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청석에서 일어난 사람은 고혁두였다. 고혁두는 법정이 쩌렁쩌렁 울리게 크게 소리쳤다.
“증인의 진술이 진실이라는 걸 보여줄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고혁두의 손에는 흰색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뭔가요?”
재판장이 물었다.
“이건 사건 발생 다음날 피해자와 피고인이 만났던 카페의 영수증입니다.”
“그것과 이 재판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이 종이는 당시 피해자가 피고인을 왜 만났는지, 그리고 그때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어땠는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고혁두는 종이를 김강혜 검사에게 건넸고, 김강혜 검사는 영수증을 실물화상기(實物畵像機)에 놓았다. 실물화상기와 연결된 빔프로젝트를 통해 종이의 뒷면이 크게 출력되었다. 재판장을 포함해서 법정에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빔프로젝트 화면을 주시했다. 종이 뒷면에는 네 음절로 이뤄진 문장이 적혀 있었다.
‘죽고 싶다.’
***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의 일이었다. 손아정은 사과를 받으려고 오영훈과의 만남을 자청했지만 오영훈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아정은 오영훈이 카페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조금은 미안해할 줄 알았다. 적어도 당황하는 기색이라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냈다. 오영훈은 후안무치의 전형이었고,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떡하지?’
분노와 억울함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민해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아정의 마음에는 하나의 문장만 떠올랐다.
‘죽고 싶다.’
4음절은 당시 손아정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표현이었다. 손아정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테이블에 놓여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글자를 적었다. 답답한 마음에 글씨를 쓰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손아정은 잘 알고 있었다.
‘이따위 종이가 다 무슨 소용이야.’
그 종이를 손으로 구겨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는 지나가던 손님의 발길에 채였다. 발에 채인 종이는 데구르르 굴렀다. 한참을 굴러가던 종이 뭉치는 바닥에 매설된 콘센트함으로 떨어졌다. 콘센트함 구석에 박혀 있던 구겨진 종이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다. 고혁두가 얼마 전에 카페에 가서 발견하기 전까지는.
***
“재판장님, 피해자의 대리인으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피고인 오영훈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고 오히려 손아정 씨가 잘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손아정 씨는 잘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손준철은 귀를 의심했다. 피해자 측을 대변한다는 변호사가 피해자가 잘못을 했다고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다들 무척 놀랐다.
‘저 변호사가 지금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오영훈도 귀를 쫑긋 세웠다.
“손아정 씨의 잘못은 피고인이 보통의 사람들과 같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녀는 양심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자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뒤 사과를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상식을 무참하게 깨 버린 사람이 바로 피고인입니다. 피고인은 사과는커녕 피해자를 대면한 상태에서도 오히려 피해자를 모욕하고 겁을 줬습니다. 그리고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지금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혁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변론을 이어갔다.
“피고인 측은 만약 손아정 씨가 성폭행 피해를 당한 게 맞다면 어떻게 그 다음날 카페에서 만나 한가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손아정 씨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카페에 갔던 게 결코 아닙니다. 범죄에 대해 항의하고 사과를 받으려고 했던 겁니다. 피해자인 손아정 씨에게 그날 그 카페는 매우 고통스러운 장소였습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반성은커녕 윽박지르는 오영훈을 대면해야 했던 시간은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일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저로선 그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피해자의 마음을 보여주는 게 바로 저 문장입니다.”
고혁두는 다시 한번 종이 뒷면의 글자를 가리켰다. 고혁두의 변론을 통해 왜 손아정이 그 카페에 갔었는지가 설명이 되었다. 그 말은 사건 발생 다음날에 카페에서 갔으니 성폭행이 아니라는 오영훈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재판부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소원철 변호사가 재반박을 펼쳤다.
“지금 증인의 주장에는 큰 결함이 존재합니다. 증인 측 변호인은 저 종이에 쓰여진 글씨가 증인이 쓴 문장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문장을 증인이 썼다는 사실은 증명된 바 없습니다.”
타당한 주장이었다. 이렇게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고혁두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피해자가 작성한 노트입니다.”
고혁두가 가져온 건 손아정의 집 거실 책장에 있던 습작 노트였다. 고혁두가 형법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바로 그 노트였다.
“이 노트는 소중한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온 증거이기도 하죠. 지금은 피고인 때문에 그 꿈이 수포로 돌아갔지만요.”
고혁두가 노트를 펼쳐서 실물화상기에 두었다. 노트에 쓰인 글씨와 영수증 뒷면의 글씨는 한눈에 봐도 같은 사람이 썼다고 보일 만큼 동일한 모양이었다.
“혹시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피해자가 직접 글씨를 쓸 수도 있습니다.”
저 글씨가 손아정이 직접 썼다는 건 분명해 보이니 다른 반박이 필요했다. 소원철 변호사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아, 그래. 이거면 되겠다.’
