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바로 여름
계란 한 판이 9000원이라니.
머리가 아무래도 좀 이상하게 잘린 것 같다.
출근하기 싫다.
하지만 잘린 머리는 돌아오지 않지. 열흘 뒤에 동기들이랑 사진 찍는다. 그 때까지는 이 머리에 내가 좀 적응해야 할 텐데. 나와 동시에 입사한 동기는 성이 나보다 가나다 순으로 앞에 위치해 있다. 함께 재직 3년을 넘긴 그녀는 이 부서를 떠나 다른 부서로 간다. 2달의 인턴 기간은 경력으로 안 쳐주는 이 쪼잔한 병원 계산법으로도 우리는 이제 아주 생초짜를 벗어난 모양이다. 그녀는 자기가 수쌤한테 밉보인 거 아니냐는 헛소리를 계속 하며 괴로워하는 중이다. 반쯤만.
가야 또 배우는 게 있으니 그렇다고 완강히 거부하지는 않고 있다. 아쉬워하는 것만은 틀림없고. 나 빼놓고 단톡방 만들지 말라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면서.
미안, 진작에 만들었어. 선물 뭐 줄지 꽤나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케이스티파이 케이스 사 주자고 결론이 났는데, 9월에 아이폰 17 나오면 휴대폰 바꿀 거라고 한다. 이런.
3년 만인가 연락을 한 대학 동기는 지옥 속에서 취준 중이라고 했다. 니가 임상 싫다고 나갔자나, 했더니 나 사실 캐나다 워홀 갔다옴. 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 그 땐 아일랜드가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그게 벌써 6년은 된 것 같다. 언제더라. 학교 통학버스 타고 집 가던 길에 그런 얘길 했던 것 같은데. 3학년이라 쳐도 6년 전이다. 그래서 다시 한국 뜰 생각 중, 한다. 히야. 시간 왜 이렇게 빨라.
6년 전이라. 그게 고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아니고 대학생 때라니. 그것도 내가 다 큰 줄 알았던 그 때. 근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잖아. 전남친의 지랄 탓에 모든 성별이 남자인 주변인 연락처를 지우고 차단했는데, 고작 그 연애로 다 나가리된 줄 알았던 사람들과는 근황을 교환하게 됐고, 가끔이라도 영원을 말했던 그 관계는 정말 무용지물이 됐다. 재밌는 일이다.
근데 얘랑 연락하면 그 친했던 애들 근황도 들릴 텐데. 그렇게까지 모두의 일을 알고 싶지는 않기도 하고. 3년이라. 난 뭐 했지. 누군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 비슷한 걸 만들었대.
에드시런이 노래를 냈다. 노래는 노랜데 앨범 커버랑 유튜브에서 살 빠진 거 보고 깜짝 놀랐다. 어휴. 몸에 문신이 그득해도 무섭지 않았던 건 그 살집 때문이었구나. 이상한 위안이 됐다. 그는 비주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었지만 그 푸근한 외형도 나름의 매력에 기여하고 있었나봐.
안 뺀 게 나은데. 어쨌든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무슨 장르의 음악이든 계속계속 만들어 줬으면 좋겠지만 언젠가 다시 살이 찐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모두가 다 살을 바짝 뺄 필요는 없구나. 그러니까, 살이 찐 게 죄악은 아니구나. 당연한 걸. 이렇게 보여줘야만 알게 되다니.
친구와 신당에서 만났다. 신당동 할매 떡볶이의 그 신당. 나는 거기가 종로에 있는 줄 몰랐다. 촌스러운 동네다. 진짜 시장이 있다. 가판대의 생선들과 보리밥집과 수선집과 완득이에 나올 것 같은 킥복싱 체육관과 그 건물의 옥탑방과 그 앞의 빨래건조대가 보이는 골목 아닌 골목이 보인다. 그러면서 저 너머로 큰 건물들이 깔려 있다. 힙쟁이들이 슬슬 모여들기 전인 것 같다. 안 돼. 그만 와. 정말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나와바리였다.
고사리 요리를 파는 식당에 갔다. 맛있었다. 국물이 있는 국수와 없는 국수 두 가지. 탄수화물이라 맛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맛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진짜 맛있었다. 친구는 그냥 맛있는 거라고 했다. 그녀는 또 약속시간에 늦은 나를 기다리며 너구리를 형상화한 수세미를 샀다. 설거지하는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한 색과 진한 색이 차례로 배색된 통통한 꼬리와 얼굴의 이목구비 배치가 너무 이상적으로 엮여 있었다.
