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줄라이 맨
나는 그가 게자리였기 때문에 사귀기로 했다.
정말이다. 진짜로.
한국을 휘감은 혈액형과 MBTI 사이 나에게는 그 성격설의 시기가 한 번 있었다. 고등학생 때인가, 어디 무슨 부교재에서 그런 지문이 나왔는데, 할 건 많았지만 하기 싫고 시간이 없어야 하지만 많았던 반 급우들은 그걸 가지고 한참을 떠들었다. 나 역시 그랬다. 떠들지는 않았고 저런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다 설이라고.. 하면서 집에서 열심히 찾아봤다.
근데, 게자리? 이런 사람이 존재해?
그 즈음에 당시의 나조차도 외면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같은 것에 그게 추가됐다. 게자리인 남자 만나기. 사실 그 때는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짜진짜진짜 쪽팔리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안 짚고 넘어갈 수가 없다.
병원 웨이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독서모임이 열리는 투썸플레이스의 위치를 아주 대놓고 착각해 엉뚱한 곳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다 늦게 카페에 도착했다. 그 날의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다. 읽는 내내 열불이 뻗쳤다. 이런 븅신들의 연대기를 왜 읽어야 하는가, 하면서 놓을 수 없었고 어쨌든 모임 과제니까 읽어야 했다.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못된 성격을 감추지 못하고 상대와 정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고, 감정을 놔주지 못해 서로에게 나쁜 말과 아닌 척하는 암호들을 내던지고 꽂아대는 둘을 공평하게 잔뜩 흉봤다.
그리고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혹시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게 될 수도 있겠다는 흑심이 와장창 다 깨졌다. 그 책이 다 망쳤다. 그런데 어떻게 입을 닥치고 있을 수가 있어, 그런 걸 읽고. 누가 이렇게 격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날 에이씨, 망했다. 싶었다.
어차피 망했기 때문에 나는 모임 내내 모든 책에 대한 감상을 솔직히 말했다. 뭐, 애초에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어린이, 과학 상식, 여행, 취미, 꿈, 우주, 법칙.
그런 모임의 좋은 점은 특정 주제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유추 가능하다는 거였다. 단발성이라면 꾸미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지만, 화자가 한 명인 챕터북처럼, 몇 번을 참여하다 보면 그 사람이 보였다. 서술의 앞뒤가 안 맞는다면? 거짓말이거나 더 흥미로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 아무튼 우리 둘은 꽤 꾸준히 출석했고 그 모임의 본분대로 책을 읽어 와서 감상을 잘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호감이 있나? 라고 생각했다. 느껴지는 것 같긴 했지만 뭐, 딱 잡아낼 건덕지는 없었다. 없는 걸 끄집어낼 수도 없고 만들어낼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는 사귀기 직전의 사람들이 되었다. 눈치를 어떻게 채고 뭐 그럴 것도 없이 나를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뭔가를 결제해 적립을 위해 생년월일을 입력하는 때였다. 7월? 아, 7월. 여행을 좋아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불륜이나 진정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선을 넘어 까부는 타입도 아니었으며 치고 빠지기를 잘하고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으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거기다 7월생이라.
지금 생각하면 몇 개를 빼고는 그냥 직장 생활을 좀 오래 한 사람이면 충분히 습득 가능한 것들이었으나 당시의 내 눈에는 거기까지는 안 보였다. 보였다고 해도.. 못 본 척 했겠지.
게자리, 나를 좋아하고, 나는 백수였고, 연애를 하다가 수틀리면 그냥 웨이팅이 끝난 병원으로 가면 됐다.
얼마나 가겠어, 생각했다. 일천한 연애경험. 딱히 바쁘지 않은 생활. 사실 전혀 안 바쁜 하루. 일상이 어떻게 흔들리든 아무 상관 없는 지금 시기. 여러 모로 보아 나를 절대 상처 줄 수 없을 상대이며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 사람과 사귀기로 했다.
