕는 기금에의 일조? 좋은 데 썼으려나.
뭔가를 짓느라 쳐놓은 가림판에 경찰 마스코트가 쌍으로 붙어 있다. 시민들을 보이스피싱으로부터 지키겠습니다.
지킨다라. 어떻게? 아니면. 우린 이렇게 공표할 수 있을 만큼 할 일을 했으니 피해는 당신들 책임이다 이건가? 아마 그렇겠지. 이제야 생각한다. 이걸 피해로 부르는 게 맞는가.
연우진이 나오는 드라마를 봤다. 13년 전 드라마. 보통의 연애. 형을 살해한 살인자의 딸을 사랑하게 된 남자와 그 딸의 이야기. 십 년 전쯤인가에 유튜브에는 마지막화가 없었다. 며칠 전에 보니 올라와 있었다. 나한테는 병이 있다. 드라마를 잘 못 보는 병. 근데 이건 4부작이니까.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저런 사랑을 할 수 있나, 가능한가? 나한테 그런 불행이 뭐가 있지? 아. 2천만원. 그 때 교회 앞에서 나한테 현금이 든 종이가방을 받은 아크네 스튜디오 가방을 든 여자. 아마 엄마뻘 될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 그 여자에게 아들이 있었더라면.. 뭐. 그런 거? 어떤 남자 연예인들 얼굴을 갖다대도 불가능한데. 한재광씨, 사랑이 많으신 분이네. 인간적이야, 생각했다.
날이 조금 습해졌고 병동이 바빠서 일하다 보면 옷 안에 땀이 찬다. 한 번씩 올라온다. 이렇게 일해서 한 달에 250만원, 200만원을 저금했다는 것. 5천만원과 7천만원은 다른데. 생각보다 내가 금전적인 목표에 마음을 많이 두고 일했었구나, 싶다. 사기범에게, 그 언니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 다음 월요일에 마저 다 갖다줄 수도 있었던 나머지 돈은 엄마에게 맡겼다.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난다.
원래 그때쯤 저금했던 액수가 얼마였더라. 벽돌을 쌓는 것처럼 차근차근, 당연히도 별 일이 없었다면 이맘때쯤 모았을 금액과 지금 실제로 모였을 액수의 괴리가 있다. 다 엉켜서 복잡하다. 실상은 복잡할 것까지는 없고 .. 그냥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아마 여섯 시간이었나. 열두 시쯤 전화가 와서 끊기기까지. 한동안 못 썼던 다이어리 페이지들을 넘기다 보니 그 날 전화를 받으며 적었던 메모들이 남아 있다. 사기범은 나를 윽박질렀던 것 같다. 이게 지금, 사안이 심각한지를 모르시는 것 같은데, 누구누구씨가 이렇게 성의 없는 태도로 조사에 임하시면 안 됩니다. 니가 조사한답시고 전화한 건데 내가 뭐 잘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뭘 더 하란 거지?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로 잘못한 게 없었다. 그때까지의 말마따나 개인정보 관리에 소홀했던 점은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 이외의 건 난 정말 잘못한 게 없었거든.
성의가 없다고요? 제가 뭐 정보를 덜 말씀드린 게 있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직장생활 하신 거 맞아요? 말귀 참 못 알아들으시네. 누구누구씨. 의료인 빨간 줄 그이면 일 못하는 거 아시죠. 알긴 하십니까?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그래요? 그들이 내던진 날짜에 나는 문래동 새마을금고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케줄표를 보니 일하고 있었다. 데이 근무. 나는 정말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게.
제가 뭘 더 해야 하는데요? 그랬던 것 같다. 나이가 어리셔서, 모르시는 것 같으니 알려 드리겠는데. 지금 시간이 아주 지체가 많이 됐어요. 거기다 지금 금요일입니다. 은행이고 공공기관이고 다 네다섯 시에는 일 끝납니다. 아, 네. 뭐 펑펑 울기라도 하란 건가 생각했겠지. 다른 분들 같았으면 지금 아주.. 네? 아무튼 협조를 잘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딴 사람들은 뭐 어쩌는데요. 누구누구씨. 말씀 다 녹음되고 있는 거 아시죠. 뭐라고 하셨죠? 뭐라고 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질질 짜요? 울어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요.
바쁘시다면서요. 아니예요?
