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소에 선 시간은 통째로 꿈처럼 느껴진다. 향했던 길도, 돌아오는 길도, 어쩌면 그곳으로 갈 생각을 품은 그 순간도.
내가 괜히 과장해 생각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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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아과에서 일한다. 굳이 브런치라는 매체에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이조차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많은 순간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떤 것은 빛나기도 하고, 잡고 싶기도 하며, 내던져 버리고 싶기도 하고, 당장 통째로 사라지게 하고도 싶다. 그만두지 않을 것처럼 일하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것 아닌가. 어느 순간 또 다 관두고,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이 싹을 터서 다른 곳에 자리를 잡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매일이 똑같은 것 같지만 하나도 동일하지 않은, 그럴 수 없는 순간들을 보존해 두고 싶었다. 종이 일기장에 몇 자로 남기기에는 때로 너무 긴 것도, 애초 손에 잡은 펜으로는 잘 안 써지는 것도 있어 키보드를 폈다.
고백하자면, 보존하기 위해서만 쓴 것은 아니다. 나는 도망치기 위해 썼고, 털어내기 위해 썼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저 그런 일이든, 나는 그것을 닦아내고 내일로 나아가야 하니까. 그러나 쓰는 것 말고는 그것들을 치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썼다. 그리고 내 일상에서 가장 진실되게 굴었던 시간들을 짙게 남겨 두고 싶어서 브런치에 글을 등록했다.
글을 발행하기 전에는 온갖 생각을 한다. 왜 이렇게까지 쓰는 걸까. 자의식 과잉인가, 이런 일을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듯 길게 길게 (쓰고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긴 글들이 있었다) 써서 오탈자 체크를 위해 몇 번이고 읽으면서까지 이런 공간에 올리고 싶은 이유가 뭘까, 나는 칭찬이 듣고 싶은 걸까, 남의 불행을 전시하고 싶은 걸까, 내 직장과 직업과 노동은 과연 내게 뭘까.
그 많은 질문에 썩 괜찮은 대답을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다.
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나는 내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덧붙여 이 순간들은 모두 내게 소중하다는 사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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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핑'이라는 밈이 유행했다. 공연이며 사고 싶은 것에 잔뜩 돈을 쓴 나는 '파산핑'이었다.
나만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지는 않았다. 동료들은 '간호핑'이면서 또 다른 '파산핑'이었고 '돼지핑'이었다. 각종 '가짜핑'들이 판치는 와중에 병동에는 진짜 티니핑 장난감들이 보인다. 원래 그런 곳이다. 기실 '티니핑'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시리즈에 출연하는 각종 '핑'들의 인형과 사탕에 딸려오는 스틱형 장난감과 컬러링북과 키링과 피규어와 색연필과 실제 그들이 나오는 유튜브 영상과 동요의 번안곡들이 존재하는 곳.
뽀로로 밴드, 기송관 위에 하릴없이 널브러져 있는 허스키 봉제인형 (작년에 누군가 두고 간 것을 차마 또 그 누군가가 버리지 못하고 거기 올려 두었다. 병동의 X는 그것을 보고 '멈머'라는 단어를 익혔다), 카드를 꽂으면 해당 동요가 나오는 꽤나 기술력 좋은 그림책, 또다시 뽀로로가 붙은 페트병에 든 보리차와 한 봉지를 다 먹어도 밥 한 공기 칼로리보다도 열량이 낮은 '옹알이 과자', 베어 물어도 그야말로 아무 맛도 안 나는 각종 '떡뻥'들이 보이는 곳. 어른 기준 아주 간단한 검사조차도 그 대상을 '재우지 않으면' 불가한 곳. 그래서 아마 중환자실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진정 약물들을 사용하는 곳. 지겹게도 울고 악쓰는 소리가 들려 진이 빠지는 곳. 나의 미워할 수 없는 일터.
