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원래도 높은 게 맞지만 이곳에서는 유독 더 끝을 모르고 넓어 보인다. 뭐, 어디 아프리카 평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주말의 종로를 바라보며 떠올리는 감상이다.
시시각각으로 계절을 담는 키가 큰 은행나무들과, 어떤 이파리들은 내 얼굴보다 더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들과 4차선 도로 양옆으로 선, 위로도 옆으로도 커다란 사옥들, 시류에 가장 잘 먹히고 있는 모델의 광고를 붙인 채 줄기차게 달리는 파란 버스들과 검고 흰 자동차들. 오래된 만큼 이파리를 가득 이고 있는 나무들은 흔들릴 때마다 햇빛을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담아 반사시키고, 그 앞, 뒤, 양옆으로 하늘색의 하늘이 빈틈없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하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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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도 작거나 좁지 않은 이 거리에서 사람들은 바람을 맞아 머리카락이 뒤집히기도 하고, 긴 치마와 걸쳐 입은 셔츠 자락을 휘날리고, 짝지어 걷던 상대의 얼굴을 보며 웃고, 실컷 떨어지고 있는 벚꽃 사진을 찍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버스를 기다린다. 이따금씩 남색 유니폼을 입고 우르르 이동하는 경찰들이 보이고, 광장 한쪽의 물을 쏟아내는 분수 사이를 오가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들이 눈에 띄며, 동상들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운때가 맞았다면 알록달록한 빈백이나 작은 천막들 사이로 드러누워 도시 한가운데에서 평안한 공기를 만끽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등이며 가슴에 글자로 가득한 패널을 걸고, 머리에는 분명 모자임이 분명한 화려한 뭔가를 쓰고, 몇 년을 지켜보아도 항상 비슷한 내용인 듯한 녹음 음성을 틀어놓으며 목청 좋게 구호 같은 것을 외치는 이들도 있다.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서점, 카페와 인근 다이소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며 평일이면 직장인들은 '이곳은 금연 구역입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뒤로하고 잔뜩 모여서 담배를 피운다. 교보 앞 벤치에 앉은 염상섭 동상 옆에서 가끔 사진을 찍는 사람들, 지금은 그 무릎에 올라서 있는 남자아이 한 명, 그 앞에서 음료나 서점 종이가방을 든 채 앉아 있는 사람들, 크록스를 신고 잘도 뛰는 아이들, 꽃다발이 든 가방을 들고 걷는 남자, 여자, 흰 모자에 형광색 조끼를 입고 둘이서 걷는 교통경찰, 까만 조리사복을 입고 가래침을 뱉고 전자담배를 꺼내는 사람. 뭐, 이게 이곳의 평안이다. 어떻게 이렇게 복작하면서 안온하고 청량할 수 있는지.
끊기지 않는 릴을 돌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풍경에서 시선이 멈출 때가 있다. 지하철역 출구로 올라올 때 거대한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형체를 마주칠 때, 젊고, 어리고, 어쩌면 일단 본인의 앞가림은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다리를 절거나 낯빛이 너무나 까맣거나, 분명 좋은 냄새가 나지는 않을 것 같은 큰 보따리를 지고 서거나 앉아 있는 누군가를 보게 될 때가 그렇다. 걸음을 더 재촉해 거대한 종로타워와 학원 건물들을 지나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같은 연령들만 모여 자기들끼리의 노래를 틀고, 주머니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펼쳐 놓고 여기저기에 앉아 떠들고 웃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근방의 롯데리아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연령대와 분위기가 모두 전환되어 버린 것처럼 낯선 그 거리를 보며 상실을 떠올린다. 언젠가 내게도, 내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다가올 것들. 피하려 하겠으나 스며 있을 그 정체도 모를 무언가를 잔뜩 연상하며 멍청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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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주일에 사나흘을 병원에 출근해 열 시간가량을 보내고 온다. 그렇게 네 번 정도를 반복하면 한 달이 되고 그대로 열두 번이 지난 후에는 사계절이 채워져 있다. 부재와 변형으로 가득한 곳이다. 대다수가 허여멀그리한 옷을 입고, 신고 벗기 쉬우며 폼은 덜 나는 신발들을 신고, 수액이 걸린 무언가를 달달달달 끌고 다니며, 안에서만 있어야 하는 것들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주머니며 관을 최대한 잘 보존하거나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이기 위해 다소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내가 출근이나 퇴근을 할 때 버스에서 내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곳의 거주민들은 그렇게 지내고 있다. 그렇게라도 혼자 로비며 1층을 걸어 다니고 있는 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주황색의 키 큰 침대에 묶이듯 눕혀져 운반되고 있는 이들도 이따금씩 있으니까.
