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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드 라이프

포케와 담배와 장난감

by 이븐도




근래의 근무는 늘 빡쎘다.

그런 와중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 빡센 사람들의 동네였다. 멀쩡히 차려입은 사람들이 멀쩡한 곳에 모여 담배를 피웠다. 버스 정류장인가 했더니 흡연부스였다. 판교에서는 어디 쏠리듯 뭉쳐서 피우는 느낌이었는데 거기서는 좀 더 퍼져 있었다. 늘씬하게 크고 촘촘히 포진해 있는 건물들만큼이나. 사람들도 지역을 닮나?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을 동네라 그런지 스타벅스에는 먹을 게 진작 다 나가고 없었다. 바나나도 없고 과일도 없었다. 샌드위치도 없었다. 여의도. 여기서 그렇게 일하면 돈은 얼마쯤 벌려나, 1억? 1억을 받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일까. 골초가 되어 폐가 썩는 것쯤 무시할 정도?



시꺼먼 태블릿 파우치 위에 캐치 티니핑의 매지컬 컴팩트를 올려놓았다. 이쁘다. 아주. 반짝거리고 단단하고 유치하다.

딸기우유색 본체, 금박 입힌 하트 모양. 왕 커다란 큐빅 같은 연분홍색 하트, 그 위의 작고 빨간 하트.

유치. 나는 이 단어가 좋다. 잔뜩 화려해도 안전하다는 뜻이잖아. 안전. 나는 그렇게 의미부여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안전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한테 장난감을 사주면서 살아야겠다. 다른 방법을 고를 게 아니면 말이지. 안 그만두는 한.



그리고 이 글은, 가깝고도 먼 미래에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뺑이치고 있을 나를 위한 것이다.






택시를 타는 일이 잦았다. 늦게 끝난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달리기가 아니면 그 기분의 순환을 끊어낼 수 없는 것 같은 날들이 늘었다. 왜 이런 사람이 되어 버린 건지 후회 아닌 후회가 들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늦으면 정말로 밖을 나가는 게 위험할 것 같았다.


그냥 좀 다른 스트레스 푸는 법을 익혔어야 했다. 달리기 말고. 하나하나가 다 화가 났다. 택시를 불렀다. 차에 타자 비가 잔뜩 내렸다. 밤 열두 시 반이 넘어 이런 비를 맞으며 러닝? 오바잖아.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좀 건전하게 살겠다는데 왜 이런 하고 지루한 나를 가만히 못 놔두냐고. 택시가 빗길에 느리게 갔다. 금요일. 비 오는 금요일 밤. 얼른 집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뭣들 하시는 건지 사람들이 많았고 차가 많았다.


그냥 사고가 나도 좋으니까 좀 빨리 가고 싶었다. 다 박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몸이든, 이 차든. 다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인을 되짚어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달리기가 필요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운동복을 입고서도 한 시간 반을 휴대폰만 봤다. 다 지나간 팬싸인회 영상, 음악방송 클립, 별로 관심 없는 맛집들, 이미 옷장이건 수납장이건 가득 찬 옷들을 또 추천해 주는 포스트들. 지겨웠다. 냉장고 속 술이나 꿀떡꿀떡하고 잠들어 안 일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없었다. 하루짜리 오프였다. 나가서 달리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안 떠올랐다.


뛰는데 비가 왔다. 축축한 오전, 거대한 식물원 속을 뛰는 기분이었다. 죽는 거? 쉽지 않지. 떨어져서 죽으려면 저기 보이는 초고층 오피스텔 건물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했다. 올라가서 뛰어내린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까딱하면 몸만 어설프게 살아있는 나를 엄마나 아빠나 나의 뚱뚱하고 착한 동생이 간호해야 했다. 간병이라 말하고 끊임없이 기저귀를 갈고, 또 갈고 몸을 닦아주고 약을 빻아 흘려넣어주는 일의 반복. 그건 좀 그랬다. 못할 짓이다.




약물 중독? 약 먹고 죽겠다며 까불다 병원으로 오게 된 사람들을 내가 좀 많이 봤나. 우스운 일들이었다. 정말 할 거면 진짜 전해질을 혈관에 바로 꽂는 짓 정도는 했어야지. 핏줄이 타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만약 그랬다가, 내가 그 강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해 바늘을 빼고 바로 119를 누른다면. 심장이 대충 부풀거나 꺼진 후에 또 살아가야 하는 그 삶은? 그리고 나는 그런 맹랑한 계획들을 실행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죽으면, 못 죽고 어설프게 살아남으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야?


