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게 밥을 해 준 사람들
"나 넷플 안 본 지 꽤 됐는데."
"안 본다고? 그럼 그거 안 봤나."
"뭐, 폭싹?"
"그래, 가시나야. 보랬잖아, 안 보나?"
"내용은 대충 알아. 재밌어서?"
"재미도 있고.. 왜 안 봐. 그걸. 니 빼고 다 보는데."
"알았어."
"봐. 가시나야, 아이유가 니 하는 짓이랑 똑같애."
"뭐?"
"거 금명이 가시나 하는 짓이 니랑 똑- 같다고. 봐라, 지금."
그리고 동생이 뒤에서, 보면 울걸?이어 엄마는 쟤 안 울어, 아냐. 이건 운다. 라고 또 동생이 받고.
"보면서 나 욕했지. 셋이서."
"똑같대."
"아니, 누가. 아빠도 그래?"
".. 다 똑같댔어, 아. 보라고, 가시나야. 씻고 할 것도 없겠네. 그거나 틀어서 봐."
감자볶음이 아삭아삭해. 원래 사먹는 건 그래? 맛없어, 랬더니 아빠는 반찬 없어? 니가 집엘 안 오니까.. 엄마한테 반찬 좀 해 달라고 해, 라고 했다. 하라고? 해도 돼?
언제는 안 해 준 것처럼 그래. 엄마한테 먹고 싶은 거 알려 줘. 해서 가져갈 테니까. 감자볶음은 아빠가 할게. 엄마한테는 언제 오라고 전화 하고. 그리고.. 어? 전화 좀 해. 잘 지내는지. 카톡에 답장도 하고. 그거 단톡이잖아. 그래도. 응?
걱정할까봐 그랬지. 보이스피싱 이후로 집에 연락을 안 했다. 그전에, 싸워서 나왔던 단톡방은 다시 들어갔지만.. 전화는 안 했다. 걱정할까봐. 생각해보면 뭐라도 말하는 게 차라리 나았겠지만 아무튼 나는 연락을 안 했다. 단톡방의 메시지는 꼬박꼬박 읽었다. 그러면 생사 확인은 되잖아. 그것마저 안 읽으면 진짜 걱정할까봐.
장조림이 필요했다.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반찬 가게에서 사먹으니 양이 적었다. 내가 반찬을 사 먹는 날도 오다니.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나 반찬 해 줘. 아무거나 한두 개만, 이라는 말에 너 밥 안 먹냐?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화색이 돌았다. 소고기, 돼지고기 뭐? 아무거나, 했더니, 어떤 부위는 얼마 하고 어떤 부위는 어떻고 사실은 어렵지도 않고 그때 준 밥솥에 뭘 어떻게 넣고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참 했다. 나는 빨래를 걷으며 그 말들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 엄마아빠와 동생은, 캠핑 갈 때나 쓰는 폴딩박스 카트 가득 반찬과 과일과 밥과 쿡탑과 냄비를 싣고 오피스텔 주차장에 등장했다.
쇼츠로 본 적 있다. 장면 장면 봤었다. 그들은 나를 백 그램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했다고. 이어 뭐 어디 요리책에 컷으로 넣어도 될 것 같은 훌륭한 비빔국수 두 그릇과 함께 '간단하게 먹자'는 대사가 나온다. 간단이요? 간단. 그렇구나.
동생은 나보다 요리를 잘 했다. 나보다 잘 한다는 표현이 맞나? 아무튼 걔는 할 줄 알았다. 했다.
짜파게티가 먹고 싶어서 본가에 간 적이 있다. 라면만 끓여 봐서 딱히 맛있게 만드는 법을 몰랐고, 사먹기는 좀 그랬다. 동생한테 끓여 달라고 하면 걔는 투덜대면서 끓였다. 김치도 줘? 하면서. 자기가 먹고 싶으면 멸치국물 내서 국수도 끓였고 계란과 감자를 잔뜩 삶아서 에그마요도 해 먹었다. 안 귀찮냐? 하면 닌 먹지 마라, 라고 했다. 난 다 먹었다.