그는 요리와 캠핑과 여행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5분, 10분, 반나절, 3일을 위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조율하고 변수를 감당하고 돈과 시간을 잔뜩 베팅해야 하는 일들. 좋은 건 알지만 도무지 내가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발벗고 나서서 했다. 나는 그가 그런 사람인 줄은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그 여정을 함께하니 신기했다.
우리는 내가 발령을 받아 분당으로 간 후에도 헤어지지 않았다. 그는 기숙사로 본인이 한 반찬들이나 성심당 샌드위치와 롤케이크같은 것들을 착실히도 가져다 주었다. 오프가 길면 차를 끌고 데리러 왔다.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피곤하잖아, 하면 이렇게 너랑 있는 게 좋으니까, 이거 희생 같은 거 아니야, 라고 했다. 지금 쓰니 참 간지러운 말들이나 당시에는 그렇게 간지럽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느꼈으니까.
누가 뭘 얼마나 냈는지, 연락을 왜 안 하는지, 이번에는 누가 내려가고 올라오니 하는 걸로 싸우지 않았다. 뭐, 둘다 직장인이었으니 가능한 것도 있었겠지만 대충 알고는 있었다. 쓸데없이 계산하려 드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나는 그가 이불 같다고 느꼈다. 근무가 끝나면 좁아터진 내 기숙사 아파트의 방으로 들어와 누워 있던 그 이층침대의 이불. 내가 돌아올 곳, 편한 곳, 부드럽고 따뜻한 곳, 그리고..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는 곳. 그걸 반 년이 되었을 때쯤 느꼈다. 이제 보니 나는 감이 나쁘지는 않았던 사람인 것 같다.
나한테는 나풀거리는 짧은 원피스가 많았다. 엉덩이만 겨우 가리는 길이의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통상 무릎 위로 반 뼘쯤 올라오는 미니원피스들. 나는 그 옷들에 닥터마틴들을 신고 싶어서 거의 일생 내내 다이어트를 했고 오프를 기다렸다. 나는 교대근무를 했고 그는 아니었고 지역도 달랐다. 모든 오프를 그와 보낼 수 없었다.
귀여운 얼굴 좀 보자, 하면 별로 찍고 싶지 않은 셀카를 보내야 했다. 거기에 보이는 옷차림. 오늘 이쁜 거 입었네, 어디 나가? 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그런 기류를 귀신같이 읽어냈다. 속된 말로? 이 새끼 또 왜 이래, 생각했다. 모른 척했다. 응, 나 오늘 카페 가서 할 일 할 거야. 아, 그렇게 이쁘게 입고? 원피스 입었어? 피할 수 없었으나 끝까지 모른 척했다. 응, 지난번에 대전에서도 입었잖아.
아, 누가 이쁘다고 말 걸어도 따라가면 안 돼.
카톡창에 그 말이 찍히는 게 내가 다 창피했다. 진짜 '여기, 내 얼굴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뚱한 얼굴 아래에 달린 그 문장들. 이게 대체 뭐 하는 세상일까, 생각했다. 그래, 너와 나의 세상이지. 제발 그 누구도 몰랐으면 하는 둘의 세상.
내가 뭐 절세의 미인이거나 그 비슷한 거기라도 했으면, 혹은 그 셀카의 그 얼굴이라도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나는 정말로 그런 말들과 거리가 멀었다.
니 여친 니 눈에나 이쁘지, 라고는 할 수 없잖아. 카톡창에 남은 건, 아. 이젠 이런 데에 보낼 셀카도 미리 찍어놔야 하는 건가? 그냥 티셔츠나 입은 사진으로, 를 열심히 생각하는 나뿐이었다. 무슨 말로 응수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아이고, 두야.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 바지 안 입으면 안 돼? 너무 섹시하잖아. 야해. 오늘은 오는 길에 누가 말 안 걸었어? 그냥 집에 있지, 꼭 가야 돼? 나랑 가자. 그거 말고 이거 입자. 추워. 걘 누군데? 왜 지금 전화해? 당연히 믿지. 근데 오늘 너무 예쁘잖아. 다른 사람을 못 믿는 건데, 내가 너 안 믿으면 누굴 믿어.