병실 침상 커튼을 젖혀야만 볼 수 있던, 산소 튜브를 연결한 관이 목 한가운데 꽂힌 채 누운 모습을, 검사실 유니폼과 이 건물을 나가도 볼 수 있는 평상복과 보안 요원의 검은 조끼와 의사들의 흰 재킷과 다 똑같은 환자복이 섞인 여기서 보는 건 상당히 생경한 장면이다. 그들의 피부는 핏기 없이 하얗고 빳빳하나 너무 얇아 탄력이라고는 도무지 없어 보일 때도 있고, 가끔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누렇거나 보라색일 때도 있다. 때로는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부위만 너무 불룩히 솟아서 몸을 두른 옷이 벌어져 있기도 한다. 그들은 이곳을 떠나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다른 장소로 이동해 삶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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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꽂은 귀로 들어오는 음악소리는 달콤했고, 가족 단위로 복닥거리는 광장의 반짝거림은 아름다웠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들였을 때의 이상한 해방감은 꽤 자극적이었고, 초록불 신호의 횡단보도를 달려 건너는 느낌은 상쾌했으며, 몇 달 전 잔뜩 꽃잎을 이고 있던 나무가 모두 연두색으로 변한 풍경을 눈에 담은 순간이 소중했다.
나는 내가 이 중의 단 한 가지라도 잃게 되었을 때가 꽤 많이, 사실 정말 많이 가슴 아프고 서글플 것임을 혼자 예감했다. 내가 살던 박자대로 걷지 못하고, 내가 그려온 스케치북이 아닌 다른 것을 펴 들어 아예 다른 도구로 삶을 그려내야 한다는 사실이 깜깜할 것 같았다. 아무 일 없이 -이렇게도 다채로이 즐겁게- 살다가도 느닷없이 인도로 달려온 차량이나 단지 귀찮을 뿐이었던 건강검진에서 발견한 어떤 덩어리를 기점으로 나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
뭐. 누군가에게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사실이었을 것이나, 나는 몇 년 되지도 않은 병원생활에서 마주친 것들로부터 그걸 서서히 깨달았다. 기관절개관, E 튜브, 흉관, 헤모백, 색전술, 신선동결혈장.. 그 건물을 나서면 쓸 일이 거의 없는 단어들이 내게 가르쳤다. 사고. 유전. 재해. 노화. 내가 막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은 이미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시기의 문제일 뿐, 내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길어야 오늘 하루뿐이었으며, 짧게는 당장 이 순간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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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 임박한 동생에게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은지 닦달하듯 묻고, 어제와 다른 오늘의 하늘을 찍고, 찬장에 가득 채워놓은 과자 봉지가 뜯기며 내는 파열음에 오두방정을 떨며 즐거워하고, 때가 꽤나 지난 아이돌 노래들에 속으로 힘껏 리듬을 타고, 가방에 갖가지 인형들을 매달고 머리에는 롤을 만 채 걷는 여자애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괜히 나의 십 년 전을 떠올린다. 건강하다는 건 이렇게 호화스러울 수도 있다고 병원 밖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간밤에 뜨신 물로 씻은 몸에 향수를 뿌리고 마음에 드는 신발을 꺼내 신은 발로 뚜벅뚜벅 힘들 것 없이 걸어 당도한 그곳에 서서, 나의 안락함들을 잃으면 어떨지 떠올리고 있었다. 나의 젊음과 건강. 사실 그 두 단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멀쩡'이라고 말하는 이 상태가 변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그린다. 노화와 투병은 동의어도 아니고 꼭 한 가지가 반대의 필요조건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출퇴근을 반복하며 차츰 느꼈다. 나이가 든다고 다 아픈 게 아니며,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아프다 한들 인생이 끝장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도처에 깔린 요양병원이며 요양원의 모습이 어떨지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고, 아프다는 단어는 사실 너무 많은 상태를 지나치게 간단히 함축해 버리는 얄궂은 어휘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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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살아 있다는 사실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습으로 병원 로비에서 침대에 묶여 운반되는 이들과, 한 쪽이 없는 팔다리를 가지고 즐겁게 떠드는 탑골공원의 사람들과 교보문고 서가 앞에서 짐덩이를 들고 앉아 있다가 쫓겨나는 거뭇한 얼굴의 노숙자들. 쉬는 날이고 일하는 날이고 마주치는 이미지들이 내게 던지는 감정은 공포였다. 오류와 상실부터 눈에 띄는 그 모습은 새삼 충격적이었고 나는 그런 흐름 앞에 무력할 뿐이라는 사실이 무서웠다.
