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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노래를 한대

음매애

by 이븐도





그것이 소송, 이니까.






늘 선거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제는 대통령이 바뀌었다. 원래 생일카페 가려고 오프 낸 건데, 못 갔다. 안 간 건가? 멍하다. 일부러 가방에 보라색 키링 달아 놨는데 못 갔다. 어제는 오히려 오늘보다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용돈을 보내 줬다. 일어났나. 뭐 사 입고 기분전환 해, 라고. 나 살 거 없는데. 진짜 없었다. 있던 것도 버려야 할 판에. 대신 신메뉴를 먹는다. 망고 코코넛 어쩌고. 무려 칠천 원. 그 돈으로는 아니고, 복지몰 스타벅스 카드로 시켰다.


그간 꽤 애썼던 것 같은데 또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다. 역시 홍대입구를 갔어야 했나? 아주 공교롭게도 그 때 씨디플레이어 사서 그 솔로앨범을 많이 틀어놨었다. 그러고 그냥 누워 있었는데. 음. 드래곤 길들이기도 보러 가려 했는데.






얼굴 좀 보고 싶은데요.

얼굴요? 피의자요?

네.

어떤 거 때문에 그러세요.

어떤 거요? 왜요?

조금, 어렵죠. 면대면으로 보는 건, 잘 안 하시고.

그런데요?

네?

제가 뭐 해코지라도 할까봐요? 제가 뭘 하는데요.

그게.. 아시잖아요.

하하 웃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뭘 아는데요. 제가. 이천 만원 뜯어간 그 사람은 보호해 주고 제가 얼굴 보겠다는 건 뭐라도 할까봐 안 된다는 거요?

.. 어렵습니다. 어떤 것 때문에 보시고 싶은데요.

얼굴 보고 물어보고 싶어요. 왜 그랬는지.

아. 그런 거는 저희가 이후에 수사하면서.

제가 직접 듣고 싶다고요. 왜 그랬는지. 그것도 안 돼요? 제가 경찰서에서 뭘 할 것 같은데요. 찌르기라도 할까봐요?

그리고 그는 목소리 톤을 바꿨다.

알겠습니다. 그게 저 혼자 될 일은 아니고요, 상부에 건의는 드리겠습니다.

네.



사실 더 심한 말을 했었나. 모르겠다. 아마 그 통화 그쪽에서는 다 녹음했을 텐데. 공격적 태도를 보임, 이라고 기록이라도 했겠지.


그런데, 내가 뭐, 씨발. 뭘 더 얼마나 착하게 굴어야 하는데? 뭐 엄마아빠라도 잃어야 해? 내가 왜, 씨발. 내가 왜.






음료는 심히 맛대가리가 없다. 요맘때 맛이다. 요맘때가 어떻다는 게 아니고 왜 여기서 이런 맛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냥 망고 프라푸치노 시킬걸. 이딴 걸 먹고 당류 사십 그램을 채우는건 좀 열받는 일이다. 메뉴를 기다리면서 한 번 울었다. 에드시런 노래가 나와서. 사실 상관관계는 없다. 왜 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제는 초반에 안 바빠서 다행이었다. 딱 이 시간대쯤이었는데. 6월 저녁의 날씨가 좋다. 스타벅스 바깥의 날씨가 좋았다. 현충일이라 사람들이 많다. 식당 앞을 지나가면 음식 냄새가 나고 횡단보도에 애들과 부모들이 같이 서 있고 바람이 적당히 불고 햇빛은 은근한 황금색 같다. 정말이다. 탈의실 캐비닛에 서서 울었다.