그래. 나는 이곳을 아주 미워할 수는 없다. 왜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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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료들은 '저러면 목이 더 아프지 않나' 할 정도로 우는 신환이 응급실에서 올라오면 수액 세트 봉지를 마구 비비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초기정보조사지를 작성하고, 주 보호자 외에 한 명쯤은 더 올라온 보호자에게 애를 안아 달라고 부탁한다. 아마 그래도 혈압은 절대 재 지지 않을 것이며 애는 파란 옷들로 가득한 그 광경에서 '엄마 여기 있는데~ 어, 아빠도 여기 있는데~!' 하는 우리의 말에도 (똑똑하게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운다. 울지 않는 애들은 특별하며, '진상'이라고 분류될 법한 보호자들은 응당 이곳에서 더 자주 등장한다. 글쎄, 진상이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부모라는 점은 그들을 그리 불리게도 만든다. 나와 동기들은 몰랐다. 그들이 진상인지. 순환 근무를 하던 레지던트들과 타 부서 사람들이 이 병동의 일화를 들으면 그제야 알려 준다. 여기 진상들은 차원이 달라요, 하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도 사랑과 관심에서 시인한 것을.
애들은 귀엽다. 그들이 신은 크록스에 덕지덕지 붙은 아기상어 지비츠와 핑크색과 보라색에 레이스까지 달린 머리핀과 어른들과는 다른, 더 알록달록한 무늬의 환자복까지. 귀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은 사랑이 맞다. 부모들은, 머리카락이 잔뜩 빠져 있거나, 목에 꽂힌 관으로 가래가 끊이지도 않고 흘러나오는 그들의 상체에 섬세한 무늬의 손수건을 대어 놓는다. 절대 귀엽거나 예쁜 것들을 닮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참으로 귀엽고 부드럽고 가벼운, 질 좋은 옷을 입혀 놓는다. 수술자국이 드러나 있거나 뼈가 한쪽으로 푹 꺼져 있는 그 까까머리를 안고 미안한다고 속삭인다. 내가 머리맡의 불을 켜면 사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 눈을 가려 준다. 물론, 빽빽거리며 울며 발악하는 애를 붙들거나 그만 울으라는 윽박지름도 없는 그들의 보호자들이 가끔은 몹시 얄밉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나쁘게 굴어야 한다. 아, 뭐 일단 그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그들에게는 '나쁘고 무서운'사람 이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여하튼, 이곳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이 존재하는 장소를 단 한 군데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말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이곳에는 있다. 애초에 0 또는 1일뿐인 것이 이 사랑의 문법이다. 변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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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우는 애가 재원 했던 적이 있다. 그런 적이 너무 많아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미친 듯이 울고 난리 치는 그 아이를 붙들고 처치를 끝낼 때까지 나는 2초에 한 번씩 그 침상에 있던 뿔이 붙은 도깨비 같은 자주색 티니핑을 응시하며 마음을 잡았다. 눈이 얼굴의 반만 한 그 멍청한 플라스틱 장난감을 보며 '다했다, 와, 진짜 다했다. 아니, 아팠어? 나 아픈 거 안 했는데? 스티커만 바꿨는데? 이제 푹신한 거 붙일 건데?' 같은 말을 하면서.
병실을 나오며 이 병동을 '아야핑의 땅'이라고 이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플 수밖에 없는 아야핑들도 있고, 그런 통증이 없더라도 '아야'를 무슨 타령처럼 소리쳐 대는 개체들이 머무르는 곳. 아야핑의 구역. 근데 구역이라고 하면 무슨 동물 보호 구역 같은 제한된 느낌이니까, 또 언젠가는 없어질 임시 제도 같은 그런 느낌도 들어서. 그냥.. 땅으로 붙였다. 그럼 나는 이곳의 수호자인가? 아니지. 수호자라고 하기엔 권력도 힘도 없다. 그렇게 나는 '아야핑의 땅 Lv.1 노동자'가 되었다. 나 혼자서.
그들은 몇 명의 가디언에게 사랑받으며 며칠을, 또는 몇 달을 이곳에 머무른다. 슬프게도 피를 나눈 가디언들이 없다면, 뭐, 대외적으로는 명확한 따뜻함을 베풀 줄 아는 이곳의 노동자들과, 또 꽤나 어린 아야핑들에게 관대하게 꾸며진 제도들의 도움을 받고 다시 본연의 땅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보호받고 관심을 받는 존재.
이곳에는 그런 아야핑들이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다.