나에게도 눈이 있었다. 누차 말하지만 내가 정말 그 정도였다면 그냥 '그래, 내가 좀 그렇긴 해'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정도로 멍청하거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넘치거나 나를 사랑한다는 걸 위시하려는 그에게 눈이 멀지는 않았다. 아니. 멀었던 거일지도? 아무튼 그래도 그만큼 만났잖아. 다 알고도 2년을 만났다고.
속으로 끓어오르는 온갖 말들을 삼켰다. 우리 아빠도 뭐라 안 하는 걸 왜 니가 뭐라고 하니, 엄마도 뭐라 안 하는 걸 왜 니가 난리야. 야, 내가 입고 싶은 것도 못 입니? 아니, 니 여친 그 정도 아니라고, 너도 알잖아. 장난해? 나 이거 입으려고 살 뺐어, 니가 뭐 보태줬니? 제발.
나 맨날 서점 아니면 그냥 카페 처박혀서 일기나 쓰고 있는 거 알잖아. 친구랑 있다니까, 걔 알잖아. 빵 시켜놓고 사는 얘기 하는데 자꾸 전화는 왜 해. 아직도 두 시간 전에 알려준 거기야. 지금 바쁠 때 아니야? 한참 은행 창구 붐빈다며.
제발.. 내 친구 너 다 알잖아. 걔는, 그래. 걔는. 그렇게 걱정되면 그 남자애 사진 보여줘? 학과 애라고. 내가 다니는 병원에 지 친구 있다고 전화한 거야. 그 정도도 못 해? 나 알잖아. 귀찮아서 남사친 같은 거 못 둬, 진짜. 지인이라고, 지인.
참았던 말들은 피로가 쌓이고 감정이 질척이면 불꽃놀이처럼 장렬하게 터져나왔다. 소화되지 못하고 속에 자꾸 고였기 때문이다. 잊고 싶었는데 같은 일은 반복됐다. 양상이 다를 뿐 색깔은 너무나 똑같아서 지긋지긋했다. 그 땐 지긋지긋한 줄 몰랐으나 지금 보니 그 때도 지긋지긋한 게 맞았다.
왜 니가 뭐라고 해, 엄마아빠도 뭐라고 안 하는데, 야. 너만 피곤해? 너 지금 내일 데이 출근이라 그런 거잖아. 뭐라고? 나도 피곤해. 아, 피곤하구나. 니가 나보다 피곤해? 넌 퇴근하고 운동하고 친구도 만났잖아. 야, 우리 이번 주에 만나지 말자. 맘대로 해. 그래, 또 짧은 거나 입고 돌아다녀, 너 좋아하잖아. 너 미쳤어? 미쳤냐니, 넌 남자친구한테 그게 할 말이야? 뭐 어때야 되는데, 그런 넌?
너 이제 나 없어도 괜찮지? 적응 끝났잖아. 그냥 거기 있고 싶잖아. 나 필요 없잖아. 니 성질 더러운 선배들 욕하고 싶을 때 나한테 전화하잖아. 그래. 미안해. 미안하다고. 미안해? 많이? 미안해. 맞아. 너도 피곤했을 텐데. 사랑해. 알아. 진짜 미안해. 많이 힘들었어, 오늘? 누가 또 뭐라고 했어?
이 환장하겠는 흐름. 어느 모로 보나 논리적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이 롤러코스터같은 흐름. 다 틀린 말도 아니고 맞는 말도 아니지만 아무튼 사랑한다는 마무리. 매일이 그랬다.
우리는 그렇게 죽을 듯이 싸우고 다시 보고 싸우고 다시 보고를 비정상적으로 반복했다. 그게 그 연애였다. 쌍방의 비효율적인 행동들 가운데 아직 남은 애정.
7월에 태어난 게자리인 그와 나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