그리고는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 기준으로 너무 고소득자였고, 계좌 번호 등을 알린 게 아니라 직접 현금을 전달한 거였기 때문에 돈 한푼 받아낼 구석이 없었다. 나 고소득자구나. 씨발. 교대근무해서 다 몸으로 받아낸 건데. 좆같은 세상살이다. 누군 좋아서 일해? 좋아서 일하냐고. 씨발. 다 씨발이다.
상담을 받으러 가는 상상을 한다. 또 똑같은 일을 똑같이 말하는 걸 생각한다. 그전날 당직이던 젊은 형사에게 다 말했지만 그 다음날 담당 형사에게 또 똑같은 일을 말하고. 또 반복해서 말했던 것처럼.
어디요? 가슴이랑 주요부위요. 아. 뭐라고 하던가요. 영상이 남아 있나요? 보여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또래 20대 여자가 연루되어 있는데 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게 필요하다고 했어요. 아아, 네. 여자 검사한테 식별을 넘겨야 한다고.. 아. 그런 건 말씀 안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 거기는 조사 중인 경찰서였지 상담실이 아니었다. 내가 분간을 못 한 거였다. 얼굴이랑 다 나왔군요. 네.
엄마는 그 형사 앞에서 그걸 못 지우냐고 했다. 병신같은 경찰은 그냥 못 한다고 깔끔하게 대답하면 될 걸 그게 유포된 게 아니면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길게도 말했다. 들어가서 찾기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등신새끼들.
사람 몸 다 똑같이 생겼는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했다. 병원에서 내가 일할 때 보던 거나, 어딘가에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는 내 거나. 나는 다만 그걸 엄마가 경찰에게 묻고 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 날 안 지어도 되는 죄를 지은 거였다. 엄마에게.
이걸 가서 처음부터 다 얘기하라고. 아마 그러겠지. 힘드시면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 힘든 걸 말하지 못한다면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었을 텐데. 우습게도, 그 때는 어쩔 수 없지, 어쩔 건데 하고 넘겼던 장면들이 이제는 무겁다. 많이. 간다 해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무거움을 꺼내서 말한들, 달라질 게 없으니까. 누구씨 잘못이 아니예요. 어쩌고.. 그러겠지. 내 그런 이야기를 꺼낸 댓가로 들을 수 있는 말은 고작 그런 거잖아. 그 새끼들 다 죽여 주겠다는 그런 다짐이 아니라. 말할 이유가 부족한 것이다.
전말을 들은 엄마는 절망적으로 울었고 나는 반농담처럼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결혼 잔소리 같은 거 그만 하라고 했다.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믿지 않을 거고 다 부질없으니까. 들었지, 듣고도 그럴래? 엄마, 아빠. 나 연애 한 번 해봤어. 그리고 이런 일이 생겼어. 할 수 있어?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말들? 하지마,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그 집 사람들, 사는 게 말이 아니야. 자기 아빠 숨겨서 살 그런 형편이 못 된다고. 언제까지 그럴 거야, 엄마. 다 끝났어. 형이 죽었을 때 다 끝난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해. 그만하세요. 엄마. 주인공 한재광이 자기 엄마한테 그런다.
살해당한 형을 잊지 못해서 여주인공 집에 몇 년간 청부업체 사람들을 보내 괴롭히고 주소를 쫓아 찾아낸 엄마에게 그런다. 그가 굳이 김윤혜가 사는 전주로 온 것도 그걸 끝내기 위한 거였다. 엄마, 신여사 힘들어하는 게 좀 끝났으면 좋겠어서. 범인이 어찌되었든, 그게 누구든 일단 엄마가 그 때의 일에서 좀 놓여났으면 해서였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의도치 않게 맞잡게 된 때 그는 김윤혜와 함께 경찰서를 나선다. 거기서 엄마와 마주친다. 살인자의 딸에게 좋다고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을. 근데 그거 그런 거 아닌데. 그래서 그런 거 아닌데. 아무튼 그녀를 향해 그거, 차에 싣고 갈 거냐는 엄마의 말에 그가 말한다. 그만 좀 하시라고. 형 죽었을 때, 7년 전에 끝난 거라고.
경찰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실상 화를 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들은 사건의 담당자일 뿐이니 내 욕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 날 저녁, 교회로 뛰던 나에게 나한테 웃으며 너무 서두르지 마시라고 하던, 넘어지신다고 하던 사기범, 아까는 너무 덤덤하셔서 상황 파악을 잘 못 하신 줄 알고 제가 그랬는데 이제보니 그냥 성격이 그러신 분 같다던 그 음성변조된 목소리. 왜 안 써 보내냐던 반성문.