두 가지가 있으면 아야핑의 땅이다. 내가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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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야핑의 땅은 그렇게 어느 건물에 국한된 곳이었다.
2주, 열흘 새에 두 명이 다른 '아야핑의 땅'을 거쳤다.
살아오면서, 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다. 부여한 만큼 나는 아프고 기쁘다. 좋았든 나빴든 결국은 내게 홀로 돌아오는 부메랑이 되기에 무언가를 덕지하게 덧붙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잘 안 됐다.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몇 년에 걸쳐 확인받았다. 그러지 않으려는 것도 힘들어서, 그런 노력을 차라리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무슨 설정을 껐다 켤 수 있는 로봇도 아니고. 그리고 불행히도, 다행히도 사람은 어쨌든 많은 것에 결국은 익숙해지게 되니까. 이렇게 내 식대로 겪다 보면 또 다른 방식으로 익숙해지게 될 테니까. 괜히 힘 빼지 말자고, 그냥 생긴 대로 살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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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달리기를 하고 있다. 근무 전이 될 때도 있고, 끝난 후가 될 때도 있다. 근무 전인 날이었다. 해가 짧아져 캄캄했다. 하루이틀 일한 것도 아니고, '쌩신규'시절은 벗어나서 정말 진지하게 '출근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한 지는 꽤 됐다.
하지만 그날 나는 정말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병동 전체에 밤이면 울리는 산소포화도 저하 알림이 그 전날은 유독 컸다. 한 번도 듣기 좋았던 적이 없던 소리지만 그날은 더 싫었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이라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출근하기 싫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도 하는 달리기였는데, 그날은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근무 시작 직전, 그 알림음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났다. 사후처치를 도와야 했지만 병상에 서서 울기만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말끔하던 피부와 몸은 패잔병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몇 주만에 병세는 그렇게 온몸으로 티를 냈다. 순수하게 그 모습이 충격이었던 게 얼마 전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친구는 떠나 버렸다.
병동 복도 끝의 1인실에서 새 환의를 가지러 가는 그 길이 엄청나게 길었고 온통 슬펐다. 모든 벽이 울고 있었다. 나처럼. 그래. 사실 그 복도에서 울고 있던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분명 사람인데, 의지로 참을 수 있을 텐데 잘 안 됐다. 우는 내가 쪽팔렸고 일을 못 하고 있는 내 능력치가 창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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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도 길었던 근무가 끝난 다음, 병원의 빈소를 찾았다. 작년엔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그때는 늦봄이었고, 초여름이었다. 계절이 같았다면 비슷하게 대응하려고 그때를 떠올렸나. 모르겠다. 아니다. 어떤 죽음이 동일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친구를 보내고 뜬눈으로 낮을 샜다. 밤근무였으니 자야 했는데 잠이 안 왔다. 뭘 해도 그전 일을 덮을 수 없었다. 돈을 쓰고, 전화를 걸고, 이것저것을 구경했다. 낯선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답답한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며칠 전에 한 명이 더 떠났다. 나는 그날 내 집이 그렇게나 춥고 천장이 높은지 처음 알았다. 내게 음성메시지로 카톡 답장을 하거나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주사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점심때, 약을 자꾸 증량하고 특이한 호흡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기록을 보면서, 나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오늘은 울지 말아야겠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일을 도와줄지 상세히 생각했다.
