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놀러가고 잘 놀기
나는 그 돌을 그냥 갤러리아 앞 조경수 속에 던졌다. 젖은 바람에 젖은 풀냄새가 함께 불었다. 호수에 버릴까 생각했으나 그럼 맨날 그 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듯한 기분이잖아. 아닌가, 너무 갔나?
어쨌든 그 의미뿐인 걸 쥐고 뛰기가 좀 귀찮았다. 호수 바닥이든 그 조경수 덤불 속이든 내가 손 넣어서 다시 잡아낼 수 없다는 점만은 똑같다고. 그럼 된 거지, 뭐. 홀가분하다.
집에 가면 신규 때 한자공책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찍고서 버려야지. 그 전 병원에서 썼던, 뭔가를 준비할 때 필요한 물품들을 그림까지 그려 놓은 노트는? 아직 좀 놔둬 봐야겠다. 어떤 추억들에는 말이 너무 많았다. 기실 그것도 다 그걸 그렇게 기억하고 싶던 나한테서 비롯한 거지만. 어쨌든, 홀가분한 오프다. 시작이 나쁘지 않다.
퇴근하는데 아침 날씨가 너무 좋았다. 지금이라도 어디로 가는 차표를 끊을까 생각했는데, 집에는 반찬이 많았다. 지지난번에 엄마아빠가 가져다 놓은 감자볶음을 다 먹어야 했다. 옷장 정리를 좀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몸이 별로 안 좋았다. 몸이 안 좋다고 일을 안 나갔나? 아니잖아, 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잔뜩 아픈 배를 잡고서 가방을 메거나 캐리어를 끌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집에 와서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누웠다. 기특했다. 생리가 일주일 늦어졌고 딱 그만큼 더 아팠다. 자고 일어나니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집 앞 투썸에 갔다. 키보드가 연결이 안 됐다. 충전은 다 됐는데, 왜. 몇 년 썼더라, 이거. 5년? 4년? 그만하면 보내줄 때가 됐다. 그 이상이지. 태블릿이 아닌 다이어리에 지출내역을 정리하고 빈 곳에 딱히 쓸데는 없는 메모를 했다.
실컷 자고 카페에 환자처럼 늘어져 앉아 있다 보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비가 그쳐 있었다. 집으로 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엄마아빠는 내가 부탁한 대로 그 메모와 다이어리와 커다란 바인더가 든 박스를 가져다 주었다.
지퍼백, 종이 봉투. 편지, 영수증, 꼬리표, 책갈피, 티켓 같은 것들. 여기저기에 분류해 놓은 것들을 대충 털어 모았다. 고등학생 때의 무슨 검사지와 결과지 같은 것들만 남았다. 그나마 노트 형태들이 나았다. 덮여 있으면 안 보이니까. 무슨 한 맺힌 것처럼 두꺼운 글씨체로 적힌 목표며 할 일들이 상당히 요란해 창피했다. 가져와 달라고 하길 잘한 것 같았다.
신규 때 썼던 한자노트가 나왔다. 환자마다 공통적으로 봐야 할 것들을 일일이 이름을 적고 선을 긋기 귀찮아서 그냥 칸이 열 개로 나뉜 그 공책을 샀었다. 이제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 급박한 글씨들로 잔뜩 엉킨 채 쓰여 있었다. 지금도 병원을 드나드는 애들과 지금은 사라진 애들과 그냥 보통 환자였던, 결국은 괜찮아져서 다시는 볼 일 없는 이름들이 섞여 있었다.
항상 일이 끝나고 집에 와서 정리를 하면 그걸 다 찢어서 버렸는데, 노트라서 그냥 놔둔 모양이었다. 이 쉬운 일들을 이렇게 절박하게 했다니. 어디든 다시 들어가면 이 짓을 또 해야겠구나. 한숨이 나왔다. 아침에 인계 준 그 선생님 언제 들어왔더라? 일 년 아직 안 됐지. 그러게, 아직 정말 모를 때긴 하겠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전남자친구에게서 받은 카카오프렌즈 인형들의 태그가 끝도 없이 나왔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디 바닷가에서 주운 하트 모양 돌, 정말 작은 현무암, 제주도 기념품샵에서 잔뜩 산 온갖 것들의 박스와 상표들, 영수증, 메모, 또 영수증, 메모. 또 선물 받은 갖가지 것들의 잔해. 정말 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들. 딱히 기억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것들을 모아 운동복 차림으로 2층의 분리수거장에 갔다. 봉투를 뒤집어 다 털까 하다가 잡히는 대로 꺼내 던졌다.
닫힌 편지 봉투가 우글우글했다. 입구를 열어 손을 넣어 보니 장미꽃잎을 말린 거였다. 참나. 할 수 있는 짓은 다 했구만.
병원에서 보내 준 것처럼 갖다 놓겠다던 그 한라봉이었나 뭔 택배의 운송장. 작은 카드. 읽고서 잠깐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이건 버리지 말까 했으나, 다른 걸 손에 든 와중에 미끄러져 폐지 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 아니었던 거지.
마저 그냥 다 뒤집어 털으려는데 지폐가 나왔다. 2달러짜리 지폐 다섯 장. 왜 받은 거더라. 지갑 같은 걸 받았나, 그때? 새해라고 줬나? 기억이 안 났다. 돈은, 그래. 돈을 버리긴 좀 그랬다. 그리고 그 제주도 돌도. 이게 그 처음 갔을 때였나 아니면 두 번째 때였나. 나 아니었으면 구태여 여기 안 버려졌을 텐데 좀 불쌍했다. 그래서 러닝밴드 뒤에 그 지폐가 든 비닐을 끼우고 돌은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갔다.
