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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 비키니시티

by 이븐도





뭣이 중헌디.

뭐가 중요하겠니이.


이 두 가지. 이상하게 애매한 그 보라색 하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찰나의 빛깔, 내 눈에는 보라색이고 누군가의 눈에는 핑크색이며 카톡으로 전송된 사진을 받은 상대방은 그냥 파란색 아니야? 하는 색. 뭐가 중요하겠니.

아무튼 파랗거나 허옇던 하늘이 저녁을 입고서 그런 색깔을 띤다. 사진을 보내 답장을 받고 아닌데, 야. 사진이 그렇게 나온 거지 보라색이야, 생각한 후 고개를 들면 하늘은 보라색도 핑크색도 아닌 차가운 남색을 띠기 시작한다.






보라색. 좋아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색. 이도저도 아니고 애매하다.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따뜻한 느낌이 드냐 하면 또 그런 류는 아니고. 그냥.. 꿈 같다. 환상과 의식의 빛깔. 애매해도 이쪽저쪽도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들에 어울리는 색깔. 이래도 저래도 좋은 순간에 어울리는 빛.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절망적이기만 한 것도 아닌 일들에 알맞는 색채. 비애가 공존하는 순간의 파장이자 변종.


아, 어찌나 애매하신지 사실은 저녁 노을이 번지기 전이 아니고 새벽이 끝나 아침이 밝기 직전의 색일 때도 있다. 그게 그거다. 잠시 한눈을 팔면 스쳐지나가고 그걸 봤다는 사실에는 어떤 진지한 무게도 없지만.. 아름다웠다는 점만이 남는다.






코처럼 생긴 게 튀어나와 있길래 쟤 이름은 왕코물고기일까, 했더니 설명에는 유니콘 같은 뿔을 가진 유니콘 피시라고 되어 있었다. 유니콘 피시요? 미안한데 유니콘은 너보다는 좀 예쁜 애들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앞으로, 무슨 맨홀 뚜껑으로 안면부를 맞은 것 같은 형태의 물고기가 지나갔다. 아니네, 얜 더 하네. 그래. 유니콘이 꼭 무지개색 갈기에 보라색이나 핑크색의 예쁜 친구들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이런 애도 있잖아. 얜 이름이 뭐야, 심해왕망둥어? 했더니 나폴레옹 물고기였다.

나폴레옹.. 이름 영국인이 붙였어? 나름 외모에도 엄청 신경 쓰고 멋도 되게 부렸던 사람으로 아는데.. 본인 성이 이런 물고기에 붙었다는 거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온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주황색 그리고 뭐라고 딱 잡아 말할 수 없는 빛깔, 보라색과 회색이 섞인 것 같은 색깔, 노란색과 회색이 얼룩덜룩하게 섞인 빛깔, 이건 갈색이야 회색이야, 아니. 갈색인가? 검은색이야, 초록색이야. 가만히 좀 있지, 볼 수가 없네. 머리? 지느러미? 꼬리?

눈이 없어? 아, 퇴화됐다고. 어느 순간 똑 떨어진 건 아닐 거고, 이렇게 되기까지 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어쨌든 저 모습이 최선의 버전이라는 거지. 넌 순하게 생겼는데 독침이 있구나. 돌리, 독침이 있었어? 저렇게 쪼끄만데 독침이 소용이나 있나. 그래.


땡땡이 잠옷을 입은 물고기, 달이 뜬 암초지대의 암살자, 왕을 닮은 물고기, 무리를 이루는 멋쟁이, 토마토처럼 붉고 동그란 (한참을 토마토 같은 애를 찾았는데 별로 토마토 안 같았다. 과육까지 같이 떨어져 나간 귤 껍데기 같았다), 눈 화장을 한, 노란 꼬리로 무리지어 다니는, 기분에 따라 색깔을 (물고기도 기분이 있어?) 바꾸는, 화가 나면 큰 지느러미를 펴는... 인접한 지역의 바다, 비슷한 염도와 온도 출신인 주제에 하나하나 다 달랐다. 생긴 것도, 성격도. 사람들보고 얘 예쁘네 안 예쁘네 이건 무슨 색이네 아니네 (나 보고?) 따지라고 그렇게 생겨먹은 게 아니었다. 당연한 건가?




그들은 각각 같은 종끼리 영역다툼이 심하고, 어릴 때는 노란색에 흰 줄무늬를 갖지만 커가면서 파란 줄무늬가 생기고, 무리에 수컷이 없으면 가장 큰 암컷이 수컷이 되고, 귀여운 모습과 달리 가시가 있어 물리면 상당히 아프고, 위험에 처하면 산호초 뒤로 숨고, 위협을 느끼면 매우 공격적으로 돌변하는.. 물고기들이었다.

나한테는 이렇게 돈 주고 수족관에 올 때나 그 존재를 드러내는 물고기들. 생선들. 몇십 년 몇백 년 전의 누군가들이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특성을 알아내 정리해 놓지 않았더라면, 생선일지 아닐지만 중요했을 존재들. 사실 생선도 그다지 안 좋아하니까 그 정도의 관심도 안 갔겠지.


가만히 이런저런 험한 일들을 겪어 어떻게든 더 종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몸을 바꾸고, 특성을 발현시키고, 색을 바꾸고, 번식 방법을 변형시켰더니 사람들이 이쪽 저쪽으로 분류하고 패턴을 분석해 이름을 붙였다. 빨주노초파남보 크게 일곱 가지 중 하나로 무슨 색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고 알을 어떻게 낳고 무엇을 어떻게 먹고 위험에는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들어 정의해 주었다.




