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근데 진짜 글렀어요.
글렀다는 생각을 강하게 한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인생 전반에 걸쳐 요즘 진짜 많이 하는 생각이지만.. 정말 확실한 직감 같은 게 드는 것이 있다. 확실한 직감? 이런 앞뒤 안 맞는 말이 어딨어. 여기 있다. 내 안에 있다.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좀 그런 것 같다. 뭐-게? 연애다.
미래의 나야, 보고 있니? 맞았어? 아니면 다행히도 틀렸어?
근데 맞았을 것 같다. 확실한 직감이니까.
종종, 사실 자주, 살면서 나는 한국 어딘가에서 착실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그 분께, 그 사람에게 뜬금없는 감사를 보낸다. 꽤 진심이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했고 몇 달 전에도 했다. 앞으로는 안 하길 바라지만 그런 날은 빨리 오지 않을 것 같다. 어제? 내가 주기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웃어른인 수선생님이 '끝나고 뭐 해, 데이트는 하니?' 라고 물었을 때, 그보다 전에 '남자친구랑 좀 놀러도 가고 그래' 라고 했을 때, 몇 달 전 아빠가 나를 데려다 주며 '엄마랑 백화점 가서 옷 좀 사'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또 수선생님이 '어머, 아버지 이번 달 전역하시지?' 했을 때.
아니, 그것까지 기억하세요? 그럼, 기억하지. 너 그 때 니가 그 전에 시집가야 한다고 그랬었어. 아니. 내가 그런 얘길 수선생님한테는 왜 했을까. 또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떠들다가 끄집어낸 게 분명했다. 오프 필요 없어? 어, 스케줄 다 나오지 않았나요? 아니, 기념식 같은 거 안 하셔? 아. 그건 내년입니다. 어머, 그렇구나. 시간이 좀 있네. 네? 나는 수선생이 이렇게나 나를 세심하게 신경쓰는 줄 몰랐다.
아니지, 이제 와서 무슨 이번 달 오프야. 근무 다 짜 놓은 거 뒤집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당연히 아닐 거고.
결혼, 남자친구 만들어서 해야지. 아하하하. 네, 그렇죠. 근데 일 년만에 그게 되나요, 하하. 되지 왜 안 돼. 나는 우리 그이 만나서 어쩌고.. 그러니까 전역이 어쩌고는 그냥 핑계였다. 스몰토크. 맨날 주제가 똑같은 스몰토크. 죄다 젊은 여자들인 여기서 유독 나한테 그 주제를 꺼내드시는 이유가 있었다. 자승자박이다. 왜 그런 걸 떠들고 다닌거야. 물론 그 땐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 줄 몰랐겠지.
"나 옷 많은데. 알잖아."
"알지, 그만 사고.. 그런 거는."
"그런 거 뭐. 나 다 잘 입어."
"어디 일 있을 때 입고 갈 만한 거 같이 가서 사."
"많아. 아빠 나 봤잖아. 가을겨울에."
"또 시대도 바뀌고 뭐 그렇잖아. 유행도 있고."
"뭘 사라고."
"유행 적당히 타면서 오래 잘 입을 거 사."
그게 뭔 소리야, 라는 말을 어떻게 고칠지 머리를 굴리는데.
"혹시 또 아냐, 좋은 인연이 있을지."
"..아니, 내가 결혼해? 선임 결혼이라니까."
"그래. 그 거기 하객이랑 지인들 다 니 또래일 거 아냐."
하, 진짜.
"모르는 거야. 아빠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 계급장이나마 있을 때 어떻게든 딸래미를 좀 안정적으로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 몇 년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진짜로 안 될 일 같았다. 아빠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옷 바꿔 입고 식장 서성인다고 될 거였으면 진작 했지, 라고는 안 했고 그냥 딴 얘길 했다. 알았어, 근데 저녁 뭐야. 엄마가 닭갈비 했어, 니 먹고 싶다고 해서.
그리고 착잡한 아빠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는 차창 밖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젠 남 결혼식 얘기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면, 쪽팔리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면. 구제해 줘서 고맙다고 생각한다. 진짜로. 정말이다. 글러먹었다는 확신이 드는 요즘에는 더더욱 한다. 아무튼 고마운 건 고마운 거잖아? 하마터면 연애가 영영 미지의 영역인 채로 이런저런 잔소리만 지겹게 듣다가 20대가 끝날 뻔했다.
끝나는 건 상관없는데, 그게 어떤 건지 모르는 상태였으면 내가 이런 말들을 어떤 상태로 듣고 소화시키며 지냈을지 상상이 딱히 안 돼서. 아, 물론 한 번 했다고 다 아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닌 걸 알지만.. 하여간 정말로 그나마도 없었으면 더 견디기 힘들 뻔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알아? 같은 싸움의 도화선을 쓸모없이 만들 필요는 없잖아. 나는 그런 이상한 억하심정을 충분히 가지고도 남았을 사람이라서. 어쨌든 정말 고마운 일이다.
나보다 연애 경험이 확실히 많아서 그랬는지, 살아온 방식이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무슨 꿍꿍이라도 늘 있던 건지. 여하튼 그는 그런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왜 차단해. 나쁘게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차단을 왜 해."