엄마가 요리를 해 놓으면 되도 않는 훈계를 했다. 부엌에서 설치며 훈수를 두는 그 덩치. 아빠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고 가끔 아빠가 한 요리의 핀트가 안 맞을 때 엄마와 동생은 쌍으로 붙어서 아빠를 비난했다. 나는 그 모든 과정과 결과의 산물을 '손가락 얄랑도 안 하고' 얻어먹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엄마가 한 밥으로 삼시세끼를 먹었다. 그리 대단한 대학에 갈 성적은 못 됐고 대신 그런 대학에 가기라도 할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집 현관에서 교실까지 10분컷이었다. 1학년 때는 3분이 걸렸고 2학년 땐 5분이 걸렸다. 3학년 때는 꼭대기 층에 있느라 10분이었다. 어쨌든 지척이었다.
엄마는 일어나서 도시락을 쌌고 아침밥을 했다. 삼겹살도 먹었고 돈까스도 먹었고 김치찌개도 먹었고 수육도 먹었고 그냥 목살과 부채살을 볶은 것도 닭볶음탕도 닭갈비도 닭백숙도 먹었다. 전날 엄마가 야채들을 썰어 놓은 그다음날 점심은 오므라이스나 볶음밥을 먹었다.
저 정시로 대학 가려고요, 라고 말하고 매일매일 쓸 수 있는 외출증을 끊었다. 안 될 게 뭐 있어,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 고3 아닌가. 담임에게 가서 저 저녁 집에서 먹고 싶어요, 라고 했나. 그녀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여간 나는 아침 저녁은 집에서 먹고 점심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문과에서 교차지원으로 간호학과 가려면 한 등급씩은 더 낮춰야 하는 거 알지, 라던 담임의 말을 듣고 나는 수시에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냈다. 따라서 나는 담임에게도 학교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5월. 안 시원했다. 슬슬 햇빛이 세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취미로 떡을 배웠다. 커다란 상자를 하나하나 포장한 약밥과 떡으로 채웠다. 어이가 없었고 짜증이 났다. 아,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을 걸 왜 해. 더워 죽겠는데. 나 수시 안 쓸 거라고, 라고 분명히 말했겠지. 하지만 엄마는 얼굴을 잔뜩 붉혀 가며 쪄내고 모양을 낸 것들이 든 그 상자를 또 포장해서 나에게 들려 보냈다.
그녀에게 가져다주느니 차라리 버리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상할 게 분명하니까 독서실에 가져다놓을 수도 없었다. 무슨 치성 드리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 건지 부아가 치밀었다. 이 기대와 이 마음을 그녀는 그냥 앉아서 받기만 할 테니까. 그 뜨뜻미지근할 반응에 벌써부터 내가 다 무안했다. 담임은 조금 놀라더니 며칠 뒤 너무 잘 먹었다고 전해 드려, 라고 했나. 기억도 안 난다. 버렸는지 먹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스터디 플래너에 그 날의 도시락 메뉴를 적었다. 옥상 문 앞 계단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먹을 때도 있었고, 창문을 다 열어놓은 교실 스탠딩 책상에 서서 먹을 때도 있었다. 밥도 많았고 반찬도 많았다. 간식도 있었고 홍삼액도 하나씩 들어 있었다. 나는 다 먹었다. 원래 잘 먹었다. 배불리 먹었고 딱히 조는 일 없이 오후 수업을 듣고 문제집을 풀고 다시 집으로 가 또다른 반찬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노을이 지려 하거나 진 하늘을 등지고 팝송을 한두 곡씩 들으며 학교로 돌아갔다. 야자를 한 뒤에는 독서실로 갔고 집에 와서 또 뭔가를 먹었다.
