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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May 01. 2019

결혼해서 제일 좋은 게 뭔 줄 알아?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

1

오랜만에 단짝 친구를 만났다. 내 인생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나타나 숨통을 터주었던 사람. 아니, 구원자.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두 번 바뀌는 동안 사는 곳이 멀어지고, 하는 일이 달라지고, 마음 쏟아야 할 관계가 늘어서 얼굴 보는 횟수는 줄었지만, 서로가 이 땅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안도하고 위로받는 사이다.


20년 전 우리는 매일 만나 하루치의 상처, 하루치의 감정 기복, 하루치의 불안을 털어놓았지만, 이제는 의젓하고 씩씩하게 각자의 일상을 살다가 도저히 소화되지 않는 난제와 마주했을 때 서로를 호출한다. 지난 주말, 친구로부터 호출이 왔다.


퇴사.


그랬다. 친구는 온 존재의 무게로 퇴사를 고민했다. 조직에 심각한 사내 정치 문제가 있고, 친구는 노동 착취에 가까운 업무량을 오래 떠맡았다. 개선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변화는 없었다. 출근해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 15분 만에 회사를 향한 화가 올라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했다. 퇴사를 결심해야 할 시점이라는 사실을 친구는 알았다.


"그런데 나 너무 무서워."


친구는 '퇴사한다 vs. 남아 있는다' 두 개의 선택지가 가진 장단점, 향후 자신과 가족에게 미칠 영향 등을 촘촘하게 생각해보았고,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 시나리오를 펼쳐본 후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재취업 못 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일 하면서 시간 낭비하면 어떡하지?"

"회사를 위한 글쓰기 말고 내 이름을 걸고 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긴 했지만, 내 주변에 퇴사해서 프리랜서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글이 망가졌어. 나도 그러면 어떡하지?


친구 본인은 물론 친구의 고뇌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친구의 배우자, 그리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까지 모두 퇴사가 맞다고 느끼는 상황이었지만,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을 상상해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만약에 ~하면 어떡하지?'의 불안 프레임이 친구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있잖아. 미래의 일까지 모두 내다보면서 선택을 하려니까 너무 혼란스러운 것 아닐까? 일단 퇴사를 결정하고 나면 분명히 그다음 무엇을 할지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에 너의 온 에너지를 쓸 것 같은데? 지금은 선택지가 두 개 있어서 힘든 건데, 선택지 하나를 날려버리고 나면 오히려 너는 엄청 무섭게 몰입하는 애잖아."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 얼굴에 갑자기 전등이 켜진 것처럼 일순간 표정이 환해졌다.


"어머, 맞아. 내가 결혼할 때 제일 좋았던 게 뭔 줄 알아? '이 사람이 내 인생의 짝일까?'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들볶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어. 그냥 내가 선택한 이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 방법만 생각하면 된다는 게 좋더라."



2

한결 목소리가 가벼워진 친구가 최근 본 미드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브루클린 나인나인은 한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 이야기인데, 거기 되게 똑똑하고 비밀스럽고 터프한 여자 경찰이 나와. 이름이 로사야. 자기 일을 하여간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쩌다 양다리 상태가 된 거야. 두 남자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마음의 결정을 해서 몇 날 몇 시까지 누구를 선택할지 통보해 주기로 해.


그때부터 엄청난 고민이 시작되는 거지. 통보 전날에 너무 고민이 되어서 동료를 찾아가니까 갑자기 커다란 바인더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해. '우리 가문이 대대로 우유부단해서 모든 상황에 맞는 선택 매뉴얼을 만들었어. 자, 로맨스 편을 펴보자.' 그러더니 'A랑 B 중에 누가 더 너를 웃게 해? 누구 입술이 더 부드러워?' 이런 류의 질문을 309개나 던지는 거야.


그렇게 심리 테스트하듯 문제를 다 풀었는데, 세상에, A랑 B가 동점이 나왔어. 그래서 가문의 제일 영험한 어르신을 찾아가기로 해. 선택하는 힘을 갖기 위해 무슨 기체조 하듯 철봉에도 매달리고 그러는데, 그 사이에 두 남자 중에 한 남자가 로사에게 문자를 보낸 거야. 이 상황이 너무 싫어서 자기가 떠나기로 결정했다면서.


로사가 가문의 어르신에게 문자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되어 버렸다고 하니까 어르신이 대답해. '그게 우리 가문이 선택을 내리는 방식입니다'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너무 우유부단해서 철봉 하고 기체조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낸 거야. 결국 상황이 선택을 대신 내려주도록."




3

TED에서 영상 하나를 봤다. 철학자 루스 챙의 '어려운 선택을 어떻게 할까 How to make a hard choices'였다. 직업, 결혼 상대, 사는 곳 등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우리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는 이유를 설명하는 영상이었는데, 보고 나니 몇 줄의 생각이 남았다.


https://www.ted.com/talks/ruth_chang_how_to_make_hard_choices


1) 'A는 이런 측면에서 좋고, B는 저런 측면에서 좋을 때' 선택이 어렵다.


2) 우리는 각 선택지가 가져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이렇게 '알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 많은 사람들은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고른다.


3) 흔히 가벼운 선택과 어려운 선택의 속성이 다르다고 오해하는데, 둘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같다. 예를 들어 아침식사 메뉴 선택도 '맛' 측면에서 좋은 선택과 '건강' 측면에서 좋은 선택이 다르고, 이 둘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어렵다.


4) 계량 가능한 '실수 實數, real number'의 세계에는 'A가 B보다 크다, A와 B는 같다, A는 B보다 작다' 딱 이 세 가지 비교만이 존재한다.


5) 가치의 세계는 실수의 세계와 다르다.


6) 인생의 어려운 선택에 있어 각 선택지가 가진 '가치'를 계량해서 비교할 수 있다고 믿어선 안 된다.


7) 만약 세상 모든 일이 계량 비교 가능하다면 모든 선택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된다. 쉬운 선택만으로 가득한 세상은 우리를 이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8) 머리를 벽에 찧고 싶게 하는 인생의 어려운 선택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이유는 그 선택의 이유를 본인 스스로 찾아내고 써내려 가도록 독려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작가가 될 기회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9) 어려운 선택에서 결단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떠돌이가 된다. 보상 체계, 두려움, 더 쉬운 선택들이 자기 이야기를 써버리도록 허락한다.


10) 최고의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내린 선택이 있고, 내가 부여하는 의미와 이유가 있다.



생각한다. 어려운 선택 앞에선 온몸을 날려야 한다고, 투신하듯 결단하는 것이라고. 그 사람이 내 인생의 짝인지 아닌지, 퇴사가 내 인생의 옳은 결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선택을 하고 나서 스스로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정말 내 인생의 짝이 되도록, 퇴사가 정말 내 인생의 옳은 결정이 되도록 다음 이야기를 써내려 가면 된다고, 그럴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그토록 살 떨리는 선택을, 결단을 눈 꾹 감고 해 버릴 수 있는 것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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