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이워즈어카
스노클링 도구를 챙겨 떠났던 제주도 어느 해변에서 그는 주차장에 세워둔 렌트카를 타고 나를 떠났다.
막상 들여다본 물속은 그냥 무서웠다. 그걸 들쓴 채 거무죽죽하기만 한 생물들을 별로 보고 싶지도 굳이 그 어중간한 물높이에서 어기적거리며 숨을 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좁고 돌멩이가 많았던 그 스팟 말고 건너편의 해변에 있겠다고 했다. 각자 놀다가 여기서 삼십 분 있다가 보자.
안 돼. 뭐? 그는 어떤 말도 없이 안 된다고 했다. 왜? 너무 자연스러운 답변이라 이유가 궁금했다.
저기 별로 안 멀어. 그냥 앉아서 음악이나 듣다가 올게. 여기 봐, 이거 하려고 온 거잖아. 싫다니까? 무서워. 여기도 해변이잖아. 여기 있어, 돗자리 꺼내 줄게. 아니, 아는데.. 저기가 더 모래가 고와. 저기 걸으면 좋을 것 같은데.
가자,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다.
뭐라고?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아니, 여기 있으라고.
너만 여기 온 거 아냐. 스노클링 해, 난 저기 있겠다니까?
각자 놀겠다는 거잖아. 그럴거면 왜 왔어, 혼자 오지.
그 얘기가 아니잖아. 내가 뭐 하루종일 떨어져 있쟤?
그렇게 혼자 있고 싶으면 오지 말지 그랬어.
아니. 그게 아니잖아.
그럼 여기 있어.
싫다고.
싫어?
그래.
그럼 난 간다.
뭐? 어딜?
그리고 그는 저편에 모아둔 장비들을 챙겨 저벅저벅 걸어갔다. 간다고? 진짜 해보자 이거지. 나는 면허는 있었으나 운전은 할 줄 몰랐고 여기는 외지였다. 걷기만 하면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이 나오는 서울이 아닌, 차 없이 이동하기 힘든 곳. 어디까지 지랄하나 보자. 이렇게 빡쳐서 날 버리고 가겠다고? 또라이 새끼. 그리고 그는 정말 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휴대폰은 도중에 꺼졌다.
내가 택시를 거듭해서 호출하고 있을 때 그 차가 다시 돌아왔다. 자동차 자체를 다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묶인 몸이었다. 좆같았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뭐? 나 혼자 돌아다닐 수 없는 곳으로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안 나왔다. 어쨌든 나는 그가 운전하는 이 차를 타야 이동할 수 있었으므로. 어떤 욕도 아까웠다.
"니가 그래서.."
"뭐라고?"
"그 말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지 안 했어. "
이 씨발새끼가.
몸이 떨려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치졸한 새끼. 이딴 사람이랑 내가 사귀고 있었구나. 너랑 둘이서 여길 왔는데, 그런 나한테 본때 보여준답시고 하는 게 이런 짓이야?
알고 그랬잖아, 일부러 그런 거잖아. 못 참아서 그런 거만은 아니잖아. 나는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었다. 낯선 곳에 나를 그렇게 놔둘 정도로 감정 조절을 못하는 멍청한 놈이면 운전하는 도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일본이었다면? 유럽 어디였다면? 나는 참았다. 정말로.
"닥쳐, 제발. "
"뭐라고? "
"듣기 싫으니까.."
"내릴래?"
"너 진짜 미쳤구나."
".. 말 예쁘게 못 하지?"
씨발. 개씨발새끼. 이런 새끼였다니.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에 모든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일단 나가, 나가서 표 검색해. 갈 거야, 정말?
그는 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 걸지마, 개새끼야. 나는 약했다. 달리는 차 안이 아닌 주택 안에 선 약한 나는 이제야 소리지르고 욕할 수 있었다. 미친새끼야, 너 이런 놈이였냐? 미안해. 비행기 있어? 왜 쳐물어, 왜. 또 데려다 주기라도 하게? 배고프겠다.
제발, 제발 아래층으로 가 줘. 나 너 진짜 죽여버리고 싶거든. 미안해. 정말 미안해. 꺼져, 꺼지라고. 부탁이야.
나는 그의 볶음밥과 유부초밥을 좋아했다. 기계에다가 뭔 방수팩을 넣고 저온조리를 어떻게 해낸 후 구운 스테이크도 맛있었다. 수프가 먹고 싶댔더니 루를 직접 만들어 해 준 그 수프도 맛있었다. 그의 직장 앞에 있는 돈까스집의 돈까스와 그 집 근처 성심당의 돈까스와 오므라이스도 좋았다. 호주에서 워홀을 했다고 했다. 호텔 주방에서 맨날 설거지만 했다? 그랬구나. 그래도 재밌었어, 나중엔 요리도 했어.