빗물에 눈을 뜨기 힘들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금 조심해야 했다.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빗길에 달리기. 귀찮기만 했다. 달리는 동안 비가 그치고 바람막이가 말랐다.






한심한 건 차라리 지금이었다. 아무것도 못할 거면서 생각만 하는 거. 그 생각을 좀 그만 하고 싶어서 달리러 갔다온 건데 반은 실패했다. 씨발, 이 지겨운 인생. 죽고 싶으면 먹지 말던가. 그런 나는 포케를 시켰다. 하나짜리 그릇. 일회용기에 담겨 오는 소스 뚜껑을 여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부어 달라고 체크했더니 너무 매웠다. 다 까진 입가가 드레싱에 따끔거려 아팠다. 어쩌면 그간 내가 불행했던 건 립밤을 아무리 바르고 자도 따갑게 낫지 않는 입술 때문일지도 몰랐다.


훈제연어, 닭가슴살, 훈제오리, 현미밥, 양상추, 또 뭐더라. 그 상큼하고 기름지고 든든한 밥을 퍼먹으며 생각했다. 하와이 좋다는데. 햇빛 잔뜩 받으며 짠 파도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담그고 놀다가 이런 거나 한 그릇 뚝딱. 지겨울 정도로 또 물에서 놀다 속에서 물이든 음료수 원없이 들이키고는 말끔히 씻고서 쿨쿨 자는 거지. 어떨까. 좋을 것 같았다. 진짜 좋을 것 같았다. 가능한가?




못할 건 없지. 올해의 장기오프 때나 내년의 한 달 휴직 때 비행기표를 끊으면 될 일이다. 하와이, 하와이가 좀 너무 비쌀 것 같으면 괌? 괌도 비슷하잖아. 아냐? 가면 가는 거야. 그런데 왜 찝찝할까.

왜긴, 나는 내가 2천만원을 그렇게 홀랑 버린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잊은 것처럼 지냈지만, 비행기와 숙소를 포함한 몇백 만원을 한번에 결제할 나 자신까지 말끔히 속일 수는 없었다. 입술이 아린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뭘 하고 있나, 싶어서. 그러고도, 이러고, 그러고 싶냐. 아무리 아닌 척 해봐라. 그 사실이 없던 게 되나. 이미 다 비워낸 종이 그릇이 더 꼴보기 싫어졌다. 그러고 싶구나. 그러고도.






운동복을 입고 씻지도 않고서 모든 카톡들과 알림들을 피한 채로 별로 재미도 없는 것들을 보며 생각했다. 뭐라고 생각했더라? 그런데 그럴 때의 상태를 생각한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상태다. 죽고 싶은 상태. 그럼 죽어, 죽으면 되잖아.


근데 그게 쉽냐고. 열받아서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는 재미없는 생각이나 하는 주제에 죽고 싶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책 제목.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누가 나 좀 어떻게 해 줬으면.




답답했고 슬펐다. 아예 직업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나는 그 때 간호학과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 돈을 받는 대가가 왜 이렇게까지 독한 걸까 생각했다. 끊임없이 울리는 알람음, 나를 찾아대는 사람들, 정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필요한 정확성, 병동과 타부서 할 것 없이 지랄같은 인간들, 사정을 알고도 묵인하는 병원 또는 우두머리들, 알량한 월급. 리고 그 반복.

내 노동력과 정신을 다 갈아놓고 받아내는 월급을 특권으로 취급하는 많은 것들. 그리고 그렇게 번 돈 2000만원을 잃은 나. 생각이, 어제와 그제와 지난 주의 많은 장면들이. 골라내려 했더니 막상 떠오르지는 않는 많은 것들이 머리에 찼다. 그냥 다 좀 어떻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이렇게 중독된 것처럼 밖으로 나가 기록도 안 나오는 달리기를 해야만 뭔가를 잊을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면 좀 과한 거 아닌가? 이건 왜 나한테 과할까? 내가 엄살을 부리는 걸까, 4년이나 했는데? 그럼 이거 말고 뭐 할래? 할 줄 아는 게 있나?


언제 끝날까,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까. 기분이 확실히 나아졌으나,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했으나, 정말 그뿐이었다.