두 시 반이 넘어 물을 올리는데 엄마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라면 끓여 줘? 하면서. 내가 끓이면 되는데? 했더니 엄마는 부엌 빛에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물은 더 붓고 스프는 덜고 계란은 깨넣은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빨리 자, 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폐렴에 걸려 에픽하이 콘서트장에 동생이 대신 출석한 날 오전, 나는 빠큐 모양의 응원봉과 티켓을 전달하고 동생은 닭곰탕과 돈까스와 밥과 김치 등등을 놓고 갔다. 엄마한테 말했냐? 하지 말랬잖아, 했더니. 아, 묻는 걸 어떡해, 그럼, 이라고 했다. 나는 뼈가 샅샅이 발린 살코기가 끝없이 나오는 닭곰탕을 며칠 내내 먹었다. 잘게 썬 파와 빨간 양념장도 중간중간 넣어서.
엄마아빠와 대판 싸워 그들과 동생이 함께 사는 그 집에 폭탄을 투하한 뒤, 며칠 후 양요섭이 나오는 베르테르를 보러 갔다. 동생에게 서운했고 짜증이 났다. 딸기랑 방울토마토 갖다 줄게, 하는 문자를 거듭해서 씹었다. 포기하지도 않고 보내길래 좀 꺼지라고 답장했다.
그랬더니 전화를 했다. 오든가 말든가 맘대로 해라, 나 없으니까, 하고 신도림에서 돌아왔더니 마트 가방을 먹을 것으로 잔뜩 채워 자취방에 와 있었다. 밧데리 내가 바꿨다, 엄마아빠한테는 말 안 할게, 하면서. 도어락 건전지가 다 된 걸 며칠 방치했는데 딱 걸린 거다. 뭐, 본인도 집 시끄러워지는 게 싫을 테니 이제 그런 걸 이르지 않는 눈치는 키운 모양이었다.
나물들, 찰밥, 양념에 잰 고기, 과일, 엄청나게 커다란 락앤락에 든 육개장. 다른 건 냉동실이나 냉장고 제일 윗칸에 넣으면 됐지만 나물은 빨리 먹어야 했다. 다음날 데이 출근 전 밥을 데우고 나물을 덜었다. 맛있었다. 진짜로 맛있었다. 그 때 알았다. 나는 이 음식에 잔뜩 길들여졌구나. 이 맛이었다. 왜 맛있지 생각했는데.. 제일 익숙한 맛이니까. 밥의 간, 나물의 간, 데쳐진 정도 모두 내가 아는 맛이었다.
아는 맛. 익숙해진 맛. 식구. 밥을 나눠 먹는 사이. 나눠 먹어온 사이.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밥을 공유한 사이. 뻔히 반찬가게와 편의점과 온갖 프랜차이즈가 있고 배달이 가능한 동네에 사는 내가 익숙해진 맛과 감도. 그걸 구태여 이고지고 -덩치가 있으니 그냥 들면 되긴 했겠지만- 온 누군가. 배달을 명한 그들과 하달해 온 누군가.
두 번째로 뮤지컬을 본 날은 보이스피싱을 당한 날이었다. 나는 이틀 뒤 오피스텔로 돌아오는 지하철역에서 울었다. 새벽에 경찰 둘이 집으로 왔을 때도 퇴근 후 경찰서에서 신고서를 작성했을 때도 안 울었는데, 엄마아빠에게 이걸 말할 생각을 하니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그 날 자취방에서 울었다. 바닥을 기듯이 끅끅 울었다. 엄마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말할지 말지를 고민했다는 게 원망스럽다고 했다. 아빠는 본가로 갔고 엄마는 내 자취방 1층에서 잤다. 집에 가겠다더니 안 가고 도로 왔다.
아빠는 또 밥을 새로 해서 계란말이와 국과 반찬들을 들고 왔다. 친구를 만나러 대전에 갔던 동생이 미친 것처럼 잔뜩 사 온 성심당 빵도 가져왔다. 그 빵들을 본 엄마는 이게 미쳤나, 했다. 아빠는 집에는 더 많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먹고 동사무소와 은행과 경찰서를 돌았다.
