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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애는 선물을 안 준다고요?

정말이라면 산타는 소멸했을 텐데

by 이븐도






하지만 사실 산타 같은 건 없잖아. 울지 않는 애도 없다.

정말로 안 우는 애가 있다면 사실 그 친구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한 해에 한 번씩 찾아오는 선물의 기회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고비를 넘느라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장난감 샤워를 시켜 줘도 모자랄 존재일 것이다.


아무튼 모든 애들은 운다. 그러므로 성탄절 선물을 산타에게 받을 수 있는 어린이는 실존하지 않는다.






소아과 병동의 아이들은 귀엽다. 귀엽기 이전에 그들은 환자이며 내 업무의 대상이지만 아무튼 귀여운 것은 사실이다. 이곳은 성인 병동에 비해 악취가 덜 나고 곳곳에 놓인 그들의 장난감이나 그림책을 보며 중간중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대신에.. 그들이, 엄청나게 우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실로 대단할 정도로 운다. 울고 악을 쓰고 발광하고 또 울고 소리를 지른다.


나도 울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더 시끄러워지잖아. 여기서 더 정신없어진다면 미쳐버릴 것 같기 때문에.. 누가? 내가.

속으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니가 무슨 잘못이 있니, 아니. 울든 안 울든 나는 할 거야. 움직이면 안 돼, 또 해야 돼. 움직이지 마, 같은 말을 최대한 '안 무섭게' 꺼내려 머리를 굴리며 그들의 팔다리를 잡고, 제정신을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사실 이미 미쳐버릴 것 같다. 정말로. 그들은 정말 무지막지한 정도로 운다. 신기할 정도로 운다. 말을 들을 줄 모르고 움직이며 보챈다. 돌아버릴 것 같다.






'애가, 울어서, 안, 들려요!'라고 보호자가 말했다. 나는 작한다. 분명 부모지만 그도 짜증이 나서 그렇게 소리 지르듯이 말한 것이라고. 도저히 병실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차저차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양해를 콜벨로 전한 내게 저편에서 돌아온 대답다.






인력이 없어 타 병동에서 지원을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로테이션을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진이 빠져요. 정신없어요. 돌겠어요.. ' 표현은 다양하나 그 저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병동으로 갔을 때 나는 그 조용함에 신기함을 느꼈다. 그곳이 안 바빴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나 바쁜데 그렇게나 조용할 수가 있었다. 시술이나 수술을 끝낸 누군가 실려 오는 소리, 수액 봉투를 잔뜩 찢어 투약 준비를 하는 소리, 밥차가 오는 소리가 저편 병실에서 다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태어난 지 12개월이 채 되지 않았으나 분명 토실토실할 누군가가 목을 다해 우는 소리나, 세 살쯤 됐을 애가 처치실에서 악을 지르고 담당이 '누가 좀 잡아 주세요!'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없었고 뭘 해도 잔뜩 보채는 애를 엄마가 안고 지친 표정으로 복도를 도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 몸이 저편에도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 고 생각하며 속으로는 잔뜩 '으아아아아아' 하는 채로 일하는 건 똑같았으나 복도는 조용했고 환자는 모두 보호자들과 고요히 누워 있었다. 커튼을 열었을 때 사람의 머리가 항상 같은 위치에 있고 그들의 팔이나 손을 '깨우지 않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 꽤 안정감을 주었다.






이곳의 작은 환자들은 기서 눈 뜨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주제에 열에 일곱은 제멋대로 자세를 취하고 잠에 들었다. 나는 항상 이불 이쪽저쪽을 더듬어 의도치 않게 그들을 깨운 후 주사 라인을 정리하고 혈압을 재며 보호자들에게까지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한 명 한 명 지날 때마다 그런 식으로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되는 느낌은 참 신선했다.


아, 라운딩이 원래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거였다니. 여섯 시간의 금식과 '애가 배고파서 너무 난리를 쳐요' '얘 언제까지 굶겨요?' 같은 말과 날 선 보호자들의 표정을 거치지 않고 검사와 시술을 보낼 수 있다니. 물약을 뱉지 않는다니. 주사를 잡을 때 세 명이 달라붙어 그들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니.




