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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Oct 08. 2019

이번에는 이것을, 언제까지, 좋아하려나

어릴 때 아빠는 격일 근무하는 직장에 다녔다. 밤에 회사에서 당직을 하고 아침에 퇴근해 오면 오전 나절은 이틀 치 신문을 읽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늘 자, 딱풀, 가위, 칼, 수첩이 담긴 신발 상자를 옆에 놓고 거실 바닥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전지 크기의 신문 양면을 시원스레 펼쳐놓고 고개를 푹 숙여서 글을 읽을 아빠의 옆모습에서 정적이 피어올랐다. 먼지가 부유하는 소리까지 들려올 것만 같은, 비어있지만 어쩐지 가득 찬 묵음의 소리. 거실의 물건들도 모두 숨 죽인 듯한 시간이 지나고 촤락,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면 다시 생동감이 차올랐다. 정적, 촤락, 정적, 촤락…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아빠는 신발 상자의 도구들을 꺼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아빠는 신문에 연재되는 사설, 칼럼, 수지침 정보, 하루 한자 등을 매일 스크랩했다. 오린 신문을 깨끗한 A4용지에 붙인 후 복사해 시리즈 별로 따로 모았다. 주 6일 연재되는 하루 한자는 1년을 모으면 300매가 되었고, 주 1회 연재되는 수지침 기사는 52매가 되었다. 그렇게 모은 콘텐츠가 한 권 분량이 되면 직접 표지를 붙이고 목차를 넣은 뒤 제본해서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사설, 칼럼, 하루 한자 등 교육적인 시리즈는 2권 제본해 나 한 권, 언니 한 권 선물로 주었고, 수지침은 아빠가 가졌다. 정성과 끈기로 만든 선물이었지만, 당시 나와 언니는 ‘웬 한자 공부?’하며 콧방귀만 뀌고 아빠의 선물을 거의 펼쳐보지 않았다.


우리 아빠가 이상한 건 지금부터인데, 수지침 연재에 꽂혀서 가내수공업으로 불법 해적 출판물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몸에 생체 실험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지침 세트를 구입하고, 쑥뜸을 사고, 한의학 고서적에서 튀어나온 듯한 지압점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는 자기 손이니 무릎이니 온갖 곳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다가 아빠 입이 갑자기 돌아가거나 위장이 배배 꼬이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아빠의 자가 생체실험은 1년 넘게 이어지다 야매 봉침의 세계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당시 우리 집 냉장고 냉동실에는 얼린 꿀벌들의 사체가 보관되어 있었고, 안방에서는 쑥뜸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아빠가 야산에서 멀쩡히 잘 살고 있던 꿀벌들을 잡아오고 자기 몸에 바늘을 꽂으면서까지 알아내고 싶었던 비밀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우리 아빠가 진짜 웃긴 건 지금부터인데, 그렇게나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침뜸을 단칼에 그만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침 꽂기를 멈추더니 그 뒤론 단 한 번도 침뜸 도구를 꺼내지 않았다. 지겨워져서였다. 아빠는 하나에 꽂히면 에베레스트라도 정복할 기세로 달려들다가 어느 날 문득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열정을 잃었다. 한번 열정이 식으면 다시는 뒤 돌아보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 제일 웃긴 건 아빠의 '요상스러운 DNA'가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점이다. 아빠는 요즘도 거울 속 자신에게 말하듯 나에게 종종 말한다. “그 성격, 그거 안 좋은 겨. 사람은 은근하게 꾸준해야 좋은 겨.”


<사피엔스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이해인 수녀님이 하신 말씀을 읽었다.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들, 그때는 불에 타 죽을 것처럼, 그러다가 조금만 감미로운 기운이 떨어지면 못 견디는 거야. 차라리 그 기운을 좀 아껴서 꾸준하게 한결 같이 가는 걸음. 그게 참 중요한 건데..."