만약 잣대가 다른 거였다면, 내가 발견됐을 때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분류되었을까.

그들은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의 변형이었고 어류의 변종이었다. 살다 보니, 살아남다 보니 제각기 달라졌고 그게 그들이 최선으로 남아 온 방식이었다. 그 몸과 헤엄치는 모양새와 지느러미와 꼬리의 생김새와 크기 모두가 적응의 흔적이고 삶의 증거였다.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이 아니었고 무리지어 헤엄친다고 해서 다 똑같이 번성하는 게 아니었다. 그 작은 아쿠아리움에 모인 물고기도 그렇게나 제멋대로 잘들 살았다. 살아온 친구들이었다. 생긴 대로 발전하면서 살아남은.






촌스럽게 페인트가 칠해진 수족관 유리 앞에서,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본래 살던 곳이 아닌 이곳으로 잡혀 들어와 안온하지만 답답한 삶을 유영하는 그들을 보면서 알았다.

내가 너무 가혹했다는 걸 알았다.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과 나의 습관들과 행태 같은 것들에, 지나치게 힘을 줬고 굳이 안 그래도 되는 부분에서 마음을 붙들어 맸다.






그러니까 이곳의 사람들이 다 비키니시티 주민들처럼 보였다. 애초에 다 다르게 생긴 생선들인 그들. 이제 보니 정말 탁월한 작화 설정이잖아?

환승을 하러 내린 잿빛 역사에서 캐리어를 밀쳐 놓고 가득 찬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게 백팩 맨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이거지, 스치기만 해도 짜증나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나를 긁어대는 것 같은 기분. 이어폰 볼륨을 높이고, 고개를 들어 한 번씩 눈을 감고. 다 그렇게 살았다. 이 역 안의 모두가 그럴 거였다.


똑같은 곳에서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다른 방식으로 가는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들. 우리는 정말 다 이종이었다. 그래서 이 공간이 편치 않았다. 당연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여기보다 더 따뜻한 공기를 가진 곳이 적합했고, 이 정도의 미세먼지도 치명적일 수도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좀더 감정적인 지지가 더 절실했고,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크거나 작은 옷이 필요했고, 어딘가에 오르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모두 다 변종이라서, 그렇게나 갈아내 제련하거나 부득불 끌어안을 필요가 어쩌면.. 없었다.




내 세상의 잣대는 나였다. 나보다 예민하면 대하기 힘들었고 나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원망스러웠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말하지 않길 바랐다. 잣대를 댈 필요가 없었다. 입고 있는 옷처럼 사람들은 제각각 달랐다. 빨간색 파란색 회색 노란색 물고기들처럼. 사실은 대놓고 다 다른 존재들이었다. 왜 이걸 모르는 것처럼 살았지.


그래서 이해하려 애쓰고 맞추려 노력해야 했다. 잘 맞는 그런 건 없었다. 공통점이 많은 것과 잘 맞는 건 다른 거잖아. 비슷한 줄 알았는데 이 친구의 점박이는 꼬리에나 있었고 내 점박이는 사실 입 안에 있다면.. 우린 안 비슷한 건가? 그렇게 느끼면 안 되는 거였다. 애초에 다 이종이며 변종인데.




스폰지밥 어릴 때 이후로 본 적 없는데. 거기 생물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해졌다. 오징어도 가재도 뜬금없는 스펀지도 다람쥐도 사는 그 말도 안 되는 세계. 그런데 여기라고 뭐 다른가? 직업, 학력, 결혼, 성별, 사상, 외모, 나이, 식성, 종교, 지역, 취미 등 오만 갈래의 변수가 곱해진 온갖 이종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모여든 곳을 사회라 불렀고 공동체가 굴러갔다. 규칙과 법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발붙인 곳을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이 많았다.


뜬금없이 궁금해졌다. 비키니시티에 법이 있나?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나. 거기서는 어떤 이들이, 무엇을 최우선으로 두고 그 물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가.

맞춰 가느라 발버둥치는 이들을, 결국은 혼돈의 엔트로피가 아닌 찰나의 생존으로 이끌어주기 위해 어떤 것을 내세우고 있나. 잡음이 많겠지만 그래도 어떤 것을 향해 시선을 맞추고 그 수많은 변종들을 보존시키고 있는가.






왜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잘 모르나? 수족관? 여행? 달리기? 뭐가 되었든 변화다. 나 역시 변이 중인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생존할 거라고. 그러기 위한 과정이라고. 그 물고기들이 그런대로 살아남았던 것처럼,






그러니까, 뭐가 중요하겠냐고. 아무튼 예뻤다는 거 아니야. 무슨 색이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애초에 다른데. 다른 채로 찰나에 존재했고 쟤 눈에도 내 눈에도 예뻤다는 거. 다르지만 공유했으니 된 거 아니겠어?




splendid. Splendid.


*


아, 그리고 나폴레옹 물고기.

내가 오바하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작년 '못생긴 물고기 배틀'에서 아쉽게도 1위를 놓쳤다고 기사까지 나와 있다. 미안해. 잘 있니. 너도 나 보면서 그런 생각 했어?

했길 바라. 쌤쌤이잖아. 했겠지. 하루종일 그 좁은 데서 얼마나 지겹겠어. 사람들 얼평이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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