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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Nov 07. 2019

[그림책의 일] 관여하는 마음

알리체 바르베리니 <달님을 사랑한 강아지> 

이탈리아 작가 알리체 바르베리니가 지은 <달님을 사랑한 강아지>는 시각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책이다. 


먼저 이 책에는 명백한 참조 이미지가 있다. 바로 프랑스 영화감독 조르주 멜리에스가 만든 세계 최초 공상과학 영화 <달나라 여행>에 등장하는 눈 한쪽에 우주선이 박혀버린 달이다. 출판사에서 조르주 멜리에스를 향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만든 그림책이라고 설명할 만큼 이 달은 책의 첫 장면에서부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조르주 멜리에스가 러닝타임 13분짜리 무성 공상과학 영화 <달나라 여행>을 만든 건 1902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100년도 훌쩍 지난 어느 날, 현대의 후배 작가가 그림책이라는 전혀 다른 장르로 오마주를 했다는 뜻인데, 도대체 조르주 멜리에스가 누구이기에? 



조르주 멜리에스는 영화감독이 되기 전 마술사로 활동한 이색적인 경력이 있다. 영사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이 가진 마법적 잠재력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다. 초창기에 그가 만든 단편 <사라진 여인(1896)>을 보면 그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커트'를 통해 마술과 비슷한 효과를 연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BQQlFpY5OAw


그가 '커트'의 개념을 이해한 계기는 우연히도 카메라의 오작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검은색 장의차를 촬영하고 집에 돌아와 필름을 현상해보니 장의차가 중간에 흰색 우마차로 둔갑한 것. 장의차를 찍는 도중 카메라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작동했는데, 그사이 장의차는 이미 지나가고 우마차가 마침 지나가고 있었기에 본의 아니게 '커트-이어 붙이기'의 효과가 연출된 것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필름을 자르고, 이어 붙이고, 겹쳐 찍고, 늘이고, 필름 위에 색깔을 칠하면서 다양한 트릭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사에서 최초로 극영화 연출에 유용한 다양한 문법-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 클로즈업, 디졸브 기법, 다중 노출, 타임 랩스 등-을 정립한 순간이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2&v=PLhpm_U59aE 


1898년에 만든 <고무 머리의 남자>는 서로 다른 필름을 잘라 붙여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레일 위에 카트를 놓고 주인공(감독 본인이다)이 앉은 다음 카트를 카메라 가까이로 다가가면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가 나고, 카메라에서 멀어지면 롱 쇼트의 효과가 나는 것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이런 트릭 영화를 통해 실제 연극 무대나 마술 무대에서는 연출할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몸을 절단한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몸에 불이 붙게 하거나, 물체의 형태를 바꾸거나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고 한다. 



<달님을 사랑한 강아지>는 조르주 멜리에스와 그가 만든 무성 영화들에 대한 명백한 오마주인데, 첫째, 오래된 흑백 영화가 떠오르는 서정적이고 농담의 깊이가 풍성한 흑백 그림으로 만든 책이라는 점. 둘째, 무성 영화가 대사를 처리할 때 으레 등장하는 자막 디자인을 그대로 차용해 글 레이아웃에 입혔다는 점이 그렇다. 이야기의 배경이 서커스단이라는 점도 늘 무대 위에 섰던 조르주 멜리에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는 서커스단의 강아지로부터 시작한다. 강아지는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부린다. 사람들을 강아지를 보며 마구 웃어대지만, 강아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애틋한 시선으로 무대 위를 쳐다본다. 강아지는 무대 장치로 사용하는 달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커스 천막을 걷다가 달이 떨어지면서 모서리가 깨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쓸모가 없어진 달 장식을 내다 버리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강아지는 어느 고요한 밤에 스스로에게 굴레를 씌운다. 그리고 버려진 달을 향해 간다. 



강아지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나 먼 길을 걸어 도심까지 나간다. 무거운 달을 끌고 다니느라 지쳐있는데, 마침 비바람까지 휘몰아친다. 갈 곳 없는 강아지는 골목 이곳저곳을 떠돈다. 그러다가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후미진 곳에 터를 잡고 달 곁에서 둥그러니 몸을 말고 눈을 감는다. 



둘이 잠시 눈을 붙인 장소는 동네 장난감 가게 앞이었고, 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강아지가 마음에 걸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강아지를 데려간다. 그리고 혼자 남은 달 앞에 다가와 유심히 들여다보는 턱시도 입은 신사.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둘은 다시 재회한다. 함께이진 않지만, 자신에게 꼭 맞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우한다. 턱시도 신사가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이었다는 것은 작가가 일부러 분명히 밝히진 않지만, 위의 장면을 통해 그가 길에서 달을 주워서 영화 소품으로 썼음을 유추할 수 있다.


글 없는 그림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글만 사용한 이 책은 독창적인 흑백 톤, 서정적인 그림체와 이야기, 풍부한 시각 예술 레퍼런스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을 모조리 사로잡은 건, 나에게 중요한 삶의 진실을 속삭여 준 건 바로 아래의 장면이었다. 



강아지가 스스로 굴레를 씌고 수레를 끄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랑은 결국 관여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관여한다는 것은 스스로 굴레를 쓰는 일과 같은 것. 


타자의 고통 앞에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다. 관여하거나, 관여하지 않거나.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일상도 원래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반대로 마음을 쏟고 관여하면 내 쪽이 흔들린다. 관여는 익숙하던 세계에서 벗어나 그에게로 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움직인다. 


<달님을 사랑한 강아지>에서 연거푸 보여주는 것은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다. 강아지는 버려질 처지가 된 달을 지나치지 못했고, 소년은 추위에 떠는 강아지를 못 본 척하지 못했다. 관여했다. 


결국 책을 덮을 때 즈음엔 질문을 나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려움에 처한 존재를 향해 안쓰럽다는 말을 곧잘 했으면서 결국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나의 지난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표지를 보았다. 스스로 기꺼이 굴레를 쓸 줄 알았던 강아지가 말간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네가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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