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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습작노트

by 로도스로

고혁두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보다 더 놀라운 소리를 들었다.

“지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당신 여동생 고예지를 죽였다고요.”

남성은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 누구야?”

고혁두가 고함을 질렀다. 어찌나 큰 목소리였던지 목에 핏대까지 섰다.

“근데, 형.... 나 오늘 간호사 선생님에게 혼났다.”

여전히 같은 목소리였지만, 동일한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밥 먹을 때 반찬 많이 흘린다고. 히잉. 조금 밖에 안 흘렸는데 아주 많이 혼냈어. 형이 간호사 선생님에게 나 구박하지 말라고 말 좀 해주면 안 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고 투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고혁두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당신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장난해?”

남성은 고혁두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혁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대한민국은 아주 썩어 빠졌어.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돈 좀 있다고 다른 사람 깔보는 사람들, 많이 배웠다고 무시하는 것들, 지 잘난 맛에 사는 것들, 내가 다 없애 버릴 거야.”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것처럼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뒤 또다시 말투가 바뀌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잠깐 말을 멈춘 남성은 흐느끼듯 말했다.

“흐흑.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마치 다양한 캐릭터를 한 명이 연기하는 모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이봐! 당신 정체가 뭐야?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내 동생은 어떻게 아는 거야?”

남성은 고혁두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채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혁두는 곧바로 걸려온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남성 대신에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수신이 되지 않는 번호이오니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 남자는 누구이고 왜 전화를 한 걸까?’

고혁두가 알고 있기로 동생을 죽인 범인은 안강인이었다. 안강인을 본지 꽤 되었지만 목소리는 생생히 기억하는데,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은 안강인이 아니었다. 안강인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니, 이 밤에 고혁두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고예지를 죽인 범인이라는 자백이라니.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

“의원님, 전화 왔습니다. 광주지검 지준민 검사장입니다.”

보좌관이 전화를 건넸다. 소파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던 맹경혜는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검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안 그래도 연락 한 번 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를 주셨네요.”

“의원님. 참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번에 말씀하신 청주지검 사건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을 그냥 덮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청주지검 차원의 수사 의지가 워낙 강합니다. 지켜보는 눈도 많고, 다른 지검 사건이라 제가 직접 손을 쓰기도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맹경혜는 순간 짜증이 확 일었다.

‘이 영감탱이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지준민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담당 검사에게 이야기해서 의원님에 대한 소환 조사는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청해 두었으니,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을 겁니다.”

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석하는 모습이 찍힌다는 것 자체가 국회의원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러니 비공개 소환이 가능하도록 한 건 지준민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맹경혜의 기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맹경혜는 비꼬듯이 말했다.

“비공개 소환이요? 검사장님, 참으로 고오오오~~맙습니다. 어찌나 감사한지 제가 직접 찾아 뵙고 검사장님께 큰절이라도 해야겠어요.”

지준민과의 통화를 마친 맹경혜는 곧바로 보좌관을 불렀다.

“검찰 조사에 대응해야 하니까 형사 전문으로 알아봐. 청주에서 오래 활동한 판사나 검찰 출신이 좋겠어. 이왕이면 옷 벗은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전관(前官, 판사나 검사로 재직하다가 변호사로 개업한 사람으로.”


***

“아정아, 밥 먹어야지.”

손준철이 손아정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손아정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말없이 방에 누워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지만 밥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목도 마르지 않았다.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고혁두, 손준철, 심정순이 모여 있는 거실은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밥상을 차리기는 했지만 누구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혁두는 집에 있기가 답답했다.

“전 잠깐 밖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변호사님, 밥이라도 드시고 가시죠?”

심정순이 고혁두에게 권했지만 고혁두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혁두는 정처 없이 걸으며 오영훈 사건을 되짚어 봤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재판이 이렇게 불리하게 흘러가다 보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손아정이 겪은 일을 듣고 나니 마음이 매우 아팠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도 치밀었다.

손아정을 보고 있으니 동생 예지 생각도 났다. 외모가 닮은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나이도 비슷한 또래이고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범죄를 당한 피해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뭐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고혁두가 가진 능력으로 손아정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은 바로 손아정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건 심정순 사건으로 끝내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법조인 노릇을 하기로 했다. 고혁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아정은 법정에서 무참하게 짓밝혔다. 피해자이면서도 다시 2차 피해를 당한 것이다. 그로 인해 손아정은 다시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냥 가만히 두는 게 나았을까?’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자연스레 아물었을 텐데, 괜히 들쑤셔서 상처를 더 심화시킨 건 아닌가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한편, 다른 생각도 들었다.