그 계획 아닌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네 번째였다. 내가 말을 붙이고, 장난을 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이들이 이렇게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이. 장례식은 그만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안 가면 될 일이었다. 누구도 나한테 가라고 한 적 없었고 오히려 엄마아빠는 내게 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가야겠다고 느꼈다. 가야 내가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스운 일 아닌가. 내가 그들의 부모도 친지도 가까웠던 그 무엇도 아닌데. 이렇게 마음이 쓰이게 되는 것이. 작년의 두 명은 그래도 나와 몇 달을 봤다. 대화다운 대화도 나름 몇 번은 했다. 그런데 이번의 두 명은 그것도 아니었다. 왜일까,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던 때의 모습을 내가 기억해서? 역시나 말을 붙이지도 말아야 했던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을 그렇게 기억하려고 말을 걸고 이렇게 떠올리기 위해 대답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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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하기 위해 말했다. '어유, 그랬니. 나처럼 커서 돈 벌어서 너 맘대로 다녀. 알겠지? 그땐 엄마아빠 허락 없어도 갈 수 있어, 알겠니? 부럽지?' 하고. 아이브를 좋아하는데, 엄마는 콘서트에 못 가게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초등학생'의 생활이란 전적으로 부모님의 손안에 있는 거니까. 그랬더니, 근데 아빠는 된다고 했어요,라고 뒤로 길게 묶은 머리를 한 그 애가 쫑알거렸다. 뭐야, 그럼 아빠 졸라 봐야겠네. 됐다. 그럼. 그러자 그 옆의 엄마는 차분하게 '아빠랑 얘기는 해 볼게'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잔뜩 약 올리는 표정으로 '잘 졸라봐, 알겠지?'라고 했다. 기억에 남는 대화는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그리고, 알림 문자를 보내기 위해 열었던 전화번호 페이지의 아래쪽에 있는 그 친구 집의 주소. 하필이면 내가 거진 매일 뛰는 그 코스에 가득한 아파트들 중 하나였다. 그 두 가지. 거기에, 최근에 커튼을 열었을 때, 입대를 앞둔 군인마냥 짧아진 머리에 아주 바보가 되어 버린 그 모습이 나를 묶어놓았다. 근무 내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지겹도록 드라마틱한 생각을 관두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생일 겸 동기들과 함께 일한 겸 모인 그 자리에서 나는 잔뜩 마시며 떠든 것으로 그 친구를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보내기는 무슨, 나는 무엇이든 내 눈으로 봐야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분명, 오열하는 부모를 옆에 두고서 숨이 끊어진 그 몸에 옷을 갈아입히고, 콧물이 가득해진 마스크를 바꿔 끼고, 유니폼을 벗고 다 지워진 입술에는 틴트를 다시 바른 채 동기들과 술집에 들어가기까지 했으면서, 뭘 그렇게 더 보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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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누가 하나 죽었다고 해서 그리 살갑게 변하지 않았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처리하지 못해 엉망이 된 마음의 나를 빼고서. 콘서트 영화 특전을 부탁한 내게 직원은 '관람이 끝난 후에 드리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나는 상영시간이 다섯 시간은 남은 볼품없는 지류티켓과 팝콘과 일층 매점의 홈런볼 등을 들고 빈소를 찾았다. 안 갔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호수공원과 빈소가 야속할 만큼 가까웠다. 뛸 때마다 아쉬움을 느끼며 괜한 감상에 빠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모두가 다 제각각의 슬픔을 안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던 택시 아저씨의 이야기도 슬펐다. 세상엔 대신 죽어 마땅한 놈들이 너무 많았고, 생은 때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잠도 안 자고 영화관과 포토이즘까지 거쳐 그곳으로 향한 나 자신도. 그 여정 내내도 나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내 마음이 그래야 편하다는 것만이 답이었으나,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이 남의 깊고 극적인 불행이 내 삶의 또 다른 소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가, 하는 마음. 뭐, 언젠가는 나 자신도 잘 알게 되겠지. 지금은 모르겠다. 어찌됐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은 생 깊이깊이 후회할 것 같다는 것만이 나를 그렇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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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주절주절 늘어진 내 말에 성수동 타로집의 아줌마는 불교 이야기를 했다. 사후 12 지옥을 거쳐야 하는 어른들과 달리 애들은 하나의 지옥만 거친다고. 불효의 지옥. 그리고 사고나 병으로 떠난 애들은 그마저도 안 거친다고. 또, 더 빨리 윤회한다고. 그러니까 너는 그 아이들을 얼른 보내줘야 한다고. 그렇게 다시 날 수 있게 보내주고 행복을 빌어 주라고 했다.