뭘 하겠다고? 안 한다고. 그냥 화난다고. 화 나지, 그런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가면 안 돼. 감정적? 어떻게 감정적이 안 되는데? 아빠, 이게 남 일이야? 개고생해서 모은 잃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남 일처럼 말해. 내가 남 일처럼 말했냐, 그럼 그게 아니야? 어떡하냐, 그러면. 이미 지나간 일인걸.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게 아니고,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소송 할 거야. 그래. 해야지. 그리고 나는 더 말을 안 했다. 엄마아빠는 같이 마트에 있는 것 같았다. 무빙워크가 어쩌고 하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끊어, 그래. 밥 챙겨 먹고. 나가기 싫어서 누런 햇빛이 비치는 저녁 병원 건물을 보면서 서 있었다. 좋은 일. 누구든 잡혔으니 좋은 일인가? 아니지. 좋은 일이었다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잖아. 수사관과 전화를 한 게 네 시가 넘어서였다. 여섯 시 반. 그 두 시간 반 동안 무슨 정신으로 일했는지 모른다.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당신이 다시 말해 봐, 남 일 말하듯 하지 말래. 아빠 목소리였다. 무슨 남 일. 본인이 그렇다잖아. 당신이 해 보라고.

어디고, 병원. 일하나. 응. 밥은, 이따가. 잡았다고 그카나. 응, 그 여자. 한 번 보고 싶댔는데 안 된대. 그 여자를? 왜. 걔들은 당연히 안 된다고 하지. 니가 뭘 할 줄 알고. 내가 뭘 하는데, 그 망할 년을 내가 죽이길 해 찌르길 해. 물어보고 싶다고. 왜 그랬냐고. 딸뻘인 나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들었냐고.






정수야, 사기치고 그러는 나쁜 사람들 그런 거까지 생각 안 해. 생각할 줄 알았으면 그런 일을 안 하지. 그럼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커피 쏟는 것도 폭행죄라고 하는데 내가 그 여자 얼굴 보고 그것도 못 물어봐? 잊어야 돼. 그걸 뭘 물어봐. 원래 다 그런 거야. 잊으면서 살아야 돼. 뭐가 원래 그런 건데, 없는 척하면서 산다고 그게, 있던 일이 없던 게 돼? 없었던 일이 되냐고. 그게 어떻게 되는데.


안 되지. 그런데.. 니가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원래 살면서 돈 문제는 한 번씩 다 생겨. 그게 자기 잘못이든, 남 잘못이든 한 번은 꼭 생겨. 엄마가 살아 보니 그래. 너는 그게 일찍 온 거야. 그 여자를 보는 게 너한테 안 좋아서 그래. 보면은 못 잊어버리잖아. 안 그렇겠냐, 또 화나고 그러지.


그럼 화가 안 나? 그렇게 번 돈 다 털어가고 잘만 사는 인간 보는 건데 화가 어떻게 안 나. 그러니까 안 좋은 거야. 잊어버리고 살아야 돼. 이번에 잘 배웠다고 생각해. 배우긴 뭘 배워, 어? 왜 그 정도로 벌 안 받는데? 내가 그년 얼굴 보는 것도 해코지할까봐 안 된다고? 내가 뭘 하는데? 내가 뭘 얼마나 하는데? 그래. 원래 나쁜 놈들 그래. 그래? 그럼 나도 그냥 그렇게 살래. 남 돈 빼먹고 사기치고 그러고도 몇천씩 잘만 모을 거 아냐. 내가 뭐 얼마나 멍청해서 이러고 있어야 돼.




니가 멍청해서가 아니고, 사기꾼한테 걸린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돈 벌어서 뭐 해, 다 나쁜 짓으로 모아가지고. 안 보는 게 좋아, 그 여자는. 너를 위해서 안 보는 게 좋아.


엄마는 우는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안 나가봐도 되냐, 나가서 음료수 사서 걷다가 들어가. 그 정돈 아냐. 다 울었어. 그래. 바로 나가지 말고 어디냐, 너 탈의실? 응. 일하는 사람들 그렇게 보기 그러니까 좀 앉아 있다가 가. 알았어.

눈물이 많이 나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고 간호사실로 나갔다. 그 직후부터 아주 바빠져서 결국 저녁 도시락은 못 먹었다. 열두 시에 집에 와서 먹었다. 그러고 잤다.