그의 집에는 본다이 비치를 크게 프린트한 액자인지 패브릭 포스터인지가 붙어 있었다. 이거 진짜 까르보나라야. 그게 뭔데. 계란을 메인으로 한 거. 어때? 맛있다. 숏파스타로도 해 주면 안 돼? 불면 맛없어, 그냥 여기서 많이 먹어. 평생 해 줄게. 나 다 잘 먹잖아. 불어도 맛있을 것 같은데. 먹고 싶을 것 같아, 가서도? 당연하지. 그럼 이따 해줄게. 면 사러 가자. 냉동실에 넣고 전자렌지 돌려서 먹어, 오래 놔두지 말고.
술이 싫었다. 냄새나고 배만 불렀다. 그러면, 이거지. 그는 보드카를 한 병 사와서 토닉워터를 섞고 라임을 잘라 즙을 뿌렸다. 어때, 괜찮지? 딱이지? 너무 당당한 태도가 어이가 없었지만 정말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응. 딱이지? 너한텐 내가 딱이야. 그래. 그랬다.
가, 가. 안 잡을게. 이거 먹고 가, 대신. 꺼지라고. 다 집어던지는 꼴 보고 싶어? 미안해. 먹어. 먹고 가. 가져가.
유부초밥이 든 그 락앤락을 가져가면 나는 다시 그걸 돌려주기 위해 그를 만나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준비를 다 마치고 그걸 먹었다. 맛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병신같게도. 근데, 연애가 다 이런 걸까? 이렇게 미친 짓을 반복하는 걸까? 나는 그랬다. 나의 그 연애는 그랬다.
답장이 짧아졌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붙이던 애교도 없었다. 뭐가 맛있대, 하고 던지면 여기 그거 맛있어, 이번에 갈까? 하던 실행력이 없어졌다. 그런 데이트 코스를 나한테 대령하라고 던진 말들이 아니었지만 그는 항상 그렇게 적극적이었다. 나도 알았다. 함께하는 게 좋으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인삿말처럼 하던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졌다. 그보다 더 지겹도록 하던 귀엽다는 말도 없었다.
그 모든 지겨운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서로에게 거짓말은 안 했다. 전화해 물었다. 나한테 언제 헤어지자고 할 거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이야, 라는 말을 예상했다. 그는 그렇게 말할 사람이니까. 대답이 없었다. 사카구치 켄타로 팬미팅을 다녀온 날부터 그랬다. 3일간.
고작 3일간의 그 정도 기류가 이상할 정도로 그는 늘 다정하고 세심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나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운전 중에 "저는 평생 그런 사람은 못 되겠네요?" 했다.
아니, 다르죠. 그게 왜 그렇게 가요. 그건 그냥 연예인인데.
그런 분 좋아하시는 거 아니예요? 과학 좋아하고, 수학 잘 하는 사람. 아까 영화 등장인물 같은.
아이, 진짜. 아니, 그걸 기억하세요?
맞네. 아니라고 안 하네.
내가 그 배우를 좋아한다는 걸 듣고서 그가 먼저 보자고 한 영화였다. 개봉한 줄도 몰랐다. 사카구치 켄타로가 로봇 회사의 연구원으로 나왔다. 별로 비중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독서모임에는 카이스트에 적을 뒀던 사람들이 좀 있었고 당장 모임장이 과학 신봉자였다.
그 중 하나가 애들한테 과학지식을 쉽고 재밌게 설명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었다. 나는 그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시기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사귀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독서모임 따위는 제쳐두고 둘이 드라이브나 가고 뭘 먹으러 다니기 전이었다. 그걸 기억한다고? 나는 내가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라고 안 하시네, 진짜. 아, 무슨 말이 그래요. 그건 인간적으로 멋있는 거고요. 안 멋있어요? 그게 멋있구나. 음.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창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꼬시는 것밖에 못 하는데.
나는 뭐라고 했을까, 그래서 저도 꼬셨잖아요. 같은 토 나오는 말을 했을까. 너무 유치했지만 정말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그냥 연예인 나오는 영화 보고, 셀카 보내달라는 말에 팬미팅 가서 환히 웃는 사진이나 보내는 내가 지겨워져서가 아니라, 나의 그런 현실 바깥의 우상과 그럼에도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 일본 배우를, 그 대상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2년을 그렇게 붙어 있고도. 돌고 돌아 원점이었다니. 정말로?
