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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지금은

by 이븐도





한 층에 여섯 더미. 한 더미에 어림잡아 열 권. 책장에는 스무 권쯤이 더 있겠지. 못해도 백 권이 넘을 남의 나라 책들. 로렌 차일드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엽서, 하이라이트 멤버들이 뒷모습을 보이고 선 공연장 무대를 잡은 파란색 포스터, 세계 여러 서점들을 찍은 엽서, 어느 도시 낯선 아파트를 찍은 사진, 초록 소파에 찰리 브라운이 앉은 형태의 달력, 몬스터 주식회사의 설리가 문을 빠끔히 연 하늘색 포스터.


다 까맣거나, 조금 까맣거나 흐리게 까만, 그리고 그만큼 많은 파란 옷들이 걸린 행거, 몇십 켤레는 될 신발, 스무 벌에 달할 잠옷들, 그보다 더 많은 인형 키링이 든 박스, 엄마가 채워 주고 간 냉장고, 아마 가능한 모든 농도의 청색을 담은 갖가지 핏의 청바지들, 돌고 돌아 찾아낸, 얼굴에 맞는 화장품들.




시작부터 끝까지 근무가 안 바빴다. 원래 이런 날에는 응급오프를 줬다고 한다. 오늘은 환자가 없으니 넌 나오지 마라는 연락을 출근하는 길에도 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이 이제는 생기지 않는다. 병원 노조에서 그러지 못하도록 몇 년 전부터 막았다고 했다. 잠이 올 정도로 조용한 휴일 이브닝이었다. 호사스러웠다.


다년간 블리스텍스 립밤만 바르면 입술이 더 갈갈이 마르고 바짝 찢어질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게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바이오더마 립밤이 발라도 발라도 나에게는 효과가 없었던 게 맞았던 것도 알았다. 집으로 와서 두 가지를 다 버렸다.






엄마아빠는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본가에 있던 내 책들을 다 가져와 달라고 했다. 아빠는 커다란 박스를 오피스텔 안으로 들여놓고, 또 들여놓고, 또 들여놓았다. 세 박스나 된다고? 엄마아빠가 내게 떨궈놓고 간 작은 책장에 책을 다 쌓아 놓았다. 둥근 테이블은 접어서 그 책장 뒤에 세웠다. 물건은 잔뜩 늘었는데, 1층 공간은 더 넓어진 것 같았다. 엄마아빠는 열 벌이 넘을 내 겨울 외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퇴근 후 배고픈 상태로 방으로 돌아왔다. 철제 테이블이 있던 자리를 알록달록한 종이 뭉치들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가진 게 많았다. 언제든 올 수 있는 나의 작은 세계였다. 좋아하는 것들이 붙어있고, 무엇이든 단수가 아닌 절대 복수로 존재하고,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지 일 년이 지났는데, 오늘 같은 평화는 처음 느꼈다. 벅차오름도 번쩍이는 기쁨도 아닌 덤덤함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풍요 속의 조용함.






나는 나만이 누워 있는 이 집에서도 귀마개를 끼고서야 잠에 들었고, 잔뜩 애정을 가지고 모았던 것도 한순간에 갖다 버릴 때가 있었다. 언젠가는 이 많은 것들 역시 그렇게 될지 몰랐다. 영어로 쓰인 책, 인형들, 신발, 니트, 바지, 또 신발, 책, 신발, 책. 나는 어쩌면 화장품 하나를 사더라도 잔뜩 긴장해 베팅하고 모험할 기회비용을 감수할 해외생활을 원했던 게 아닐지도 몰랐다. 매 순간이 남과의 부대낌이며 감당 비슷한 것일 그 생활을 원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것을 원했다고 하기에는 나는 이 작은 집을 너무 많은 것들로, 내가 하나같이 원했던 것들로 가득히도 채워 놓았다. 그 책들이 잔뜩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알 것 같았다. 내가 꽤나 많이 좋아했음을. 그렇게 좋아한 것들의 정체를.




십 년 전쯤에 사춘기가 끝났고 이제 다음 단계가 온 걸지도 몰랐다. 기실 아무 일도 없이, 감정에 동심원만 그리고 조용히 지나갈 흐름. 아니면 어떤 변곡점. 아마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이사를 한 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이 공간에서 한 더미를 묵직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겠어.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엄마가 싸 온 것으로 점심을 먹다 말했다. 엄마, 나 삼 년 이만하면 잘 다닌 거 아니야? 엄마는 그랬다. 못 다닐 거 뭐 있냐, 편하니까 잘 댕겼지. 잘 좀 해. 라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못할 짓이었다면 나는 뭔가를 사모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정말로 이 모든 걸 정리해 어딘가로 떠났겠지.






잠이 온다. 졸리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많은 것들과 함께 내 인생의 키 비슷한 걸 잡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잠이 온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달라지긴 했다는 걸 이제야 실감한다. 아,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정말로. 내가 뭔가를 강하게 동경하거나 처절하게 바라거나 도망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구나.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는 감히 그런 위험한 생각을 했다. 안도감일지 지독한 매너리즘에 적응해 버린 것일지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다. 쫓지 않아도, 달음쳐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느꼈더니 곧이어 그럼 뭘 해야 하지, 가 떠올랐다.




그러게, 나는 뭘 해야 할까. 이대로 있으면, 이대로 살면 망해버리는 걸까. 나는 정말 그렇게 멍청한 걸까. 무슨 시험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부족함을 얼마나 느껴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고 싶은 걸까? 질식할 것처럼 평화롭다.

미래의 내게 묻고 싶다. 평화로움은, 진실로 괜찮다는 그 안온함은 언제 어떻게 느껴도 되는 거냐고. 그런 안도감을 느낄 자격은 언제 주어지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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