하나의 인격이 더 있다면 다르게 살게 하고 싶었다. 아니, 두 개. 한 명은 하와이에서 온 몸이 그을리도록 파도와 한 몸이 된 채 열대과일을 바닷물에 씻어 먹고 스팸무스비를 우적우적 먹다 낮잠이나 자는 삶을 살게 하고, 한 명은 아예 골초에 술에 쩌들어서 살게 하는 거.


그게 티셔츠 쪼가리든 빳빳한 유니폼이든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든, 한 결 한 결에 밸 담배 냄새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잔뜩 그렇게 사는 거지. 잔뜩 젖은 티셔츠, 풀풀 풍기는 담배 냄새, 머리가 다 잘잘잘잘 흔들릴 것처럼 마셔서 취한 상태, 침이 튈 것처럼 내지르듯 부르는 노래. 땀냄새. 아무렇게나 입은 옷. 퇴폐? 타락? 그런 어둡고 폼 나는 건 아닌데, 아무튼 되는 대로 살고 소리지르고 생긴 대로 사는 그 양상.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걸까. 매일의 퇴근길에, 차가 반파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예 다 부서졌으면, 그렇게 끝나버렸으면 했다. 그런 날들을 보내고 소중한 하루짜리 오프를 우울한 척 곱씹는 내가 참 한심했다. 왜 이러고 있을까, 뭐가 어떻게 배가 부르고 어떻게 남아돌아서 이러는 걸까 생각했다. 정말 죽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런 걸 예매했나, 돈 쓸 데가 그렇게 없었나 하며 한 달 전의 나를 비난한 후 하츄핑 뮤지컬을 보러 갔다. 그리고 그다음날 나는 창신동으로 갔다. 동묘앞 완구 거리. 이런 데가 있었다는 걸 지금까지 몰랐다니. 심지어 출근 전이었다. 눈을 떠서 바로 저녁에 먹을 걸 챙긴 후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서울 위쪽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병원을 다녔던 동네의 근처. 주말 대낮. 사람이 많았다.


나는 공연이 끝난 후 찾아본 그 장난감의 어이없는 가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하니 바로 나 같은, 쓸데없는 것에 정성스레 번 돈을 쓰는 다 큰 어른이 써 놓은 글이 있었다. 원가에 구했다고? 주인장은 늦은 시간임에도 구매처를 친절히 알려 주었다.




두 개를 샀다. 요새 가게에서 잘 본 적이 없는 파란 비닐에 담긴 알록달록 핑크색의 박스 둘. 사원님은 그걸 보고 조카 선물 샀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하나는 박스를 안 깠다. 하나는 가방에 그대로 넣어서 퇴근하는 길 버스를 기다리며 한 번씩 들여다봤다. 왕유치하고 왕반짝거렸다.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하츄핑 피규어는 핑크색 큐빅이 박힌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다. 진짜, 왕유치했다. 유흥에 쩌들거나 눈부신 햇빛 아래 개헤엄을 치는 판타지대로 살지는 못했고, 티니핑을 보고 와서 번쩍이는 연핑크 하트가 붙은 장난감을 사서 만지작거렸다.






담배를 피운다고 하면 사람들은 힘드시냐고 할 것이다. 양주를 한 병 샀다고 하면 멋진 취향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여의도 흡연부스 안의 직장인들은 삐딱히 서서 꽁초를 태울 뿐 핑크색 장난감을 들여다보며 웃지 않는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5월의 야장에 앉아 시원한 잔을 들이켜 근심을 희석한다. 쿨하게. 긴 말 없이. 찌질하게 앉아 이런 걸 써대는 대신.


어른다운 일이다. 조용하고 빠르고 이상하지 않은 방식. 사실 안 될 이유도 없었다. 누가 하지 말래? 누구도 나한테 그런 걸 멀리하며 살라고 하지 않았다.






아빠는 늘 담배를 끊는 중이었다. 기억하기로 두 번 정도는 '끊은' 상태를 유지했다. 얼마 전에 '300일 돌파'라고 단톡방에 올린 것을 보니 이번이 세 번째가 될지도 몰랐다. 아빠, 나도 필까, 하고 물어본 적 있다. 어때? 좋아? 라고 물으니 귀찮아, 라고 했다. 귀찮다고? 좋아서 피우는 거 아냐? 귀찮지. 안 피우고 싶은데 나가야 하니까.