“설령 저 글씨를 증인이 쓴 게 맞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갑자기 저 종이가 나온 게 수상합니다. 아마도 증인은 자신의 이야기가 맞다는 걸 보여줄 증거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뒤늦게 증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저 글씨는 사건 발생 다음날 쓴 게 아니라 최근에 쓴 거라는 겁니다.”
글씨를 쓴 시점은 손아정의 말이 진실인지를 가리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만큼 소원철 변호사의 주장은 상당히 강력한 반박이었다. 소원철 변호사는 한 발 더 나갔다.
“증인은 지금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서 재판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히려 역공까지 펼쳤다. 만약 글씨를 쓴 게 사건 발생 다음날이라는 걸 밝히지 못한다면 오히려 손아정이 큰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증거를 조작해서 법원에 제출하는 건 커다란 문제였다.
‘역시 소원철 변호사야. 실력 뛰어나다는 게 헛소문은 아니었어.’
소원철은 자신의 반박에 적잖이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순간 고혁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그 시각 청주지검은 주택공사 채용 비리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었다. 수사를 지휘한 한우진 부장검사가 언론사 기자들을 부른 뒤 직접 발표했다.
- 청주지검의 수사 결과, 그동안 의혹으로 떠돌던 채용 비리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주택공사의 인사 담당자들은 청탁 대상자의 명부를 만들고 전형 단계별로 합격 여부를 관리했습니다.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지원자도 서류 전형에서 합격을 시켰고, 면접 점수 등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브리핑을 한 뒤 기자들과의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을 가졌다.
“채용 비리에 유력 국회의원도 연관되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맹경혜 의원을 두고 한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해당 국회의원은 채용 비리에 관여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를 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법과 증거에 따라 판단을 했을 뿐입니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있습니까?”
맹경혜는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청주지검은 꼼꼼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이미 증거도 다수 확보한 상황이었다.
“증거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증거를 지금 말씀드리기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청주지검의 수사결과 브리핑은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었고, 맹경혜도 TV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것들이... 감히 날 건드려?”
제 분을 이기지 못한 맹경혜는 책상 옆에 있던 화분을 집어서 TV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와장창 유리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악!”
맹경혜는 비명을 질렀다. 깨진 유리 파편이 튀어서 맹경혜의 얼굴을 긁은 것이다. 자업자득이었다.
***
다시 오영훈의 재판이 벌어지고는 법정.
“저건 사건 발생 다음날에 쓴 게 분명합니다. 증인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저 글씨를 쓴 게 언제인가요?”
“그러니까... 범죄가 일어난 다음 날인 2019년 8월 30일입니다.”
손아정이 대답하자, 소원철 변호사는 목에 핏대를 세워 말했다.
“그건 증인의 일방적 주장일 뿐입니다. 증인 측이 자신들의 주장을 믿어주길 바란다면 단순히 말로 주장만 할 게 아니라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객관적인 증거 말입니다.”
소원철 변호사가 강하게 맞받아치자 오영훈은 반색했다.
‘그래, 소 변호사, 잘한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는데, 소 변호사가 잘 방어를 해 줘서 살았네. 역시 내가 변호사를 잘 골랐어.’
그때 다시 고혁두가 일어났다.
“피고인 측이 그렇게 간절하게 증거를 찾으시니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고혁두가 방청석에서 증인석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혁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다들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아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겠습니다. 이건 평범한 메모지나 종이가 아니라 카페의 영수증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영수증에는 카드가 결제된 날짜가 나옵니다.”
고혁두는 글씨가 쓰인 영수증을 뒤집었다. 앞면에는 거래일자, 즉 카드가 결제된 일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거래일자는 2019년 8월 30일이었다.
“하지만...”
소원철 변호사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자 고혁두가 말을 가로챘다.
“피고인 측 변호인께서는 설마 피해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영수증에 글씨를 썼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소원철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재판장이 말했다.
“양쪽의 변론을 잘 들었습니다. 충분한 변론을 펼친 것으로 보이니, 이것으로 재판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판결선고는 일주일 뒤 이 법정에서 하겠습니다.”
***
일주일이 지났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네 사람은 방청석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오영훈과 소원철 변호사는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은 긴밀하게 대화를 나눴다.소원철이 오영훈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오영훈이 고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고혁두는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진지하게 하는 거지? 뭔가를 또 꾸미고 있는 건가?’
오영훈과 소원철의 대화는 법원 경위의 우렁찬 외침이 들리자 멈췄다.
“모두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전용 출입문이 열리고 재판장이 들어왔다.
“그럼 지금부터 판결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인 오영훈 앞으로 나오세요.”
오영훈과 소원철 변호사는 방청석에서 피고인석으로 이동했다.
“재판장님!”
소원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판결 선고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재판장이 소원철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피고인 측은 판결선고 기일을 연기하여 주실 것을 연기하여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판결선고를 하기로 했다가 선고기일을 연기하는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판결선고를 갑자기 연기하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판결선고를 연기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소원철 변호사는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고인은 피해자 측과 합의를 하기를 희망합니다.”
‘합의라고?’
고혁두가 소원철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 뭔가를 준비하고 있던 것 같더니, 결국 이거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