나는 그 미신 같은 교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 방식으로 세 명을 다시 보냈다. 가엾은 만큼, 그리고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까지 이렇게 슬프게 한 만큼 더 잘, 행복하게 살라고 바라고 빌어 주었다. 멋지고 키 큰 농구선수 고등학생으로, 아이돌 연습생이나 가수로, 급식도 잘 먹는 통통한 초등학생으로, 그렇게 다시 나라고. 그런데 이렇게 한 명이 더 가버리다니. 그게 마지막일 것처럼 울고 불고 난리를 쳤는데 또였다. 의미도 모르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던 국화 대신 내가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들을 사진 앞에 놓고, 또다시 하고 싶던 말을 꾸역꾸역 늘어놓았다. 친지들이 모여 나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장례식이라는 게 다 산 사람들의 생쇼 아닌가. 그래서 그다지 창피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너를 떠올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꺼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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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를 돌아 나오던 계단에서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했다.
네 번의 식, 그 비현실 같은 기억들에서 뚜렷하게 남은 것 하나는 내가 그들의 행복과 건강과 못 다 이룬 꿈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랐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나조차도 장담 못 하는 나의 많은 모습들을 담은 내 인생 중에서 유일하게 진심이었고 사실이었던 때였다.
나는 산 사람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검사결과와 수치와 사진과 크기의 비교로 일을 진행시킨다. 의미나 다짐 같은 건 이곳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나는 알게 모르게 이곳의 방식을 닮았다. 하지만 죽음 따위는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받아들이며 산다. 가끔 믿음이나 희망에 기대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자세는 대체로 절망과 단념에 기반한다. 그러나 그 밝게 웃는 사진들 앞에서 그들의 또 다른 안녕을 온몸으로 바라며, 못다 이룬 꿈같은 건 이 자리에서나 말해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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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뒤 누운 그들에게, 닿지 못할 말을 허공에서 전하는 그곳이 또 다른 아야핑의 땅이었다. 바람과 희망이 가득 맴도는 그곳. 그들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물 곳. 그렇게 나는, 바람은, 후회는, 죽은 이에게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울면서도 생각했다. 살아있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죽은 애가 그 언니와 함께 콘서트 영화를 보고, 포토이즘에서 사진을 찍고, 포토카드 특전을 받고, 어쩌면 응원봉까지 사서 진짜 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가기를 바라는 그런 의미뿐인 일을 하면서, 나는 더 이상 바라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행하든가 아예 마음에서 지워 버리든가 여하튼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겠다고 반복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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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사진만 단독으로 나오는 포토프레임을 받기 위해 찍었던 포토이즘은 어찌 된 일인지 나와 J양과 A양만이 인쇄된 사진이 두 장씩 나왔다. 미안해, 나 기억이나 하니. 그래도 이쁜 언니들도 같이 나왔으니 그건 좀 봐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 사진의 QR코드를 스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했다. 휴대폰에 저장했다. 표면적으로는, 핑크 블라우스에 검은 블레이저를 입은 내가 나온 그 사진들과 영상. 하지만 그 안에 그 친구가 있다. 뜬금없는 아이브와 사진을 찍은 건 다 그 애가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어떻게 해도 받아들일 수 없던, 빈소를 떠나와 어제와 오늘을 지낸 지금까지도 둥둥 떠 있던 것 같은 그 사실과 그날을 이제는 정말 꺼내 들어 받아들이기 위해 이 긴 글을 썼다.
죽음도, 그들의 죽음도 나와 다른 이들의 죽음도 결국 이 생의 한 페이지임을 새겨놓고 또 나아가기 위해, 그렇게 나의 방식으로 무뎌지고 강해지기 위해서. 특별한 사건이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는 없으니까. 생판 남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의 끝을 내가 그렇게 슬퍼한 만큼 내 앞의 삶을 더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그 눈물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나는 포기하지 않고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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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그렇게 N번째 아야핑의 땅에서 누군가의 다른 행복과 건강을 마음을 다해 비는 날이 왔을 때, 사실은 일터에서 마주친 얕은 인연인 그들이 나를 너무 깊이는 흔들어놓지 않도록.
또, 나는 죽은 이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내 생의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어쩔 수 없는 '산 사람'이니까. 이제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놓아줄 것이다,
병원에 존재하는 아야핑의 땅에서 떳떳하게 노동하며 내 삶을 견인하고, 그 온갖 핑들과 가끔은 웃고 짜증 내고 가능한 날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그렇게 내 생에 펼쳐진 모든 날을 보내고, 또 받아들이다 언젠가 떠나는 날에, 그제야 후회하고 바람을 품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