병원의 가지각색으로 고장 난 사람들과 그들이 맞부딪히게 되는 이곳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내게 그 사실을 소리 질러 주었다. 병원의 생활내 섞인, 다분히 인간적이며 그래서 진절머리 나는 에피소드들과 어떤 의미로든 강렬한 장면들은 그들 제각각 인생의 입자 하나 정도씩을 내게 흡수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어느 편에도 서 있지 않은 주제에 그들과 함께 조금은 아팠던 것 같다.
'자발 호흡' 같은 단어를 쓰게 되는 상황과는 아직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유니폼을 입고 이 작은 세계의 중간 전달자 같은 포지션으로 노동력을 운용해 나가며, 나는 이 삶의 어디쯤 와 있을까 재어 본다. 어느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내게 주어진 것은 그것이 지긋지긋한 뒷턴이나 타 부서 사람의 말버릇이든, 거듭 설명해도 납득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보호자의 태도든, 느닷없이 더 빠르게 찾아왔던 더위이든, 아직은 꽤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고 겁도 없이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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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한다는 건 하나의 지각변동 같은 게 아닐까. 시시때때로 커튼을 열고 갑작스레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들, 달랑 천 하나로 가로막힌 옆자리 무신경한 사람의 의도치 않은 소음, 지금보다 더 작은 덩치에 남이 기저귀를 채워 주던 시절 이후로는 외부인에게 보일 일이 없던 내 몸속 부산물을 생판 남에게 보여 줘야 하는 순간, 이에 더해 적게 봤네 많이 봤네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까지. 내가 지금까지 알던 문법과 너무도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곳 아닌가.
프라이버시는 이곳에서 언급하기에 사실 너무 고상한 단어일 것이다. 나는 아마 입원과 동시에 다시 그 누구도 나의 대소변과 부유물 상태를 궁금해하지 않는 세계로 재진입하기를 꿈꿀 테지.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통과한 병세와 나의 노화는 내게 끊임없이 일러 준다. 이게, 네가 그간 외면해 오던 세상이며 앞으로 언젠가 다시 방문해 머물러야만 하는 곳이라고. 나는 이 균열이 생긴 지반 위에서 걷고 일어서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게 내 관념 속에서 배나 회음부에 낯선 것을 꽂고 누워 걷지 못하는 가깝고 먼 미래의 내 모습이든, 그 이미지가 주는 공포 그 자체이든, '건강한' 일상이 모인 삶은 그야말로 '럭키비키'라는 깨달음이든. 병원의 누군가는 어쩌면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두려운 사실은, 그런 상태가 어딘가에서 뚝 떨어지는 재앙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앉아서 멀쩡히 자판을 두드리거나 인상을 찌푸리고 지하철 개찰구를 걸어 나오던 이 몸뚱이를 시작으로 발생하는 에피소드라는 것이다. 몸은 다양한 방식으로 오작동을 일으키고 변형을 요구한다. 절망적이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 상태로 나는 죽지 않으며 망가졌으나 누덕누덕 기워진 몸으로 이 삶을 재개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흔히도 건네는 '아프지 말라'는 말은 참 대책 없고 불확실해 더 소중한 말이다. 유한하며 호화롭기까지 하다. 나는 나이가 들 것이며, 나의 몸도 그럴 것이며, 이외에 그 어느 것의 흐름도 예지하거나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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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만큼 나는 병원의 거주민이 될 그 순간이 두렵다. 또한 그곳의 주민들과 내가 못내 안타깝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정말 가끔은 애처롭다. 바깥의 세상과 일상의 순간이 빛나는 만큼 이곳은 아프고 아리며 낯선 곳이니까. 내가 인식하던 세상만이 내 인생의 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언제나 사신처럼 나의 곁에 서 있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오늘은 못내 소중하다. 잃었든, 고장 났든, 삶은 쉽게 끝나지 않기에. 한 개를 잃고도 유연하게 순간을 만끽할 법을 계속해서 익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