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싶던 옷들
늘 그런 것들에 대해 쓰긴 했지만 이건 더 그렇다.
별것 아니고 진짜진짜 사소한 것들.
버릴까, 말까 고민한다. 뭘? 수납박스 하나를 가득 채운 일기장과 다이어리와 노트들.
어릴 때 미술학원을 다니며 채웠던 스케치북의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은 후 분리수거장에 던졌다. 파일들에 끼워둔 상장들도 마찬가지다. 몇 권의 커다란 스케치북과 클리어파일들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사실 이사할 집이 더 넓었기 때문에 굳이 버릴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싸들고 다닐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난 여기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걸?
아빠는 조금 고민하다가, 니가 버리고 싶으면 버려, 했다. 그래, 그렇다고 저게 무슨 심심할 때 펴보는 만화책 같은 것도 아니잖아. 그 사진들은 휴대폰이 아닌 태블릿에 잔뜩 들어 있다. 나름 그래도, 일부러 그 쪽으로 다 옮겼다.
나는 이제 부모님이 사는 집 같은 곳에서 살 수 없다. 내가 혼자 돈을 벌며 사는 한 꽤 긴 세월 동안 그럴 것이다. 그런 널널한 공간이 남아도는 집에 당분간은, 사실 꽤 긴 시간 다시는 살 일이 없다. 내 월급으로 구한 곳에 계속 살 테니까.
오피스텔 계약을 일 년 연장했다. 지난 시간의 잔해들이 본가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면 했다.
엄마아빠가 정말 수도권을 떠나면 그 엄청난 무게의 종이 뭉치들은 택배를 부치는 것도 가지고 오는 것도 일인 짐덩어리가 된다. 교보문고, 다이소, 또 교보문고, 영풍문고, 아트박스, 또 교보문고. 비싸거나 안 비싼 다이어리들이며 노트를 그렇게나 샀다. 한 번 날을 잡아 쓴 페이지만 다 뜯어서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왕 커다란 바인더에 다 정리했었다. 그래도 그 부피가 감당이 안 됐다. 뭐 저렇게 남겨두고 털어내고 싶던 게 많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당장도 그러고 있어서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무슨 가치가 있나? 글쎄, 말했듯 털어내고 싶던 것이 절반이라 안 펴보는 게 심신에 이롭다. 가지고 있어 봐야 정말 쓸모가 없는걸.
그나마 좀 덜 어두웠던 시기의, 그러니까 조금은 덜 낯부끄러울 시기의 것들을 펴 보면.. 질릴 정도로 뻔하다. 입고 싶은 옷,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것. 나는 이제 그렇게까지 입고 싶은 게 없다. 잔뜩, 정말 잔뜩 사놓은 옷들이나 잘 입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살도 그래서 안 쪄야 하는 게 맞다. 있는 거 입으려면 몸 부피도 똑같아야 하잖아. 과장도 근검절약을 위한 마음가짐도 아니다. 나는 정말 옷이 많으니까. 신발도 많으니까.
요는, 그 노트에 적어놓은 목표나 욕망들이 더 이상 나를 홀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 가지고 있어야 할까.
고2 때 썼던 노트에는 그런 것도 있다. 하다하다 딴 생각을 할 게 그렇게도 없었는지 그 교실에 앉아 있던 모든 애들의 이름을 적었다. 앉은 배치대로. 그 페이지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십 년이 지났다. 나름 유물이다. 그건 소장가치가 있다.
고등학교는 이제 이 일상과 아예 분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교복, 독서실, 수능특강, 야자, 동아리, 중학생 때 좋아하던 남자애, 자습실, 기출, 숨마쿰라우데, 특별반. 뭐 그런 것들.
그 이후의 노트들이 쓰인 배경은 아주 특별하지는 않다. 신입생, 2학년, 3학년, 4학년. 화랑대, 동대문, 여기.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나 대전을 뜨길 원했던 학생 때의 내게 보여준다면 눈을 반짝였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볼래? 어쨌든 이렇게 부대끼면서 살아. 바라던 대로 됐니? 아, 영국 못 갔어. 아무튼 거기 아니고 한국이야.
서울과 조금 가까운 수도권, 서울, 먼 수도권, 병원, 간호, 간호학과, 화장, 월급, 장학금. 사복, 친구, 수업, 동기, 카페, 친구, 생일선물, 지하철, 어떤 동네들, 또 동네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인생네컷을 위시한 포토부스들이 잔뜩 생겼고 나는 월급을 받아 크고 작은 태블릿을 샀다.
그보다 이르게 나는 각종 비싼 양장노트에 대한 욕망에 통달한 후 속지만 채워 넣으면 되는 바인더로 자리를 옮겼다.. 고 하고 싶으나 지금 쓰는 일기장 외에 다른 노트는 또 양장이다. 작년에 친구와 행궁동에 갔을 때 샀다.
아. 어떡하냐. 이유는 명확하다. 다 지났고, 나는 그냥 여기 지금 이 자리에서 잘 지낸다. 그 노트에 내가 더 이상 붙들어야 하는 마음 같은 것은 없어 보이며, 앞으로도 내가 살 곳은 그렇게 넓지 않을 수 있고, 꼴에 나는 그래도 정리된 공간을 원한다는 것. 깔끔한 공간을 원한다면 선행조건은 둘 중 하나다. 넓거나, 물건이 없거나.
전자는 탈락이나 후자는 시도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본가에 그걸 더 놔두기도 그렇다. 아오, 챙피해. 아이고, 남사스러워.
그런데도 나는 고민한다. 이렇게 줄줄이 아닌 척하면서 버리면 안 될 사연들을 다시 풀어냈잖아. 어떡하지. 진짜. 별 것도 아닌 그것들을 그렇게나 원하던 내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귀여운 마음가짐만으로 가지고 있기엔 쟤들은 너무 무겁단 말이지. 여하간 당장의 나는 잘 지내잖아?
누가 다 태워 줬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음. 나한테도 비밀로 하고 다 갖다 버릴까, 정말?
정말 모르겠어. 정말로.
나는 이상하게 대쪽 같은 사람이라, 그럼 올해 쓰는 이 다이어리들도, 5년짜리 일기장도 다 버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죽을 날 받아놓고 사는 것도 아니고, 아니. 삶 자체가 그렇긴 한데. 굳이 그걸 매일 떠올리는 건.. 그렇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어떡하지. 진짜.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