경찰서에 조사서를 내고 오던 날,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걸어 씹새끼야, 재밌냐? 너 재밌지. 개새끼야, 너 내 돈 가지고 뭐 했어. 씨발놈아, 라고 소리치자 너, 미쳤어? 하던 목소리. 역시나, 웃기지도 않게 보내온 내 영상.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다고? 대단하다, 미친년. 겁대가리가 없지? 나 주소도 있는데? 그래. 씨발새끼야. 뭐 했냐고. 대답해. 대답하라고.
없던 기억도 있는 기억도 아닌 일들. 그 부분에서 드라마를 멈추고 글을 쓴다. 가족, 지인 몇 명. 발화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진 그 날의 애매한 기억. 다 끝났다. 진짜 다 끝났다. 백 일 전쯤에 끝났다. 애저녁에 다 종료된, 지나온 일들이다. 외면하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 때 벌어진 일이다. 한재광의 말처럼. 되돌릴 수 없다고. 다 끝났다고.
엄마는 아래층에서 잤다. 일곱 시. 나는 일어나서 달리기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달라진 게 없었고 달라야 할 이유도 없었거든. 그 때 엄마는 쌩뚱맞게 그랬다. 아빠한테 잘해 달라고. 예전 같지 않다고. 그 얘길 왜 지금 하는데, 했지만 어쨌든 이어지는 말들을 들었다. 그러다 날이 더 밝았고 나는 그 날은 러닝을 못 나갔다.
어제는 나갔다. 아마 오늘도 나갈 것이다. 한밤중에, 회색 티셔츠가 다 젖도록 뛰던 남자의 뒤를 쫓아 달린 적이 있다. 네버 수어사이드 러닝 클럽이었나. 네버 다이였나. 그게 그거다. 시간이 좀 많이 늦었을 때였다. 나는 두 바퀴째였고 그 사람은 더 뛴 것 같다. 그 날 한 9킬로미터를 뛴 것 같은데. 달리기가 여럿 살리는구나 생각했었다. 작년의 일이다. 아주 추워지기 전. 그 때도 뛰었고 어제도 뛰었다.
공원 옆에는 장례식장이 있다. 거기가 거긴 줄 몰랐는데 작년에 가 보고 알았다. 며칠 전 거기서 오후 두 시 반에 20대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됐다고 했다. 어제는 그 생각을 잠깐 하면서 뛰었다. 나한테 죽을 이유 같은 건 없다. 근데 진짜 그 정도의 사연은 없었다. 지나온 일이 이제 와서 좀 괴로울 뿐.
그래도 그런 생각은 한다. 그 여자라도 잡혔으면 좋겠다. 커피 한 잔 가져가려고. 그 옆에 있던데, 카페. 한 오 분 놔뒀다가, 얼굴에 뿌리든가. 정수리부터 붓든가. 어차피 그 정도로는 화상도 안 입을 거 아냐?
피해에는 보상이 있고 범인이 있다. 이건 처음부터 그쪽에서 범인을 못 잡는다고 말한 일이다. 말은 똑바로 하지 빙빙 돌려서 말했다. 사람 열받게.
어차피 처벌이 없는 거라면, 난 그냥 싸돌아다니다가 처맞은 것뿐이고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묻지 못한다면. 이게 결국은 그간의 세 달 동안 그랬고, 앞으로도 그런 거라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경찰서 내부가 좀 그러면 나와서라도, 어때. 아줌마, 아줌마 딸 있어요? 누군데요? 딸래미는 엄마가 그 짓거리 했던 거 알아요? 왜 그러고 살아요, 아줌마. 좋아요? 그렇게 사는 게?
커피를 다시 시킨 머그잔에서 김이 올라온다. 꽤 뜨겁구나. 그래서, 그래서 뭐? 설령 화상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다 돌아올 거 아니야? 뭐 대수야. 안 그래?
+
그 드라마가 위로되는 점이 하나 있다.
등장인물들이 다 애 같다는 점이다.
다 커서 다 참는 척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어쩌면 그 엄마조차도 그렇다.
다 그렇게 사는구나 싶다. 어쩔 수 없는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