반찬을 받기를 거부한 건, 그러니까 본가에 발길을 끊은 건 내가 뭔가를 되돌려줘야 하는 것 같아서였다. 받았으면 줘야 하잖아. 나는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대체 몇 살까지 엄마아빠가 바라는 대로 살아야 하는지, 그들의 기대나 사랑 아래 성장해야 하는건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그만두고 싶었다. 반찬을 안 받으면 될 줄 알았다.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우습게도, 양요섭의 마지막 뮤지컬 브이로그를 보고서였다. 마흔까지 몇 살 남겨두지 않은 아주 잘 나가는, 초고수입을 벌어들일 그가 엄마가 해다 준 오리탕을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아드님이 어디가 불편하고 모자라서 그걸 해 주시지는 않았겠지. 아들이라서, 자식이니까, 해 주고 싶어서 해다 준 거 아닐까. 그걸 이제야 알았다. 엄마한테 이걸 말하면 뭐라고 할까, 엄마. 뭐라고 할래, 한심하다? 하하.
동태전과 갈비찜과 어묵볶음과 적당히 익은 작년의 김장김치와 장조림과 감자볶음과 계란말이를 덜었다. 거의 다 빈 밀폐용기를 본 엄마는, 김치 산 거가, 하더니 돈이 쌔빌렀구만, 가시나, 했다. 나는 굶은 것처럼 먹었고 엄마는 동생에게 하나로마트에 가서 국수 면을 사 오라고 했다. 이걸 왜 다 가져왔어, 여기도 샤브샤브집 있는데, 했더니 이거 한 번 써 볼라고 가져왔다, 했다.
전기쿡탑을 굳이 바닥에 깔아놓고 좁은 일층에 네 명이 앉았다. 아빠는 너 반찬 맛있을 때 먹으라고 가지고 온 거야, 우린 아까 먹었어, 라고 했다. 동생은 뭐 또 재밌는 일 없냐, 고 입을 뗐다. 그래서 나는 '재밌는 일들'을 이야기했다. 돈을 꽁으로 버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는 환장하는 일화들. 아빠는 짐짓 심각하게 듣고 엄마는 중간중간 누구 편인지 모르겠는 멘트를 날렸고 동생은 헐,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요새 우린 그거 봐, 하면서.
"엄마 아이유 안 좋아하잖아."
"박보검 좋아하잖아."
"언제부터?"
"뭘 언제부터야, 엄만 응팔 때부터 보검이 좋아했어."
"언제 봤다고 보검이. 재밌어?"
"개재밌어, 누나. 니 꼭 봐라."
"닌 다 재밌잖아. 안 보는 게 없냐?"
"그거 보다 쟤랑 아빠는 울었어."
"울었다고? 왜? 엄마는?"
"난 안 울었지. 하여튼간에 재밌어."
그리고 나는 안 봤다. 못 봤다. 넷플릭스를 구독해서 뭔가를 끝까지 본 게 너무 오래됐다. 드라마는 이제 절대 다수의 눈두덩이를 잔뜩 붓게 하고 종영한 지 오래다. 보라는 드라마는 안 보고 밥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밥이 뜨거워 입을 델 때도 있다. 급하게 먹어 체할 때도 있다. 아무튼 먹어야 산다. 나는 밥을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부당하다 싶은 대우를 할 때, 애매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생겼을 때 밥을 생각했다. 그들이 내게 해 준 밥을 생각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그 반찬들과 과일들과 밥을 생각했다. 뻔히 모든 조리시설이 갖춰진 거주 공간과 인프라가 깔린 곳에 사는 사지 멀쩡한 내가 지금도 먹는 것들을 생각했다. 아무튼 그들이 나를 이렇게 키웠다는 걸 상기했다. 어딘가에 내보일 것도 자랑할 일도 없지만 하여튼 밥을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그렇게 밥을 해다 준 이들에게도 큰소리를 박박 쳤고 못된 말을 쏟았다.