소송, 소송이라. 소송. 내 인생에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던 단어. 달리기를 하러 나가려 했는데, 멍하니 있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다. 샤워도 안 하고 그냥 잤다.

아마 내 매트리스는 병동 바닥만큼이나 더러울 것이다. 그런 날마다 안 씻고 잔 내 몸에 붙어 있던, 온갖 격리를 요하는 균들이 잔뜩 축적되어 있어서.






공휴일 전날인데 바쁘면 병원 폭파시킬 거다, 라고 동기 단톡방에 떠들어대고 있는데 경찰청 알림이 왔다. 커피 시나리오. 구라같지만 그렇게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망상. 찾아보니 고의성이 있으면 폭행죄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게 뜨거운 커피가 아니고 아이스커피일지라도 내가 피해를 입은 빡친 상황에서 그 여자에게 그러면 나한테도 죄목이 적용된다는 거지. 카트를 끌고 라운딩을 도는데 세상이 달리 보였다. 천 번은 봤을 베드, 바깥으로 보이는 오후의 병원, 도로, 차, 애들, 그 배치. 다 낯설고 좀 생경했다.




그게 폭행죄라면. 그럼 난 뭘 할 수 있을까. 피의자를 특정해 신원 조회 중에 있습니다. 그게, 잡혔다는 건가. 전화를 걸었다. 사실 딱히 목적도 없었다. 뭘 알고 싶은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풀이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소독솜을 버리고 병실을 나오면서 알았다. 일하면서, 인간들이 너무 싫다는 유치하고 오만한 생각을 참 많이도 하고 살았다는 걸.


근데 나도 똑같았다. 하지만, 내가 왜 그 사람들 사정을 봐 줘야 하는가. 경찰이라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어쩔 수 없구나. 그들도 참 힘들겠군. 그래도, 그래서 뭐?

간호사도 사람이란 걸 안다 해서 그들이 나한테 덜 지랄하던가? 애 한 명에 간호사 넷 의사 하나 달라붙어서 심폐소생술 중이어도 자기 애 열 재 달라고 하고 아이스팩 달라고 말 거는 게 호자들이잖아. 지금 보니 나도 똑같아.



그래. 알겠다. 싫으면 때려치우면 될 일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기 잘못도 아닌 걸로 그렇게 욕받이가 될 그 의욕 없는 경찰이나 나나. 둬, 그게 싫으면.






민사 소송은 걸 수 있었다.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귀하신 분의 낯짝을 보여주는 것조차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며 어떤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를 언급했다는 것만으로 내게도 죄목이 씌워질 수 있는 이 체계에서, 월급과 덕질과 작은 인형과 혼자 하는 달리기 바깥의 진짜 세상의 룰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자 유일한 일이다.


변호사 수임료 등을 회수할 수 있는지, 이게 타산이 맞는 일인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나한테. 이렇게 뺑이치면서 버는 돈, 내 손으로 개쌩쇼를 하며 갖다 바친 일부터가 이미 논리의 파괴였는데? 교대근무로 번 세전 연소득을 집계한 후 나를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놓은 이 세계에 서서, 이게 앞뒤가 맞는 일인지 아닌 일인지에 대한 질문은 너무 늦었고 깨지기도 쉬웠다.




소송? 무슨 의미가 있는데, 씨발. 없지. 없다고. 누군 좋아서 일해? 이런저런 지원을 받는 많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사지 안 멀쩡하고 정말 정신이 다 박살나서 어떤 일도 못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데. 내 알량한 월급에서 잔뜩 떼 가는 세금. 세전으로 붙여 놓으니 정말 어마어마해 보이는 내 소득. 씨발. 어떻게 안 좆 같아? 구조 공단? 그래. 해 드려야지. 이상한 데 퍼붓는 지원 정책 말고 이딴 데나 팍팍 써라. 난 어차피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으니까.


