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몇 키로예요, 몇 칼로리예요, 두 개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몇'이 들어가는 질문에 한해 대부분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나는, 감히 복수형을 쓰자면,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답해 줄 수 없다. 그 질문들에 뒤따르는 요청 사항들을 들어줄 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묻는다. 묻지 않는다고 끝이 아니다. 우리는 투약라벨을 가리고, 약품명을 가리고, 어떻게든 체중계의 숫자를 못 보도록 몸통을 재빨리 돌려 내려고 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차라리 '바보'였다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소녀들이었지만 가끔, 소년도 있었다. 나는 내가 떠올리고 있는 소년과 소녀들이 가엾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다. 당연하게도, 나도 답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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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의무기록에는 진단명이나 검사 수치보다 그들이 살아오면서 있던 에피소드들에 대해 더 길게 적혀 있는 경우가 잦았다. 엄마, 아빠와의 유대 관계, 교우 관계, SNS에서 만난 친구, 유학, 따돌림, 이혼, 재혼, 가정폭력, 성적, 두꺼운 다리, 이성 친구, 아이돌 가수, 더 깊은 개인사, 더더 깊은 개인사, 하루에 운동장 열여섯 바퀴, 밥 두 숟가락, SNS를 통해 배송받은 '물질', 그리고 '수액 맞기 싫어요, 퇴원하고 싶어요', 등.
여타 진단을 받은 환아였다면 '상담 진행하였습니다'로 시작해 네다섯 문장의 정신과 협진 회신으로 끝났을 내용들이 촘촘한 글씨로 가득 적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은 행동들, 어쩌면 징후들을 잡아내기 위해 그들의 보호자와 그들을 관찰한다. 수치의 등락을 알린 노티보다는 '검사실에 가기 거부함' 'irritability 있음' '공격적인 행태를 보임' '치료에 비협조적임' 등의 진술문을 간호기록에 추가하는 날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모두 지쳐 간다. 그들은 보통 대나무처럼 꺾이지 않는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렇게 형형한 기운이 나오는지 놀라울 때도 있다. 그리고 안타깝다. '체중 증량 및 전해질 불균형 교정'이라는 치료 목표가 달성된다고 한들, 그들이 병원 바깥에서 얼마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정말 그 어떤 경우보다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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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어떤 형태로 태어났든 체중계 위에서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떡볶이, 마라탕, 티라미수, 짬뽕, 밥, 라면, 치킨, 감자튀김, 아이스크림, 초콜릿, 과자. 나를 망치러 온 나의, 우리의 구원자들. 우리는 잠시 행복하게 먹은 후 내내 절망한다. 우리, 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행운인 줄 아시면 됩니다. 차라리 갈망한 적이 없었으면 나았을 그 음식들.
탄수와 당 덩어리들. 이 망할.. 아름다운 것들.
아름다운 것.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이란 과연 어떤 걸까,
커튼을 닫아 그 날카로운 공기로부터 벗어난 뒤에 한숨을 몰아쉬듯 재차 생각했었다. 사례는 다양했지만 기억은 비슷하다. 아이는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소리를 지르며 몸에 꽂힌 모든 것을 뽑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허공을 째려보고 있고, 엄마는 성경책과 공책을 캐비닛 옆에 놔둔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커튼 밖에서 기척을 내고, 커프를 더 작은 것으로 바꾼 후, 그 어느 것도, 그게 설령 그 아이의 무의식이라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묻는다.
"이거 언제까지 맞아야 돼요."
차라리 명령 같기도 하다. 큰 소리도 아니고 끝을 높이지도 않는 그 문장은 '당장 빼 주세요' 나 다름없다. 떠올리고 있는 지금도 숨이 딱 막히는 질문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게 어린아이들과 마음은 더 여릴 괄괄한 부모들이 가득한 이곳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꾸덕하고 비린내 나는 허연 수액은 네가 퇴원하기 직전까지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기 싫다. 무섭다. 그렇게 말하면 이 소녀가 어떻게 돌변할 것일지. 엄마가 나를 본다. 제가 어떤 대답을 해 드리는 게 나을까요.