내 피에 아빠 유전자가 흐르고 있음을 아는 나는 늘 조마조마하다. 이번에는 이것을, 언제까지, 좋아하려나.


중학생 때는 매일 만화책을 봤다. 순정 만화, 무협 만화, 병맛 만화, 해적판 만화 가리지 않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고등학생 때는 영화가 너무 좋았다. 반에서 혼자만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일찌감치 귀가해 비디오를 봤다. 혼자 별점 노트도 만들고, 리뷰 노트도 썼다. 하도 영화만 보니 어느 날 아빠가 물었다. “너, 영화감독 되려고 그러냐?”

실제로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6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당시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장진 감독의 <극단적 하루>, 김지운 감독의 <커밍아웃> 등 한국 1세대 디지털 단편 영화 제작의 중심축이었던 ‘시네포엠’ 사이트에 내 영화가 걸리기도 했다. 사이트 관계자의 추천으로 도쿄 비디오 페스티벌에 출품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불에 타 죽을 것처럼 열심이던 나는 어느 날 문득 만화책을 떠났고, 어느 날 갑자기 영화를 떠났다. 그러다 잡지쟁이가 되어 죽어라 인쇄물을 만들다가 이제는 잡지와도 서서히 멀어지는 중이다. 그림과 그림책에 대해 글을 쓰는 요즘도 종종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문한다. 이번에는 이것을, 언제까지, 좋아하려나.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준 위안은 기대치 않았던 곳에서 왔다. 미국 그림책 작가 데이비드 위즈너 원화 전에서 본 <아기 돼지 세 마리> 속 한 장면을 보다 갑자기 아, 그렇구나, 했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기 돼지 삼형제’의 설정으로 시작한다. 늑대가 첫째 돼지 초가집을 무너뜨리려고 바람을 후욱 부는 순간 마법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늑대의 입김에 밀려 돼지가 그림책 속 사각 프레임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하다. 프레임 안쪽에 걸린 돼지의 다리는 고전적이고 평면적인 수채화 기법으로 그려져 있는데, 바깥에 나온 돼지의 몸은 입체감이 넘치고 사실적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늑대를 피해 프레임 바깥 여백의 공간으로 나온 세 마리의 돼지가 여러 장르의 그림책을 통과해가면서 친구를 모으고 결국 늑대에 대항한다는 이야기다. 돼지들이 방문하는 책 속 장면에 맞추어 돼지들의 몸은 흑백의 라인 드로잉이 되기도 하고, 유아가 그린 것 같은 그림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그림과 그림 사이,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 여백의 공간을 지날 때 아기 돼지들은 생생한 입체감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2차원 그림책 속 장면과 3차원적인 돼지들의 충돌로 인해 독자의 눈에 돼지들이 실제로 종이 위로 도드라져 올라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돼지들 역시 납작하고 평평한 종이 안에 그려진 이미지다.



회화의 역사는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화폭으로 옮기기 위해 인류가 고군분투한 역사다. 영화는 3차원의 현실을 기록하지만 그것이 상영되는 매체는 2차원의 평평한 스크린이다. 그림책과 만화는 두말할 것 없이 평면의 예술이다.

나는 장르를 갈아치우는 스스로의 끈기 없음을 한탄했지만, 수많은 미술관에서 조각과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다. 건축이나 설치 미술에 대한 호기심 역시 별로 가져본 적 없다. 요컨대 나는 언제나 2차원의 평면 이미지만을 편애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난 끈기 없음의 역사가 일맥상통한 맥락을 가진 시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기 돼지 세 마리>의 한 장면을 다시 본다. 새하얀 여백,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물감이 덧발릴 수도 있고, 만년필이 슥슥 밀고 나갈 수도 있으며, 영사기가 쏘아낸 빛의 파장이 춤출 수도 있는 공간. 이 납작한 세계의 애호가이자 관찰자로서 나는 아마 오래도록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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