아니지. 자격이 없지. 왜? 그 가짜 검사 새끼가 떠든 것마냥 개인 정보 관리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잖아. 안 그래? 내 잘못이야. 경찰이 나한테 그렇게 건조하게 되물으면서 말하잖아. 니 잘못이라고. 지원을 받는 건 너무 돈이 많은 사람이라서 안 되고, 피해액 회수는 직접 현금을 전달한 일이라 안 되는 거고. 어떻게 내 잘못이 아냐? 비꼬는 거 맞고 사실이기도 하다. 내 잘못이다.






저녁 주말드라마에는 매번, 엄마나 할머니 역의 배우가 하얀 머리수건을 이마에 얹고 바닥에 두꺼운 이불을 깐 채 누워 있는 장면이 나왔다. 내가 지금 그렇다.

일곱 시가 다 되어 온 부재중 전화. 사건번호와 검찰 송치 여부를 묻자 수사관의 말투는 확연히 달라졌다. 가운을 벗다 전화를 받은 거라 메모를 할 수 없어 녹음을 켜 통화를 했다.



뭐 하시게요? 소송 하려고요. 아, 피의자 상대로요. 네. 민사소송 하려는데 더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요, 퇴근하셨죠. 죄송합니다. 지금 잠깐 전화 괜찮으실까요. 아니면, 내일 휴일이니까 월요일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 일단은 사건 처리가 너무 늦은 점 사과드리고요. 아마 이 사람이 이 일 하나에만 가담한 게 아니라서 여기저기 더 찾아보고 더 진행되는 대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우편으로도 보내드릴 거고요. 순서대로, 처리해야 해서 수사가 어려웠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양해 부탁드리고요. 소송하시려면 아마 여기서는 더 진행이 돼야 알려드릴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또박또박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왜지, 내가 일거리를 더 줘서 좋아하는 건가, 사실 이런 식의 일처리를 너무 사랑하는 직업인이었던 건가? 지랄 떠는 피해자 상대 말고? 아무튼 어리둥절한 상태로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드러나기를 많지는 않으나 찾아보자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라 머리가 멍했다. 기쁜 것도 아니고 절망적인 것도 아니고. 이런 기분이 얼마만이더라. 보이스피싱 당한 걸 안 그 때 직후? 아니면 뭐 시험이라도 앞두고 있던 학생 때?






6월이다. 2월 말. 회복한 것 같다가 정신없다가 잊은 3월. 일하느라 바빴던 4월. 또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5월. 그리고 6월. 퇴근하는 길에 갑자기 작년에 당근으로 나눔해 버렸던 스케이트보드가 보고 싶었다. 달리기 말고 그거. 다시 살 생각은 없다. 그냥 보고 싶었다.

내일 생일카페를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안 가고 싶었다. 덕질로도 해결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수 없는 건가. 모르겠다. 그렇게 멍하니 방에 앉아 있던 것도 엄마아빠에게 전화를 한 것도 수사관의 그 목소리도 다 구라 같기도 했고. 그런데 통화내역을 보니 그것도 아니고.






사람은 정말 깊은 불행조차도, 그게 명백히 자신의 몫이라도 가능한 회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랬다. 얼마나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송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들인 어제와 지금의 내가 그리 느낀다.


유난인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다. 잠깐은. 근데 뭐 얼마나 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뭐가 더 필요한데. 내가 겪은 건데. 이 일을 그냥 넘기면, 개 같은 세상. 경찰은 미적지근하고 내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없고 나는 그냥 손쓸 수 없던 피해자고.. 하는 생각이나 하면서 스스로를 속인다면,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닥쳤을 때도 아이돌이나 보며 웃는 방식으로 괜찮은 척하며 지내겠지.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스스로를 얼마나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게 아니다. 귀찮아서, 자신의 일조차 귀찮아서 그랬던 거라는 걸 나는 알 걸. 그래서 할 거다. 안 되더라도, 그게 뭐 어떤 식으로 될지 안 될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만. 할 거야. 인생은 기니까. 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거짓말이 아니니까.


둘 중에 하나는 해야지. 여덟 시다. 홍대 생일펍으로 가거나, 드래곤 길들이기 4DX를 보러 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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