물론 안 우는 애들도 있긴 하다. 그걸 기특해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딘가 반응이 느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그 부모에게 경외감 같은 것도 느낀다. 어떻게, 어떤 성격을 가지고 계시길래 애가 이렇게 순할 수 있는 건가, 하고 깊이 궁금해진다. 이어 생각한다. 아, 나는 낳지 말아야겠다.






나는 엄마를 무서워한 기억이 남아 있는 그때부터는 집 밖에서는 절대 떼를 쓰거나 안 된다고 하는 말에 '토를 단' 적조차 없다. 비록 엄마가 나를 혼낸 기억이 너무 많아 내가 그리 키우기 쉬운 애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는 대충 크고서는 우는 애가 아니었다. 짜다.

왜 그렇게까지 우는지 모르겠다니까? 신기할 정도로 울어, 정말. 이라는 내 말에 엄마는 '애니까 울지. 니는 뭐 달랐는 줄 아냐, 내려놓으면 울어서 아빠가 맨날 안아서 흔들흔들해가지고 재웠어'라고 했다.

그게 과연 지금 이 정도로 우는 애들을 달래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을 하는 카르마 같은 게 될 정도였을까? 아니야.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정도였을 리가 없다. 생각이라는 걸 시작한 후부터 항상 나는 눈치를 보고 풀이 죽어 있었고 아니면 풀이 죽은 척이라도 했으니까. 정말이다.


하지만.. 정말일까? 나는 나만큼이나 예민할 아이가 사회화되기 이전의 모습이 어떨지 감히 예상하기를 멈춘다.






모유를 먹고 이제 이유식을 시작하는 정도의 애가 우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하려 한다. 애는 운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가슴에 스며 놓으려 애쓴다.

내 얼굴 앞에서 작은 폭탄이 악을 지르며 잔뜩 너울대는 걸 고서 분노와 허탈함이 밀려오려 할 때, 그렇게 다시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며 그들의 정맥주사 부위를 살피고 '스티커 떼는 건데? 아픈 거 아닌데? 스티커 다시 붙여 주려는 건데? 봐봐, 더러운 곰돌이 여기 있네? 깨끗한 곰돌이 붙여 주려는 건데? 그치? 안 아프다, 진짠데?'라고 그들의 우는 소리보다 더 크게 말한다.


사지를 흔들며 괴성을 지르는 그들은 그 논리적인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사실 그 말의 청자는 그들의 토실하고 연약한 팔에 힘겹게 꽂힌 정맥주사를 지켜내야 하는 나 스스로나 다름없다. 또한, 회진부터 검사 순서며 밥 시간까지 뜻대로 안 흘러가는 대학병원의 거의 모든 일처리에 불만을 가진 그들의 보호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나도 나름,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 달라는 애원일 때도 있다.






어느 나이까지의 환자들은 말하면 들었다. 몹시 신비했다. 아,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그들은 정말로 기다렸고, 어차피 '검사실에서 불러주시는 대로 가는 거라 저희도 기다리고 있어요 ㅠㅠ'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똑같은 질문을 하러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생판 관련 없는 사람을 붙들고 저희 애 좀 봐 달라고 하지 않았다. 생로병사는 참 신기해서 그 나잇대의 구간을 지나면 사람들은 다시 정신만은 어려져서 어르고 달래고 가끔은 큰소리로 또박또박 소리쳐 줘야 했지만. 아무튼 중증도를 떠나 '협조'가 되는 환자들을 보는 건 이런 거라고 다른 병동에서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미친 데시벨과 정신없음을 빼면 역시나 몸을 갈아내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바빴던 그곳에서 나의 본거지로 돌아온 후, '안 울면 저희도 몰라요. 애들은 우는 게 표현하는 거라 괜찮아요.'라는 말로 본인 아기의 시끄러움을 걱정하는 보호자를 달래는 선임 간호사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왜 저런 말을 생각하지 못했나. 아니지, 이건 생각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참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몰랐던 것보다는 낫다고 자부한다. 내 한계치가 어느 정도라는 걸 인지했으면 그걸 넘어섰다고 느낄 때 더 조심할 수라도 있잖아. 그 정도면 최선이었다.