툭하면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 달라고 했고 사랑한다고 했다. 힘들면 관두고 내려와서 나랑 살자고 했다. 제주도에 별장 두고 나이 들면 한적하게 살자고 했다. 너 혼자 있는 시간 필요하니까 방 하나씩 따로 갖자고 했다. 시집 올 때 니가 썼던 일기장 다 가져오라고 했다. 집에서 글 써, 간호사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진짜로. 사고 싶은 거 있어? 뭐 갖고 싶은데? 나 그 태블릿 하루만 빌려줘, 그럼.
나도 돈을 벌고 있었고 그에게 사 달라고 할 만큼 갖고 싶은 건 없었다. 태블릿? 왜? 맨날 뭐 쓰잖아. 별 거 없어. 그러니까, 그 별 거 없는 거 궁금하다구. 다 궁금해.
애교였고 애정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쁘다는 말, 섹시하다는 말, 귀엽다는 말, 궁금하다는 말. 알고 싶다는 말.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참 반갑고 달콤한 말들.
말들은, 문장들은 맥락을 입고 새로운 칼날이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 말마따나, 왜 이러지, 싶은 예민한 나를 베어내 이 맥락에서 떼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 장점들에 말미암아 시작한 관계이니 그 말들의 알맹이를 잘 도려내 보존해야 하는 건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 해, 입 붙었어?언제 헤어지자고 할 거냐니까?
피곤하게 왜 그러느냐는 말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흔하디 흔했으나 이 질긴 연애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시간을 좀 갖자. 눈물이 나려 했다. 지랄하지마. 욕 좀 그만 해. 너 진짜.. 안 나오겠어, 지금?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니가 제일 나쁜 새끼야, 알아? 내가 뭘? 나 피곤하다고. 너 짜증 못 받아준다고. 씨발, 그래. 받아주지 마. 시간이고 나발이고 그냥 헤어지자. 뭐?
못 들었어? 못 들은 척하지 마. 빡치니까. 넌 진짜 말 그렇게밖에 못 하니? 응. 몰랐어? 헤어지자고.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나는 기숙사 침대에서 펑펑 울면서 대답했다. 그래, 헤어져. 헤어지자고. 넌 지금도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 못 하지. 그게 너야. 알겠냐?
후회 안 한다는 거지.
늘 나보다 눈물이 많았고 감성이 너울거리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차가웠다. 나는 그게 잊을 수 없이 아팠고 힘들었다. 외롭게 두지 마? 넌 니 슬픔만 중요하지. 나도 외로워. 니가 뭐가 외로운데? 맨날 혼자 나가서 앉아 있는 건 너야. 니가 외롭다고? 결국 똑같은 엔딩이며 감정이었다. 그에게 가끔, 꽤 자주 전화기 너머에서 우는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좀더 빨리, 진작에, 이 증폭됐으나 익숙하게 아픈 느낌이 되새겨지기 전에 헤어졌어야 했다.
넌 없어? 없냐고. 뭐가. 헤어지자니까? 할 말 없어? 아. 넌 진짜.. 진짜? 진짜 뭐? 정말.. 말해. 내가 뭐?
헤어지자. 고마웠어.
그리고 툭, 전화가 끊겼다. 정말 끝이었다. 연애의 끝.
강남 어딘가에서 매운 뼈찜을 먹었고 그는 똑같이, 귀여운 것들을 지나치지 못한 나에게 이것저것을 잔뜩 사주었다. 이듬해의 귀여운 탁상달력, 누운 호랑이 모양의 키링, 또 뭐였더라.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니었는데. 각자의 삶에 남은 물건들을 돌려주기 위해 만난 거였다.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그는 굳이굳이 왔다.
뭐라도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를 부르던 애칭의 시작점이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포장지로 체온계 박스를 쌌다. 집에 가서 열길 바랐는데 굳이 거기서 뜯었다. 그는 호박 어쩌고 라떼가 든 머그를 잡았던 따뜻한 손을 내 손에 얹었다. 정말 안 볼 거야? 응. 손을 빼지 않고서 나는 가만히 바깥을 바라봤다. 진짜로, 오늘이 끝이니까.
내가 원하는 점을 가진 나와 비슷한 사람일 줄 알았던 그는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책, 재즈, 솔직함.. 또 뭐가 있을까. 사실은 별로 없던 공통점이 그 때는 왜 그리 많았을까. 정말이었는데. 이런 것도 저런 것도 비슷했었는데.
