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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증거

by 로도스로

“피해자 손아정에 대한 증인신문을 다시 한 번 하기를 희망합니다.”

김강혜 검사가 말하자, 고혁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미 지난 재판 때 증인신문을 하지 않았나요?”

재판장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증인신문을 했던 증인을 다시 증언대에 세우는 건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재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미처 다 물어보지 못한 질문들이 있어 한 번 더 증인신문을 할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피고인 측 의견은 어떤가요?”

재판장이 묻자, 소원철 변호사가 귓속말로 오영훈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할까요?”

“까짓것, 한 번 더 하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니, 소 변호사님이 세게 한 번 더 밟아주세요, 아주 찍소리도 못하게.”

손아정이 증인석에 다시 한 번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볼 걸 상상하니, 오영훈은 슬며시 웃음이 났다.

“피고인 측도 손아정에 대한 증인신문에 동의합니다.”

손아정이 다시 증인석에 섰다. 두 번째 서는 증인석이지만 여전히 긴장되었다. 이번에도 검찰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증인은 2019년 8월 29일 밤에 피고인으로부터 범죄 피해를 당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피고인의 주장에 따르면 사건 발생 다음날인 8월 30일에 피고인과 함께 카페에 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시겠어요?”

손아정은 그날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오영훈에게 유린당했던 그날, 손아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새 눈물이 쏟아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산부인과에 가서 증거를 확보해야 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범죄 피해를 당했으니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왠지 겁이 났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피해 사실을 말한다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성범죄란 워낙 민감한 부분에 관한 것이라 오히려 신고가 어려운 특성이 있었다. 먼저 당사자끼리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손아정은 이를 악물고 회사에 나왔다. 그리고는 대표실을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오영훈이 잠깐 고개를 들어서 손아정을 확인했다.

“대표실에 직접 찾아오고, 무슨 일이야?”

“대표님,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무슨 이야긴데?”

“어제 일에 대해서…”

오영훈은 잠깐 생각했다.

‘어제 일이라….’

어제 동창들을 만나서 술을 잔뜩 마시고, 잠깐 회사에 들렀던 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도 떠올랐다. 손아정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차차. 내가 술 먹고 실수를 했군.’

손아정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사건을 오영훈은 단순한 실수로 치부했다.

‘이걸 어떡하지?’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 잘 수습하는 게 중요했다. 일단 시간을 벌어보자고 생각했다.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내가 지금 너무 바빠서 그러니, 이 앞 카페에서 기다릴래? 급한 일만 끝내 놓고 나갈게.”

손아정을 미리 내보낸 오영훈은 당시 YH 엔터테인먼트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던 소원철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소 변호사님 좀 바꿔줘요.”

“소원철 변호사입니다. 급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요?”

“변호사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어제 내가 술을 좀 많이 마셨어요.”

오영훈은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뒤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소원철 변호사는 잠시 고민했다. 속으로는 ‘언젠가 한 번 사고 치겠다 싶더라니.’라는 생각했지만, 의뢰인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냉철함이 필요한 때였다.

“지금 피해자가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나요?”

“맞아요.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소 변호사가 제안한 대응 방안은 사진 촬영이었다.

“네? 사진을 찍으라구요?”

“그렇습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찍어야 합니다.”

“사진은 왜 찍는 거죠?”

“혹시라도 나중에 그 연습생이 대표님께 문제 제기를 할 경우를 대비한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최대한 다정하게 찍어야 한다는 겁니다. 도저히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처럼 보이지 않게 찍으세요. 마치 연인인 것처럼 찍으면 더욱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먼저 카페에 도착한 손아정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오늘 날씨 죽여주네. 미세먼지도 없고 말이야. 아정아, 밖에 한 번 봐봐. 시야가 엄청 깨끗하지?”

손아정은 지금도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팠는데, 오영훈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했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밥은 먹었어?”

“아니요.”

손아정은 겨우 대답했다.