"끝났으니까."
"죽을 때까지 안 볼 거야?"
"응."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삼키고 골랐을 말들을 그냥 했다. 어차피 알아들을 테니까. 알잖아, 무슨 뜻인지.
"그래."
우리는 차 안이나 어디 지하철역 출입구에 서서 싸우는 중이 아니었다. 긴장감 넘치는 그런 전조 상황이 아니었다. 어디더라, 테헤란로 쪽 스타벅스였나. 거기서 그의 고속버스 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포장지로 싼 선물을 전달했다. 어차피 받은 게 더 많았다. 항상. 나 없어도 아프지 말란 뜻이었다. 체온계.
그는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진짜 너답다."
"욕이지, 그거?"
"아니, 진짜.. 너답다."
"필요하잖아. 그건 계속 쓸 수 있어. 나중에도."
그 나중에도, 에는 머지않아 당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튼 잘 쓸 물건이잖아.
"나 진짜 다시 안 볼 거야?"
어떤 부드러운 의미도 감성적인 문장도 더할 수 없는 그 브라운 체온계 박스를 들고 그는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몇 번을 말해야 돼, 라고는 말 못 했다. 그건 싸우자는 뜻이잖아. 오늘까지 싸울 수는 없었다.
"아플 때 열 난다고만 하지 말고, 이거로 봐. 열인지 아닌지. 그리고 병원 가면 되지."
"안 볼 거냐고."
껴안고, 아니. 사랑해, 라고 하기에는 10월 주말의 스타벅스에는 사람이 정말 많고 시끄러웠다.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알고 있었다. 그런 멘트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여기서 그러면 오늘 우리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 끝이 아닌 끝을 또 붙잡고 또 가끔 웃다가 그것보다 자주 싸우고 지겹게도 안 끝날 자학을 쌍으로 하고 있을 거라는 걸. 사랑이라고 부르면서. 근데 나는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사실 당신도 알잖아?
"전화해."
"왜?"
"잘 갔는지, 그런 거."
"알았어."
"차단하지 말고."
"그래."
".."
"근데 진짜 그게 왜 중요한 거야? 어차피 연락 안 할 건데."
"모르지, 몇 년 지나서 마주치면 칼국수나 한 그릇 할지."
"그래."
그는 세종, 조치원, 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돌아봤다. 한 번, 진짜 마지막으로 껴안았다. 고마워, 라고 하면서. 둘 다. 버스에 오른 그를 쳐다봤다. 그는 입모양으로 가, 라고 계속 말했다. 그 날 전화를 했는지, 어떤 카톡을 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아무튼 그게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알아도 모른 척하는,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언젠가 살다가 시야에 들어오면 시선을 돌려 피해야 하는 사이.
마주쳐서 정말 밥을 먹게 된다면 번호 같은 건 여전히 필요 없는 거 아닌가,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일 없는데. 아무튼 그냥 냄새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맨날 그냥 이마트 에브리데이에서 파는 섬유유연제를 썼는데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그건 참 신기한 점이었다. 저렇게 한 번 포옹한 뒤 찢어져 각자 갈 길을 갔으면 정말 아름다운 엔딩이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의 가짜 희망사항에 따라, 번호를 차단하지 않았다.
12월, 1월, 3월.. 이브닝 근무가 끝나고 눈이 언 길을 걸어가는데 전화가 왔고 남은 차팅을 정리하며 세상을 저주하고 있을 때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 짜증이 났지만 무시해 버릴 수 있을 만큼 모질지 못했다. 모질지 못했다? 받아서 어쩌게, 하는 생각을 마음이 이겨내서 전화를 받았고, 울면서 기숙사로 걸어갔다. 또 울면서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이제, 진짜 전화하지 마. 정말 차단할 거야.
그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야? 그럼 뭐, 다 얘기했잖아. 나는 이 짧은 문장들을 잔뜩 울면서 말했다. 우는 건 우는 거였고, 전화를 받은 건 받은 거였고, 우린 끝난 거였다. 나는 단지 미련이라고밖에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그 통화를 하면서도 확인했던 것이다.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왜 오늘이 정말로 마지막 연락이어야 하는지.
사랑해, 해야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속으로 지랄하네, 생각했다. 왜 그러는 거야, 니가 나 찼잖아. 하지만 단지 그건 내가 차여서만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니 감정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야. 제발, 널 아름답게 기억하게 해 줘. 추해. 그 말을 다 하지는 않았고, 나 예쁘게 기억하고 싶어. 연락하지 마, 정말로. 잘 살아, 그리고.
그리고는 어떻게 끊었더라? 정말 마지막으로 온 연락에, 그는 '집 구했어? 이사하느라 힘들었겠네. 볶음밥이나 해서 갖다주려고 했지, 용인 가야 해서.' 라는 카톡을 남겼다. 여전하다, 고 생각했다. 그게 이런 거였을까.
체온계를 내민 나에게 '너답다'고 말할 때의 기분. 그게 미련이든, 당신이라는 사람이 갖는 인간성과 옛정과 경계선을 매정하게 긋지 못하는 그 성정의 혼합이든, 아무튼 나는 그런 느물거리는 것들과 거기서 다시 올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카톡을 마지막으로 모든 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