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가 기운이 좀 맑아요^^
며칠간 이런저런 일을 쳐내는 것을 그녀는 온라인으로 잔뜩 도왔다. 그러면서, 그랬다. 누구누구 님은 필요한 정보만 주는 연습을 좀 하셔야겠다고. 몇 달, 아니. 이제 거의 일 년을 알고 지낸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티켓을 양도받거나 서로의 일상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하는 모습과 이 일을 거치며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다행인 거지만, 사실 그 뮤지컬에 조금 늦을 뻔한 것도 그렇게 사정을 다 말씀해주실 필요는 없었다고 했다.
그 날 베르테르 뮤지컬을 함께 보고, 아직도 정말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 되어 수사를 받은 입장인 줄 알던 내가 육성으로 말한 전말을 들은 그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일해서 모은 전 재산을 다 털렸을지도 모른다.
원래 뮤지컬을 같이 보기 위해 낸 오프였다. 그녀는 그 날 나를 신도림에서 만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후 그다음날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아니. 사실은 그녀가 기차를 탄 후 미친 듯이 한 연락을 보기 전까지는 정말로 내가 보이스피싱을 당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걸 카톡으로 언급한 그녀를 원망하기까지 했으니까.
어쨌든 그건 피싱이었고, 경찰은 전화를 받은 후 십 분도 되지 않아 집으로 도착했다. 나는 그 날 데이 근무 후 경찰서로 가 사건을 등록했다.
그렇지. 그녀의 말이 그 때는 가슴이 아팠다. 진짜, 아렸다.
정말로 맞는 말 같아서. 맞긴 했다. 지당했다.
돌아보니, 나는 정말로 많은 것에 걸려들 뻔했다. 이건 그 일들을 늘어놓고 내게 경각심을 더 주기 위한 메모이다.
첫 번째는 고등학생 때였다.
고2 때였나. 독서실에서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상가가 모인 그 동네에는 광장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기서 두꺼운 전공책을 들고 서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어 학생이냐고 물었고, 진로상담이 어쩌고 하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 때 착했다. 남의 말을 끊을 줄 몰랐고 신천지니 뭐니 하는 것도 잘 몰랐다. 그냥 교회 모임인지 다른 수상쩍은 단체인지 여하간 그녀가 말하는 모임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그 인근의 국립대 수학과 학생이며, 나 같은 학생 때는 백설기를 몇 개씩 들고 가서 학교에서 그걸 먹으며 공부했다는 사실-과연 사실일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며칠이 지나 쭈꾸미볶음과 고르곤졸라 피자를 얻어먹은 후 그녀가 오라고 했던 모임에는 가지 않았다. 밥까지는 황송한 일이었지만, 사실은 그것도 도무지 거절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계속 말을 이어내다가 상황이 그렇게까지 흘러간 걸 막지 못한 거였다.
이어, 나는 이미 진학할 학과를 정했고 수능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입장인데 또래들이 모여 나누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다는 무적의 부모님 핑계를 댔다. 당연하지만 그녀와 그 이후로는 더 연락한 일이 없다.
두 번째는 건대입구역에서였다. 신입생이던 3월, 나는 타 대학에 입학한 동창과 미녀와 야수 실사 영화를 보기 위해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 주변을 구경하기 위해 약속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거기 도착했다. 내가 그 때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건, 강의시간 중간에 필요도 없는 책을 사라며 들어오는 잡상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그런 거였다.
나는 건국대 학생이 아니었고 그녀는 얼굴이 반들반들한 그런 사기꾼 같은 인상도 아니었다. 그냥, 동네 슈퍼에서 대파를 고르고 있을 것 같은 복장과 인상의 아줌마였다. 엄마보다 약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사람. 그녀는 내게 길을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나는 나도 모르는 주제에 아마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던 것 같다. 스타시티 앞 정류장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이제는 너무 흔해빠져 이걸 낚이는 사람이 있나, 싶은.. 기운이 어쩌고 맑고 조상신이 어쩌고 공덕이 저떻고 부모의 덕이 어쩌고 하는 레퍼토리. 나는 장장 사십 분 정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상하고 안 이상한 걸 떠나서, 나는 약속시간이 다가오는 중이고 내가 줄 도움은 끝났는데 대체 이 아줌마는 언제까지 이야기를 하려나 생각하며 공손히 도망갈 타이밍을 골랐다. 공덕을 어떻게 드려야 하냐는 말에, 그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갖가지 추상적인 것들을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 굳이 왜..? 그들에게 드릴 공덕 같은 게 있으면 당시 요양병원에 누워 있던 할머니를 유동식이라도 사서 찾아뵙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얼굴도 모르는 그들에게 뭘 드린다고? 그녀는 내가 못 알아듣자, 돈, 아니면 쌀이요, 라고 했다.
그랬다. 나는 그걸 한 시간이나 듣고서야 알았다. 그녀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이건 다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낭비한 시간이 그제야 아까웠다. 친구에게 엄청나게 미안해졌고 지금 낭비한 시간에 그녀에게 사죄의 의미로 사야 할 커피값이나 밥값이 더해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확 상했고 정신이 들었다. 그 길로 나는 감사했습니다, 하고 바로 뒤쪽에 있던 영화관으로 잔뜩 달렸다.
감사하기는, 씨. 근데 그때 진짜 그렇게 말했다.
세 번째는, 비교적 최근.