그래서 어떤 세상일들에 그렇게 대응했다. 엄마아빠도 나한테 이렇게 안 하는데? 아빠도 나한테 이런 잔소리 안 하는데? 엄마도 나한테 이거 가지고 뭐라 안 하는데?그런데 니가 뭔데, 넌 뭐길래 이따위로 구냐고 생각했다.
이어, 나는 그런 그들에게도 그렇게 행동하는데 겨우 이 정도로 하는 네게 내가 예의를 갖추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어딘가 뒤틀린 오만함도 품고 살았다. 내 더러운 성질의 샘솟는 원천이었다. 그들이 내게 준 밥이.
때로는 나를 숨막히게 하고 뚜껑 열리게도 하고 '금명이 가시나와 하는 짓이 똑'같게 행동하게도 했지만, 아무튼 그 밥들이 나를 먹여 살렸다.
안목해변을 어슬렁거리는데 미역국을 파는 식당이 보였다. 내일 아침은 저거나 먹을까, 했는데 집 냉장고 윗칸에 미역국이 있는 게 기억났다. 갈비찜과 장조림에 순위가 밀렸다. 국은 왠지 한 번 뜨면 쭉 먹어야 할 것 같아 아직 열지 않았다. 내내 냉동실에 있다가 냉장실로 이사한지 얼마 안 됐다.
집으로 가면, 여행이 끝나면 그걸 먼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밥 아닌가. 그들이 내게 먹이고 싶었던 것. 내가 먹고 커 온 것. 안 먹을 수도 없는 것. 어쩌면 대가 없이 받아도 되는 것. 무엇보다.. 밥이잖아. 안 먹으면 상한다고.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고, 입력값이 기대이든 사랑이든 어쨌거나 부응해야 한다고 느꼈다. 돌아보니 줄창 실패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대학 간판? 실패! 장학금? 실패! 결혼? 아빠의 퇴직 전까지가 그들의 염원이었으나 불가능임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중이다. 실패나 다름없지.
아마 결혼이 해결되고 나면 자녀계획이 따라올 거고 그러고 나면 대학 간판으로 시작되는 똑같지만 다른 사이클이 또다시 시작되겠지..? 아닌가, 엄마 아빠? 맞지?
집에 올 때마다 숙제하는 기분이라고, 나한테 말할 게 그런 것밖에 없냐는 말에, 그럼 무슨 말을 하니, 라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게 어떻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아니 많이 싫었다. 내가 이런 지원을 받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거라면 그냥 집에서라도 나와 혼자 힘으로 살고 싶었다. 대외활동, 남자친구, 옷차림, 화장, 머리 색깔, 친구, 외출 시간, 진로, 또 진로, 소비 습관, 행선지와 목적, 저축 액수, 걸음걸이, 표정. 나는 그 끝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체크리스트에 일일이 짜증과 분노와 억하심정으로 응수했고, 맛있는 밥이 있는 집을 떠났다.
쓰고 보니 별 것도 아니군. 그냥 취직해서 나왔다는 말인데.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나는 주기적으로 밥을 먹으러 집에 가서 엄청난 양의 식량과 생활용품 같은 것들을 받아 온다. 아리송한 일이다. 아직도.
건새우볶음과 달콤한 잔멸치볶음과 닭갈비의 칸이 나눠진 도시락통처럼, 나눌 수가 없다. 그들이 내게 주는 지원과 사랑과 기대와 실망과 상처와 이해의 값을 계산해 나누는 것을 나는 못 하겠다. 앞으로는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아무튼 그들은 나를 어떤 의미로든 독립시켰다.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게 도왔고 앞으로도 도와줄 것이다. 그들과 밥이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 밥에 익숙해졌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내가 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엮여 있다.
나를 이렇게 세워 준 만큼 그들이 너무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게 도울 것이다. 그것만은 잘 알겠다. 나는 그렇게 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