공기가 시원했다. 상쾌하고, 축축하고, 또 축축하고, 풀 냄새가 많이 나고. 예쁜 밤이었다. 건강해서 좋았다. 유치하고 강렬한 2010년대 비스트 노래를 잔뜩 틀고서 달렸다. 헤어지고 비스트 노래 많이 들었는데. 그 사람들 노래라서가 아니라, 원래 간간이만 들었던 걸 그 땐 좀 많이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였다. 흔한 거잖아? 이별도 만남도. 별 것 아니군, 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거의 다 사랑 노래니까, 가사도 잘 들리고. 그래서 적절했다.
어떤 걸 들으면서는 난 이렇게까지 애절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같은 생각도 했다. 아침에 정류장에 서서 안녕 출근행 같은 카톡을 보내는 대신 그들의 노래를 줄창 들었다. 신났다. 딱히 슬퍼할 틈이 없게.
인형들을 다 그 전 본가에 버렸던 게 기억났다. 걔들한테는 잘못이 없으니까 그냥 데리고 있으려 했는데 볼 때마다 좀 찜찜한 기분에 다 버렸다. 원래 카카오프렌즈 자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갔던 모든 관광지나 번화가에 카카오샵이 있었고, 가서 한 번이라도 내가 귀엽다고 하면 그걸 그냥 들어넘길 수 없던 그의 버릇 같은 거였다.
어디 센터 같은 데 갖다 줄걸. 나름 그 중에서도 다 귀엽고 예쁜 것들이었는데. 그 점이 아까웠다.
배가 당기면 다시 걷다가 뛰기를 반복했다. 독하게 아픈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그래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많았다. 그 카드 내용이 뭐였더라, 아까 뭐 때문에 울 뻔했지 생각하다가, 그 아래 적혀 있던 날짜가 떠올랐다. 1월? 사귄 지 두 달도 안 됐을 땐가. 뭐야. 정말이잖아. 그 땐 뭔 말인들 못 해. 그럴 때였네, 그냥.
그 생각이 들자 굳이 그 돌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예쁜 기억들을 모아놓고 싶었던 건 알겠지만 어쨌든 깔끔치 못한 것들이었다. 좋았지, 고마웠지, 이게 그 때였나. 근데 그 땐 어쩌고.. 생각이 길어지는 지난 일들.
그래서 다시 집에 가져가 놓으려던 그 돌을 그냥 버리기로 했다. 뭐, 어떻게 어디에 놔두든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겠지.
후련했다. 기를 쓰고 뭔가를 바라던 기억들, 버리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들을 잔뜩 끌어모아 보존하려 했던 아쉬운 마음. 지금 잘 살고 있으면 됐지, 뭐. 진짜 그게 다잖아. 그런 걸 주고받았을 때, 집에 와서 그걸 오리고 날짜를 써서 모아놨을 때, 두 번 세 번 행복했잖아? 충분했지, 정말.
어느새 쑥쑥 자라 나무를, 하늘을 다 뒤덮은 짙은 나뭇잎들 아래를 지나쳤다. 앞으로 반 년은 이제 호수도 길도 얼 일이 없네? 좋았다. 늘 돌아오던 길의 보도블럭과 도로가 공사 중이었다. 내 또래의 여자들이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그 커다란 트럭 앞에서 신호를 주듯이 서 있었다.
띠띠띠띠 소리가 났고 엄청난 양의 까만 시멘트가 채워져 있었다. 냄새가 매캐했다. 이 시간에? 그치, 이 시간 아니면 힘들지. 돈 벌기 쉽지 않다, 다들.
2천만원을 잃고도 4만원짜리 키링을 사고 싶은 게 제정신일까 생각했다. 입사동기들 단톡에서는 소개팅 얘기가 나왔다. 아는 오빠가 어디 법인 다니는데 우리 나가겠다고 할까?
그 말에 누군가, 아 같이 앉아서 정상인인 척 못 하는데, 하며 웃긴 짤을 보냈다. 데이식스의 강영현을 보면서 감탄하는 사진 같은 거였다. 똑같군. 똑같은가? 스물여덟 일곱 먹고는 인형이나 사도 될지 고민하고 아이돌이나 보고 이러고 살아도 되나 생각하고. 소개팅이라, 회계법인? 멋지구만.
단어만 보면 진짜 어른들의 세계 같은데 나는 항상 그런 걸로부터 너무 멀었다. 진짜로 나는 그 그을린 포차코 키링이나 사도 될지 고민하고 있는데, 사실은 저런 걸 좀 해야 할 때구나. 틀려먹은 거지, 뭐. 근데 그거만으로도 충분했다. 비가 잔뜩 온 5월의 밤이 좀 멋졌기 때문이다. 짙은 냄새에 공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땀에 젖은 비닐에 든 십 달러. 집으로 와서는 평일에 은행 가서 저거나 좀 환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나 사 마셔야지. 망고 요거트 어쩌고 나왔던데 그거나 먹어야지.
샤워를 하고서는 세면대를 박박 닦았다. 놀러가야 하나? 어디든? 됐다. 집 정리나 하고 필요 없는 거 좀 버리지, 뭐. 꼭 어딜 가야 하나. 가고 싶은 데도 없었다. 그냥 이렇게 똑같이 잠깐 나갔다가, 잠이나 좀 자고. 조용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일 년의 절반이 지났다. 반가운 일이다.
훌훌훌훌 시간이 잘 가고 있다.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