이전 병원을 떠나기 위해 다시 자소서를 쓸 때였다. 그 주변의 카페는 항상 인근의 외대와 경희대 등등의 학생들로 만석이었다. 어차피 다른 동네로 나와야 했다. 그 병원이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광화문이 가깝다는 거였다. 그 날 나는 할리스에서 작년의 자소서 항목과 답들을 모으고 있었다. 3층짜리 카페였고, 주중의 저녁이라 사람이 띄엄띄엄 있었다.
한 쪽에서 여자 둘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태블릿을 정리하고 나가려 할 때, 그러니까 아마 한화 사옥을 보며 멍청히 앉아 있었을 때 둘 중 하나가 다가왔다. 21년도. MBTI가 사람들 사이에서 슬슬 유행하기 시작한 때였다. MBTI였나 무슨 성격 검사였나, 자료를 만드는 중인데 테스트 한 번 해봐주실 수 있냐고 했다. 그들의 패드에 답을 체크하는 동안, 굳이 안 해도 되는 스몰토크를 또 거절하지 못해서 했다. 그래. 사실은 거절을 못해서라기보다는 정말 아무런 경계심이 없었다. 그냥 직장인들 같은 차림새와 외모였다. 그냥 직장인? 그럼, 그냥 직장인 안 같은 건 뭔데?이래서,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란 거야.
뭐 하고 계셨냐, 아. 학생이시냐, 직장인이시냐, 쉬는 날이시냐, 어디 사시냐 등등, 대답만 할 수 없으니 열심히 다시 물어 주기도 하면서 테스트를 마쳤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를 말하면서, 다른 검사도 해보실 의향이 있냐. 잘 맞으시는 것 같은데 혹시 더 도와주실 수 있냐, 라고 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원래 선약이 잡혀 있던 날의 앞 시간에 그들과 신촌에서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인생이 재미없고 고달팠던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또 저길 찾아갔던 걸 이해할 수 없다. 그냥 바쁘다고 하면 될 걸.
결론은 뭐, 신촌 슈펜인가 스파오 건물 앞 골목의 하얀 카페에서 만나서 음양의 기운이 어떻고 하늘의 기운과 흙의 에너지가 저떻고 하는 소리를 한 시간 내내 듣다가 나왔던 것 같다. 한 시간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확실한 건 그 날 카페 자리를 돌아 나오는 길에 그 여자분의 연락처를 모조리 차단했다는 것. 그걸 왜 그제서야 했을까?
나는 정말 내 성격이 그렇게나 궁금했을까? 대체 왜? 그래. 4년 전이니까 봐주자. 정말.
크게 시간을 할애했던 건 이 정도다. 작게는 더 많다. 일기장이나 노트북의 메모를 뒤져 보면 줄줄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숏컷을 하고 짧은 바지를 입고 워커를 신고 있던 나에게 '속에 남자가 있네, 무슨 과예요. 대학생?' 하던, 눈을 뜨고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말을 걸던 아줌마. '저기, 혹시 노원초등학교 나오셨어요?' 하던 남자. 종로, 동대문, 교보문고. 또 교보문고.
서가를 열심히 쳐다보던 나에게 '어떤 과 다니세요? 저희가 학과별 학생들 인터뷰 자료를 만들고 있어서요.' 하던 젊은 여자 둘 - 아직 기억나는 게 이 둘은 정말 깔끔한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그런 모양을 흉내낸 게 아닌.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그 때의 내 눈에는 그랬다 - 나는 정말 성심성의껏은 아니더라도 대충이라도 대답해 주려 했는데 연하늘색 셔츠에 남색 줄무늬 가디건을 입은 직원에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라며 제지당했다.
정말 쪽팔린 건 나는 그 때 진짜로 기분이 나빴다는 점이다. 대답해주려 했는데 왜 끼어들어서 저러지, 라고 생각했다.
정말 대체 뭐가 문제였을런지. 참나.
모르지. 지금에서야 그 원인을 파고든들 뭐가 달라지는가. 아무튼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해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종류든.
결과가 나를 퍽 치고 갔을 때야 정신이 드는 일이 많다. 사람에 관련된 일이 특히 그렇다. 보이스피싱도 특히 그렇지, 아닌가? 난 그렇게 느낀다.
우스운 점은, 그 날 이후 일처리를 위해 갔던 모든 곳에서 '국가기관 사칭 보이스피싱 어쩌고..' 문구를 봤다는 것이다. 관공서와 은행은 당연하고 엄마 아빠를 보낸 후 뭔가를 사러 갔던 그 날의 다이소 무인계산대에서도. 그러니까 늘상 갔던 그 모든 장소에서 '이딴 데 속지 마쇼' 하며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제정신 붙들어야겠다. 이 험난한 세상 이 멍청한 나와 함께하려면 그렇게 해야겠다. 근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는 확실하다.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 것, 아니. 일언반구도 섞지 말 것. 이 모든 일들이 구르고 굴러 나의 금전적 손실과 정신상해를 야기한 거나 다름없다고.
에휴, 나쁜 새끼들.
개새끼들.
+
이걸 저장하고 돌아가던 지하철역 앞에서 한 여자가 또 내게 눈맞춤을 시도했다. 난 그 일족에게 늘 구미가 당기는 외양을 가지고 있나 봐. 10년째 변하지를 않네, 열받게. 왜 그러고 사시냐고는 당연히 말 안 했다. 그 얼굴로, 그 젊음으로 왜 그러고 사세요. 저기요, 제가 만만해요?
그런가보지, 만만하지.
왜 날 좀 착하게 봤으면 하는 병원에선 큰소리가 나면 다 난 줄 알고 이딴 데서는 날 맹탕으로 볼까. 씨.
인생이 코미디다. 2천만원짜리 출연료를 삥땅친 코미디.
다 죽어라.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