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에게
사랑해.
사. 랑. 해.
한 음절씩을 떼어 발음할 때는 알 수 없는 부드러움.
사랑한다는 세 글자가 넘어가는 내 입 천장이, 혀가, 스치는 윗니 뒤쪽이 이렇게 연하고 매끄럽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아빠는 집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정을 시작하는 딸에게 작은 꾸러미를 건넨다. 손잡이가 노란 것을 가리키며 말한다. 특히 날카로우니 조심하라고, 항상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아무렇게나 꺼내놓지 말라고. 나는 그것을 받들어 반 년을 건강히 살았다. 살갗보다 탄탄한 토마토를 가르고 또 갈라 맛없음을 참으며 먹었다.
이케아에 파는 칼 세트 얘기다. 손잡이가 초록, 노랑, 흰색으로 된 빵칼과 과일칼과 그 갈고리같이 날이 휜 칼이 하나씩 들어 있다. 손잡이가 노란 그 휜 칼이 가장 잘 든다. 섬뜩하게 잘 든다.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엄마아빠가 야, 이거 좋더라. 가져가, 하며 준 것이다.
아빠는 이후 자취방에 왔을 때, 내가 다행히도 손을 베지 않고 멀쩡히 쓰고 있던 그 칼만을 접시 건조대에서 수저꽂이로 옮겼다. 아, 조심해서 쓰고 있어. 한 번도 안 다쳤다니까? 하는 말에, 그릇 꺼내고 그러다가 손 빈다니까. 이건 바로바로 꽂아 놔라, 했다.
하도 겁을 준 덕분에, 그리고 그 날이 정말 잘 들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이나 밤마다 푹푹 날에 베여 즙이 나오는 토마토를 그릇에 옮겨 담으며 나는 늘 조심했다. 절대 안 벨 거라고 생각하며 항상 집중했다.
칼을 쓴 지 반 년, 병동에서 애가 하나 죽은 다음 날 아침, 나는 왼손에 든 토마토가 아닌 엄지를 칼날로 스쳤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다. 탄력있게 즙이 터지는 모습 대신 깊고 길게 베인 틈에서 피가 조용히 스몄다. 피의 맛과 토마토의 맛. 비슷할지도 몰랐다. 어릴 때 토마토에서 쇠맛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베인 손에서 피가 끊임없이 나왔다. 누르면 아플까 봐 가만히 서 있었다. 엄지만을 꺼내놓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마저 토마토를 썰고 설거지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 때 알았다. 이건 내가 이 칼에 베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날이 될 거라고. 지금도 알 수 있다. 내가 아픈 거였으니까. 나의 상처이자 통증이었으니까.
그 칼은 손잡이가 길고 날이 상대적으로 짧다. 아주 큰 식자재를 썰 때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날 하나는 기똥차다. 가까이 있는 것을 베고 자르기에 적합했다.
이를테면 내 손가락 같은 것.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떠올렸던 그 언젠가에도 항상 낯설었고 조금 우습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내 살이 베이는 것처럼 다른 이의 것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되어서.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말했으나, 상대방도 그럴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이 사실은 영원히 내게 놀라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누군가를 갈라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짧은 칼날로 벨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가까웠다. 적어도 나는 그들에게 가까웠다. 나만 상해를 입었다고 생각한 관계에서 그들이 눈물을 보이거나 나를 안타깝게 볼 때 나는 대처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왜 울지, 왜 슬프다고 하지, 왜 슬퍼하는 거지, 왜 저런 표정이지. 내가 저 사람의 기분을 그렇게 만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가?
그 사실이 놀라워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울먹임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게 명확해지는 그 몇 초가 지나면, 나는 대응 방법보다는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놀라운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들을 울게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어떤 말이건, 행동이건, 그들의 눈물은 내 말과 행동보다 더 비쌌다. 당황스러울 만큼 나의 언행은 가치가 낮았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울거나 슬퍼했다. 그래서는 정말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입에는 그 짧은 칼이 들었다. 사랑해, 라고 발음하는 그 부드러운 혀와 입의 점막이다. 날이 짧아 가까운 것만을 깊고 부드럽게 벤다. 갈라진 토마토에서 즙이 나오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이 새어나온다. 나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어도, 상황이어도, 내가 다시는 토마토를 썰다 그 칼로 내 손가락을 벨 일이 없는 것처럼.
나는 그 혀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생각한다. 사랑해, 떠올리는 것도 만들내는 것도 부드러운 그 단어를 발음한다.
그들은, 당신들은 나의 토마토이다.
칼이 입에 든 나와 가까운 토마토들이다.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손가락을 베지 않을 것처럼 당신들을 갈라내지 않겠다고 느낀다.
토마토니까. 푹 찌르면 즙이 나오는, 쇠맛이 나는 토마토들이니까. 당신들은 내 토마토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