“밥 잘 챙겨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 아정이랑 이렇게 따로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네. 이것도 기념인데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오영훈은 소원철 변호사가 시킨 대로 휴대폰을 꺼냈다. 손아정은 기가 막혔다.

‘이 와중에 사진이라고? 제정신이야?’

마음 같아서는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오영훈에게 괜한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참았다. 오영훈이 다가오더니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다. 손아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이러세요?”

지난 밤의 악몽이 떠오르면서 몸이 격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손아정은 오영훈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손아정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손아정으로서는 사진을 찍기 싫다는 의사표시를 한 셈이었다. 그 당시 손아정은 창밖을 보고 있어 자신이 오영훈의 사진에 같이 찍혔다는 사실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대표와 연습생이 다정하게 사진 한 장 찍으려고 했는데, 되게 비싸게 구네. 그럼 나 혼자 찍지 뭐.”.

그러니 이 사진이 어떻게 악용될 지에 대해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사진을 확보한 오영훈이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대표님! 저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

“무슨 이야기?”

“어제 일에 대해서요...”

“아, 어제 일? 어제 내가 술에 좀 많이 취했었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게 다였다. 용서해달라는 말도, 사과도 없었다. 미안해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대표님이 저에게…”

힘겹게 손아정이 피해사실을 말했다.

“사과하세요.”

손아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영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네? 뭐라고 하셨어요?”

“싫다고.”

“진심이세요?”

“진심이지. 사과라고? 잘못한 게 있어야 사과를 하지. 난 잘못한 게 전혀 없어. 술 먹고 취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로.”

“어떻게 그런 말을...”

손아정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밤새 흘려 이미 눈물샘이 다 마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눈물이 나왔다.

“너 혹시 돈 필요해?”

오영훈이 비꼬듯이 말했다.

“이런 식으로 겁주면 한몫 잡을 수 있다는 말 듣고 이러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 마. 다른 사람에게는 통했는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 없어. 할 이야기 끝난 것 같으니, 난 먼저 갈게. 내가 특별히 네 커피값은 내 줄게. 하지만 그게 내가 해주는 마지막 배려라는 거 알아 둬.”

그 말을 끝내고는 오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가버렸다. 이미 사진도 찍었으니 더 이상 손아정을 대면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증인의 진술을 잘 들었습니다. 꺼내기 힘든 기억일 텐데, 사실대로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요약하자면, 사건 발생 다음날에 피고인을 만난 건 사과를 받기 위해서였고, 카페에서의 사진은 증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찍힌 것이라는 것이지요?”

김강혜 검사가 요약정리해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카페에서 데이트를 한 건 더더욱 아니고요?”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

손아정이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상으로 검찰 측 신문을 마칩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말했다.

“이제 피고인 측 반대신문하세요.”

소원철 변호사는 마치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을 뜨고 손아정을 노려봤다.

“증인의 진술을 잘 들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게 지난번 재판에서는 이런 말이 전혀 없었는데 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많이 말하네요.”

“지난번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경황이 없어서...”

소원철 변호사가 손아정의 말을 잘랐다.

“며칠 사이에 이야기가 아주 풍성해진 게 인상적입니다. 아주 그럴 듯해 보이는 스토리를 만들어 오셨군요.”

손아정이 한 말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소리였다.

“저는 증인이 한 이야기라고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백보 양보해서 사실이라고 해 보죠. 오늘 증인이 한 말은 모두 증인의 일방적인 진술일 뿐이고,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에게 뚜렷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건에서 팩트는 바로 이 사진입니다.”

소원철 변호사는 다시 사진을 내세웠다. 카페 사진은 오영훈 측에게 유리한 결정적 한 방이었으니 그걸 계속 밀 생각이었다.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증인은 증인의 진술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있나요?”

손아정은 우물쭈물했다.

‘그것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입만 살아 가지고는.’

오영훈은 의기양양했다.

“증인!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소원철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압박이었다. 손아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증거 있습니다.”

소리가 난 곳은 방청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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