하참, 나. 이건 뭐 어린왕자에 그 술 마시는 아저씨도 아니고. 어쨌거나 그렇게나 좋다기보단 중독되어 버렸다는 의미였다. 담배까지 들이지 않아도 내 인생엔 이미 그런 게 많은데. 음. 그래서 고민했다. 그런 거라면 좀 그렇다, 하고. 그리고, 애들이 나 담배 냄새 나는 거 알 데. 그러면.




술, 맥주? 맥주는 마시는 빵이라는데. 그럼 그냥 빵을 한 덩이 먹으면 안 될까. 쉬도 안 마렵고 집 갈 때 걱정도 안 돼. 다른 술? 나 내일 출근해야 돼. 그리고 취한 채로 그 핑크색 뮤지컬은 어떻게 보러 가. 내게 술은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보드카가 나았던 이유는 취한다는 목적을 방해하는 요소가 가장 적은 종류였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나는 술을 향유할 사람이 못 됐다.


그리고.. 와이키키? 지상낙원 같다는 그 휴양지로의 여행? 너 거기서 스스로를 한 번이라도 안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 정말? 2천만원을 피싱범에게 스스로 건넨 내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음. 이런 인간이 무슨.

어쩌면 이게 당장의 내 최선이었다. 굳이굳이 그 위험한 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가고 일곱 살 짜리 애들도 일주일쯤 만지작거리다 처박아 둘 장난감을 사는 거. 정말 그랬다. 그거 말고는 내가 아는 방법이 없어서 그랬다. 내가 건강관리에 미친 갑부라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나는 그렇게 생긴 사람이었고, 당장 내가 맞닥뜨린 상황이 그랬다. 장성한 어른들의 그 폼 나는 몇 가지 방식들은 지금의 내가 사는 구조와 안 들어맞았다.

그리고, 내 건강과 재산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걸 보전할 노동력도.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아는 탓에 어떤 예감도 들었다. 유흥, 폭식, 탕진. 한 번 뚜껑을 열면 나한테는 끝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냥 알 수 있었다. 느껴지는 거지. 마시는 빵이 어떻고 냄새가 어떻다는 그 단단한 문턱을 넘는 순간 그게 어떤 높이의 어떤 허들이라도 내게는 한계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맞잖아?

나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니었으면 이렇게 참고 사는 듯한 기분도 안 들지. 온갖 폭력적인 시나리오를 쓰며 택시에 반쯤 누워 퇴근을 하는 근래의 밤마다 그 사실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입고서.






뭐든 하려면 끝까지 할 것 같은 예측. 다 부수느니 어쩌느니 하는 드라마틱한 생각을 멈추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주제 파악이자 예감이었다. 정말 그랬다. 내가 무결하고 순수해서가 아니라, 그냥 절제를 모르는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답답한 거였다. 할 수 있는데 못 하니까. 못 하는 척 이유를 잔뜩 대고 있으니까.






2000만원을 잃지 않았다면 어떤 가책 없이 그게 괌이든 하와이든 갈 여행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하나는 알 수 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디에 얼마를 들여 가든 나는 행복하기 힘들 거라는 걸. 행복은 와이키키에도 괌의 가짜 포케 같은 것에 있는 게 아니니까.

없어, 그런 건. 정말 적어도 진짜로 몇 달을 그렇게 일해 모은 돈을 한순간에 내 손으로 갖다 바친 내 인생에는 없다. 그런 식으로 도망쳐서는 안 돼. 그 정도는 알아.


끝났다는 생각을 그렇게도 하지만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인생이든 내 쓸데없는 소비였든. 하지만 그래서 나를 그만 비난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술자리며 담배에 쓰는 돈이나 이 돈이나.



물론 아예 안 쓰고 차곡차곡 모으는 게 최고겠지.

그런데 나한텐 이 생업이 좀 버겁다. 여의도에서 그 초고액 연봉을 벌어들일 그 사람들이 겪을 스트레스만큼은 아니겠으나 나한테도 이 월급쟁이 생활이 유독한 건 마찬가지였다. 선후관계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설명할 줄 알면, 뭐 달라져? 그렇다고 내일 그만둘 것도 아니고. 난 못 그만둔다. 그게 내 빚이라는 걸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맛있는 포케를 입안 가득 씹으면서, 괌과 하와이 모두에 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며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천만원은 내가 나한테 진 빚이라는 걸.