나는 그 짧은 순간 엄청나게 많은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는 듯한 피로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딱히 속 시원하지 않지만 절대 거짓은 아닌 말을 한다.
"밥 잘 먹으면 뗀대."
'떼는 것'의 주체는 내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문장을 뱉자마자 몸에는 긴장이 들어간다. 제발, 소리 지르지 마, 괜찮니,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이 정도 말은..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체온을 재고, 중심정맥관이 꽂힌 부위가 멀쩡하고 수액이 속도에 맞추어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한 후 이따 보자고 하고 커튼을 닫는다.
아, 잘 넘겼다, 가 아니다. 심전도 찍고 오라고 해야 한다. 나는.. 다시 커튼을 연다.
"하늘아, 어머니. 1층 심전도실 가셔서 이거 찍고 오셔야 해요. 여기."
엄마의 눈빛이 뭔가를 말한다. 나는 그제야 마스크 뒤 입을 앙다문다. 이 소녀는 어제도, 그제도 검사실에 가기를 거부했다. 하필 오늘의 내가 이 임무 아닌 임무를 떠안게 되다니.
엄마가 나를 돕는다.
"가자. 너 어제도 안 갔어."
".."
그녀는 커튼을, 아니. 하얀 TPN이 들어가고 있는 수액백을 노려본다.
"야."
그녀는 그제야 엄마를 째려본다. 아. 왜 주치의는 병동기기사용으로 처방을 내주지 않은 걸까. 왜 어제의 이브닝번은 이 처방을 바꿔달라고 하지 않고 놔둔 걸까. 왜 나는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걸까.
나는 할 일이 많다. 혼자 힘으로, 걷든 휠체어를 타든 어쨌든 거동이 불가하지 않고 의사소통이 되는 환아에게 종이 한 장 쥐여주면 뚝딱 찍고 올 수 있는 심전도 따위로 이렇게 씨름할 시간이 없다. 나는 괜히 마음을 다잡는다. 이게 내가 할 일이라고, 할 일을 하자고.
"하늘아. 다녀오자. 어제도 안 가서 검사결과를 한 번 봐야 돼. 얼마나 나아졌는지 보고 와야지. 응?"
그녀는 여전히 엄마를 째려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짐짓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제발, 나의 그 무엇도 이 친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를 여전히 바라면서. 그리고 말을 고른다. 제발, 거짓말은 아니되 이 친구를 회유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지 열심히도 머리를 굴려 보지만.. 도통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러다 엄마와 눈이 맞는다.
"제가 타이를게요."
엄마는 검사 용지를 받아 들고 침상 테이블을 내린다. 애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엄마를 더 째려본다.
나는 알겠습니다. 하고 커튼을 닫는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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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그 자리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나를 본 다른 간호사가 '가던데, 아까? 휠체어 타고 갔어요' 한다. 다행이다. 가긴 갔구나. 그녀 앞으로 늘어선 처방들에서 ECG가 '시행'으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바뀐다. 그리고 전화가 온다. 내가 받는다.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A병동.."
"이하늘 담당 계세요?"
"아, 네.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는 제발.. 난동을 부리다가 중심정맥관을 잡아 뜯었다는 말만 아니기를 그 짧은 시간에 바라고 또 바란다.
"환자분 너무 이리터블해요. 진료과에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찍긴 찍었는데 너무 협조가 안 됩니다. 소리도 많이 지르고..."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리터블, 그치. 이리터블하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이번 달 인턴이 어땠더라. 만약 병동에서 찍게 되면 그 사람은 굴하지 않고 찍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겠는가.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셀프로 그걸 뺀 건 아니니 다행이다. 이게 과연 다행이라고 생각할 일인지는 좀 나중에, 많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나 바쁘다. 당장 아침 랩 보고 바뀐 수액 조성에 따라 그녀의 플루이드를 또 바꿔 달아야 한다. 이번엔 또 뭐라고 하려나. 아. 힘들다. 이렇게 조여드는 마음이 더 힘들다.
아마 그 소녀의 마음은 지옥이겠지. 가보지도 않은 감옥이 이곳에 있다. 어쩌면 그 소녀의 마음이 이미 지옥이고 세상이 감옥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