안 우는 애들은 없고, 있다면 그 친구들은 '애'가 아니라서였다. 운다기보다는 입을 꼭 다물고 세상 지겨운 표정으로 누워 있거나 '빨리 보내 주세요'라고 조용히 말할 줄 아는 청소년들은 이제 그렇게 울지 않았다. 애는 울지 않는 대신 그 지진한 병세와 함께 성장 중인 다 큰 그들의 부모는 딱 그만큼 더 예민했다. 그래서 한창 공부하고 학원을 다녀도 모자랄 때 병환으로 이곳에서 며칠을 머무르게 된 그들 보호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긴장했다. 아무튼 모든 애들은 울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3일간 나이트 근무를 했다. 이브와 성탄 당일 모두 일하게 되었고 아직 산타의 존재를 믿을 그들에게 어떤 '어그로'를 끌까 혼자서 두근두근했으나 내 시원찮은 체력 문제로 겨우겨우 출근해 주어진 일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늘 병동의 환아들에게는 선물이 전달됐다. 작년에는 아마 이 병동 최장기 입원 환아의 아버지가 그 역할을 했었고, 올해는 당직을 서는 레지던트 하나가 그 일을 했다.

사회사업실이나 외부 업체에서 전달된 다 똑같은 선물을 주는 가짜 산타 말이다. 정말 가짜가 맞다. 말했듯 모든 애들은 울고 산타는 우는 애들한테는 선물을 안 주는 그런 타산적인 존재 아니던가.






나는 선물을 받지 못했다. 말을 걸면 그 말을 따라하고, 뭔가를 누르면 노래도 하고, 앞으로 뒤로 옆으로 돌진하기도 하는 그 파스텔 색의 펭귄 장난감은 굳이 준다고 해도 안 받을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올해 꽤나 울었기 때문에 서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억하심정은 좀 들었다.


선물을 주지 않는 산타는 존재 가치가 없는데. 어차피 속설이라면 더 달콤하고 현실적인 게 좋잖아. 울지 않는 애는 없다. 우는 애들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는 문장을 만들어냄으로써 산타는 직종의 소멸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저 노랫말이 담긴 곡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배달을 끝내고 실직을 선고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저런 거짓이나 다름없는 말을 만든 산타 말고, 우는 애들을 울지 않고 돌본 어른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의 등장이 시급하다. 결국 사회를 굴리는 건 어른이잖아. 그리고 모든 우는 애들은 커서 어른이 된다고. 그러니 공평한 거 아닌가? 또한, 애들은 '울면 선물 안 준대'라는 말에 설득될 정도로 똑똑하거나 멍청하지 않다. 봐, 그렇게 울어도 결국은 늘 선물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다고.






나는 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발버둥치는 손과 발을 붙든 파란 옷의 '괴물'을 힘껏 처단하려 애쓰고 울며 약을 뱉어내고 토해내 그들을.. 나는 사랑. 은 아니고, 정정당당하게 맞선다. 는 일을 해야 하는 불쌍한 어른일 뿐인걸. 어쩌겠어. 그래.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건 '우는'것뿐이니까. 덩치가 좀 많이 작고 힘이 없는 (없는?) 탓에 발광하는 것으로 불편함을 알릴 수밖에 없는 그들을 하루빨리 울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내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화나지 않는다. 시끄럽지 않다. 내가 시끄럽다고 했나? 그들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신기할 정도로 운다고 썼던가? 어른은 인정할 줄 안다. 인정한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앞으로도 그들의 울음소리에 정말로 괴로워할 것이다. 다만 안 울면 되는 거 아닌가. 알고서, 앎을 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어른이니까. 비록 가짜 산타에게도 선물을 못 받는 어른이지만, 사실은 그 가짜 산타가 주는 선물을 준비하는 어른이기도 하지만.. 산타가 아니어도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사줄 수 있는 어른이니까.






그러니까 울지 말자. 속으로도 울지 말자.

애들이 운다고 속으로도 따라 울거나 절망하지 말자.



나는 어른이잖아? 혹시 알아.

정말 어른을 위한 산타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작년엔 글렀지만 올해는 쓸만한 어른이려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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