이게 내 제 3의 인생이었다. 유흥에 절어 월급쟁이의 삶을 이어나가는 거, 당장 모은 것까지 다 탕진해서 매 오프 때마다 가깝고 먼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는 거 말고. 그 둘 다 내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나 또 마냥 쉽게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인생에 그 정도는 좀 허용해 주기로 했다. 내 장난감이 조카의 것으로 보이고 담뱃갑이나 라이터처럼 어디서든 당당히 꺼내보일 수 있는 게 아니면 어떤데. 어차피 그 둘도 한심한 것이긴 매한가지야. 안 해도 되는 소비이며 취미인 건 사회적으로 표면적인 지탄만 받는 그 술담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안 한 거잖아? 그리고, 스스로 알잖아. 한 번 열리면 끝이 없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참은 거였다. 금기라도 걸어 놓은 것처럼 사는 게 답답하고 싫었는데, 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내가 알아서 그은 선이었다.






하고 싶으면 해. 하면 된다. 뭐든. 버전 3의 인생. 지겨우면 1로든 2로든 바꿔. 내 인생이야. 앞으로도 딱히 나아질 건 없어 보이나 나빠지는 건 또 얼마든지 가능한 게 삶이라고.


정말로. 지긋지긋한 병원. 진짜 개 뭣 같은 병원의 노동자가 아니라 입원 환자로 올 생각도 하고서, 해. 알콜 중독자 아줌마들? 후두 잘라내서 말도 못 하는 목에 구멍 뚫린 할아버지들? 너도 더 빨리 되고 싶으면 해. 하면 되지. 나를 그렇게나 볶아댄 병원에서 지겹게 봤잖아. 정말이야.

비꼬는 게 아냐.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언젠가는 그렇게 하면 되지. 알면 못 하나? 못 하는 건 없어. 선택은 내 몫이야. 안 잡혀 가. 범죄도 아니고.



그러니 당장의 이 인생에서는 이렇게 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해결되거나 멈추지 않는다면 이렇게 가야 하는 게 나았으니까. 나한테는. 이 정도면, 정도를 모르게 화려하게 반짝이는 싸구려 장난감이라면 좀 허용 가능한 거 아냐? 뭐 어때. 정말 뭐 어때. 언젠가는 다른 방법을 내가 선택할 수도 있는 거지.

하긴, 담배는 맞고 장난감은 틀린가? 그딴 게 어딨어.




+


지독했던 나이트가 끝난 후, 사전투표소로 가서 졸려 죽겠는 정신을 붙들고 종이에 도장을 찍고 왔다. 멀끔하게 입은 주변의, 또는 저기 법원 등지로 갈 직장인들이 보였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본인들의 모습이 꽤 폼나 보인다는 걸 알까. 사실은 다 시궁창같이 일할지라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는 생각은 안 했다. 난 이미 그런 환상과는 좀 먼 삶이었다. 그리고 그게 뭐? 그냥 집에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다 꼬인 수면패턴 같은 것과 상관없이.



아홉 시면 아래층의 하나로마트가 문을 연다. 방울토마토를 한 박스 샀다. 계산대 저편의 과자들이 잔뜩 눈에 들어왔다. 김맛 꼬북칩, 망고맛 초코파이, 또 뭐더라. 그 때 그 언니가 빨간색 먹태깡 맛있댔는데. 그 때 요거트맛 오예스도 나온 적 있는데. 호떡맛 붕어빵도 있었는데. 쌀 붕어빵도 있어? 진짜 맛있겠다. 언젠가는 다시 없을 과자파티를 좀 해야겠어.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오는 길에 생각했다. 혼자 먹기는 좀 그러니까, 퇴사를 안 했다면 병동에 다 싸들고 가서 먹든가, 누구든 불러서 일일이 다 봉지 까서 접시랑 그릇에 부어 놓고 정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먹어야지. 진짜.




타락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방법은 많다. 나는 뭘 하든 조절을 잘 못 하는 인간이니 술담배를 떠올리기 전에 저걸 먼저 고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도장을 찍어온 하이라이트 투표 인증지를 다이어리에 오려 붙이고 잤다. 얼굴이 확대된 개개인 팬아트들 볼따구에. 귀여웠다.


그래. 이게 내 인생이지. 이건 제 3의 인생이었고, 그 과자파티는 2.5 버전 정도가 됐다. 왜, 이건 좀 더 맛있고, 그 알록달록한 봉지들만큼이나 귀엽고, 유치하고, 자극적이고, 안전하니까, 훨씬. 종지가 작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귀엽고 하찮고 조금만 유해하다. 그 계획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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