추운 겨울, 시린 손으로 잔뜩 울며 붙들고 있던 퇴근길의 휴대폰 너머에서 그가 떠들었다.
.. 그럼 니가 나 잡았어야지, 안 그래? 내가 잘못했어. 하고.. 응? 맞잖아. 나 너 사랑해, 넌 아냐? 사랑한다고.
나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비틀어 웃었다. 지랄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 때 알았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이래서 헤어졌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고. 내가 바보야? 나 그 정도는 아냐. 너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그 때 그런 거 진심이었잖아.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건 알아. 너 이거, 미련이야.
미련 아니야. 미련이면 안 돼? 나 너 없이 못 살아.
찬바람에 질질 짜면서 느꼈다. 지겹다. 씨발. 존나게 지겹다.
우리는 사랑하긴 했었다. 그렇게 달랐어서 그렇게나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헤어졌던 걸 보면, 상대가 주는 기쁨이나 활력 또는 뭐라든 부를 수 있는 그런 걸 계속 원했던 걸 보면 아무튼 사랑했던 게 맞았다. 그걸 다 감수하고 만났다. 피로감을 참고 얼굴을 봤고 연락을 해댔다. 그리고 끝났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거였다. 서로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좀 자유롭고 싶었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남자친구를 옆에 두고 하얗고 마르고 수학을 잘하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고 화보를 찍는 누군가를 동경하는 어떤 상대를. 유효기간이 끝난 거였다.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이별로 쌓아올린 서사가, 닿지 않을 미래의 약속이 주는 단맛의 시간이 사력을 다한 거였다. 차이를 체감해 서로를 그제야 바로 볼 수 있을 시간이 된 거였다.
한 번의 연애로 나는 도통 늙은 기분이었다. 아빠는 정말로 내년에 군복을 벗는다. 하하. 아빠, 연애를 해야 결혼을 하지. 근데 나는 못 하겠다니까? 이제 내가 상대한테 바라는 건 하나야. 내가 무슨 옷을 어떻게 입고 몇 시에 달리기를 하러 나가든, 그게 어디가 어떻게 붙은 복장인지 신경 안 쓰는 사람. 아이돌 콘서트에 가서 고성을 어떻게 지르고, 노는 날에 혼자 어디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해도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 그러니까 나를 그냥 믿는 사람. 있을까? 없을걸. 나도 모르겠어, 뭘 어떻게 믿어 달라는 건지.
글쎄,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그러려면 나한테 보통 미친놈이 아니어야 할 텐데, 아빠가 찾아 줄래? 수선생님, 찾아 주실래요?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농담이 아냐.
원랜 그런 거였어. 쌩얼 보고도 이쁘다 해 주는 사람, 요리 잘 하는 사람, 안 귀찮아하는 사람, 칠칠맞은 나에게 화내지 않는 사람, 나는 재미없다고 꺼버리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 어르신들한테 잘 하고 친화력 좋은 사람. 생색내지 않는 사람. 내가 무슨 책을 말해도 다 아는 사람. 그런데 모르겠다고. 이제 그런 게 다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난 걔 생김새도 좋아했어, 정말이야.
그래서.. 의미가 없다기보단 연애는, 사람을 너무 돌게 만드는 것 같아. 돌고 돌아 그 사람의 안 그런 면까지 까발려 주는 게 좋긴 한데, 나도 미쳐버리는 것 같아서 못 하겠어.
그래서 글러먹은 것 같다. 헤어진 지 삼 년이 다 되어 가고, 그가 맨날 말했던 것처럼, 넌 금방 다른 남자 만날 거야, 라던 수없이 똑같은 그 예언들이 확실히 다 틀려 가는 이제야 생각한다. 사방에서 결혼이니 연애니 하는 농도가 짙어졌기 때문이다. 나이키 후드티, 조던 후드티, 아디다스 아노락, 냉장고의 보드카, 패딩 부츠, 패딩. 책, 신발들. 네가 본가로 보냈던 과일박스의 운송장들, 어쩌다 남게 된 텀블러와 밀폐용기들. 너를 만나기 위해 엄마아빠에게 쳤던 수많은 거짓말.
기억은 바랬고 그런 것들이 남아 결혼이니 데이트니 하는 말에 괜히 반사됐다. 네 말 틀렸어. 글렀거든. 널 못 잊어서? 당연히 아니고,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이거든. 이제.
잘 지내? 잘 지내겠지. 딴 건 아니고, 정말로, 고맙다고.
정말 어떤 다른 뜻도 없이 고맙다고.
진짜라니까? 정말이야.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