나는 오늘도 그 너구리를 건조대에 올려놓고 아이컨택을 하며 머그컵과 도시락을 씻었다. 못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못 쓴다. 나는 저 귀여운 얼굴과 통통한 꼬리와 무해한 몸통에 고춧가루나 파 쪼가리 같은 게 끼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나의 설거지가 좀더 밝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목적에는 부합했으니 충분한 거 아닐까. 앞으로도 그걸로 김치국물 묻은 반찬통을 박박 닦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달리기를 하러 아침에도 저녁에도 나갔으나 정말 아랫배가 뜯길 것처럼 아파서 1.5킬로미터쯤 갔다가 도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생리를 하고 있었다. 아, 이건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거구나. 난 분간 못 한다고.
이게 그래서 아픈 건지 진짜 전조 증상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런 건 기술 좀 안 생기나. 몸에 갖다 대면 삐빅 하고 다 판정해 주는 거. 방사능 피폭 지역 들어갈 때 검출기 갖다 대면 수치로 뜨는 것처럼. 삐빅. 잠을 자야 할 때입니다. 삐빅. 밥을 먹어야 할 때입니다. 삐빅. 오늘 달리기는 안 됩니다. 삐빅. 생각 그만하고 샤워나 하세요. 삐빅. 삐빅. 나도 모르는 나랑 살기 쉽지 않다.
20대 또는 청춘이 어떻다 하는 것만큼 거대한 거짓말도 없다는 말을 했다. 저녁 바람이 짧은 머리를 훑고 두피를 샅샅이 건드리며 계속 지나갔다. 친구와는 6년 전에 알게 되어 지금껏 서로의 이런저런 일들을 목격하고 공유한다.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별로가 아니고 우리가 내내 떠들 동안 새 일행이 앉지를 않았다. 나중에야 들어온 여자애 둘은 대학생인 것 같았다. 저 때로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글쎄, 돌아가고 싶은 때 같은 거 없는데. 나중에는 또 다르게 생각할까? 좋은 건 젊다는 것이다. 사진을 봤을 때 와 이렇게 어렸었다고 하는 거 하나. 그 하나가 꽤 크긴 하지.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불안하다. 그건 안 변했다. 뭘 해도 불안하다. 자취를 해도, 갖고 싶던 걸 사도, 경력이라 부르는 걸 지나는 중에도. 오가는 지하철에서는 여름 냄새가 난다.
1호선 냄새다. 그게 여름이다. 그 쾌쾌한 지하철에서 나오는 빵빵한 에어컨. 어두컴컴한 냉동창고 같은 한기. 맨팔에 닿는 지하철 좌석 이음새의 차가운 느낌. 그 냉기 아래서 읽던 책. 5년 전에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을 내내 읽었다. 한 달은 돌아다니며 읽었던 것 같은데 나는 영화와 다르게 그 단편의 남자주인공이 게이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대체 나는 뭘 읽었던 걸까 생각했다.
수영장의 사람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새벽 침대, 바쁜 일터, 뭣 같은 인간관계, 작고 큰 고민,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동네 수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슬쩍 나오는 소설이다. 그 수영장 벽에 크랙이 생긴 것을 보고 각자의 다른 반응들을 보여주는 중이다. 똑같이 에어컨 냄새가 나지만 덜 어둡고 덜 차가운 신분당선에 앉아서 그 수영장의 여백과 소리가 울리는 공간감을 상상한다.
사방에서 여름 냄새가 난다. 시멘트와 콘크리트와 도처의 가로수에서 나는 얕은 냄새가 습기에 증폭된 채 강한 햇빛을 입고 횡단보도에, 개찰구에 떠 있다. 나는 생각보다 여름을 좋아했나, 생각했는데, 아직 진짜 여름은 시작되지 않은 거지. 그렇다. 도착한 지하철역에서는 누군가 케이크 상자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열한 시 반. 내일이 무슨 날인가, 아니면 30분 남은 오늘? 나는 그런 걸 보는 게 좋았다.
요샌, 요새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
노는 날에는, 괜찮아도 되는 걸까.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한 일주일 정도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하고. 불행한 걸 그만 보고 싶다. 바쁜 것도 바쁜 건데 병동의 불행이 주는 짙은 기류가, 아무도 내게 느끼라고 하지 않은 그 냄새가 부담스럽다.
계란은 비싸고 방울토마토는 싸다. 2주쯤 전에 산 것 같은 방울토마토를 내일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노는 날에 불행해하지 말고 그냥, 출근했을 때 더 잘해 주자고 생각한다. 오로지, 집에 왔을 때 내가 괜찮기 위해서.
머리가 좀 별로면 어떤가.
에드시런도 잘 사는데. 살 안 뺀 게 더 나은 그 양반도 다이어트해서 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