‘환부가 있으면 적시에 도려내야 한다. 당장의 고통을 생각해서 가만히 놔두면 나중에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속담에도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난밤에 심정순이 고혁두를 위로하며 건넨 말도 떠올랐다.

“뭐가 되든 맞서 싸워야 한이 안 생겨요.”

여러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들었다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과거에 판단을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지는 것보다 지금 닥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훨씬 중요했다.

이미 시작한 싸움을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멈춰버리는 걸 가장 바라고 있을 사람은 바로 오영훈이었다. 무죄 판결이 선고되면 오영훈의 예의 그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할 것이다.

“내가 뭐라고 했어? 어차피 당신들은 아무리 발악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했잖아. 괜히 까불다가 참 꼴 좋아. 크하하하.”

그 모습을 상상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절대 그렇게 되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

결국 손아정이 이 사건을 온전하기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영훈의 재판에서 승리하는 게 필요했다. 승리에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혁두의 고심이 깊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온 고혁두는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게 어디 갔더라?”

고혁두는 가방을 열심히 뒤졌다. 분명히 가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정순이 물었다.

“변호사님 뭐 찾으세요?”

“형법 책을 찾고 있는데, 안 보이네요.”

전략을 고민하던 고혁두는 원점에서 사건을 다시 검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존경했던 은사 교수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말을 되새긴 고혁두는 형법 책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그 책은 고혁두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부터 보던 책이었다. 하도 많이 봐서 책의 옆면에 검은색 손때가 가득했다. 책의 페이지마다 각종 메모와 밑줄이 가득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지만 책의 내용을 모두 외우지는 못한다. 또 예전에는 알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형법 책을 통해 관련 법리를 철저하게 점검해서 혹시 놓친 부분이 없는지를 살펴 보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빨간색 테두리가 있는 그 책 말인가요?”

“네, 맞아요. 혹시 보셨어요?”

“지난번에 가방에 있던 책 꺼내서 거실 책장에 놓아두지 않았어요?”

그제야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랬었죠. 이 놈의 정신 좀 봐. 저보다 심 여사님 기억력이 더 좋네요. 감사합니다, 여사님.”

고혁두는 거실로 가봤다. 심정순의 말대로 고혁두의 책은 거실 책장에 있었다. 형법 책을 꺼내려는데, 옆에 있는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고혁두의 손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노트로 향했다.

파란색 가죽 표지로 된 노트에는 ‘손아정의 습작노트’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고혁두는 예전에 손아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전 제가 직접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고, 프로듀싱까지 하고 싶어요.”

손아정은 자신의 궁극적 꿈을 위해 아이돌 연습생 준비를 하면서도 틈틈이 작곡 공부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면 직접 가사를 쓰기도 했다. 연습 삼아 써 본 가사를 정리한 게 고혁두가 보고 있는 습작노트였다. 노트 옆면이 반질반질한 걸 보니 손아정이 이걸 항상 들고 다니면서 자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돌 준비생답게 발랄하고 상큼한 가사가 대부분이었다.

- 너만 보면 내 심장이 콩닥콩닥, 너만 보면 내 가슴이 두근두근, 더 이상 숨기지 않을래,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너의 1번이 되고 싶어

20대 초반의 여성이 느끼는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가사들.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이지만, 원래 사랑은 유치한 법이다.

자신의 꿈을 적은 가사도 눈에 띄었다.

-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묻지 않을래,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을래.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을래. 나는 악기가 되고 싶어. 나는 노래를 하고 싶어.

몇 장을 더 넘겨봤다. 한동안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낙서가 노트를 가득 채웠다. 오영훈에게 끔찍한 범죄를 당한 시기에 작성된 노트였다.

그날 이후로 가사는 확 바뀌었다. 산뜻하고 밝은 빛은 사라지고, 어둡고 무거운 잿빛만 남았다.

- 어둠을 직시해. 그 안에 있는 악마를 봐. 악마가 달려와. 하지만 도망도 못 가.

- 숨이 막혀온다. 가슴이 무겁다. 출구는 없다. 눈물만 있다.

- 눈을 뜨지만 움직일 수가 없어. 입을 열어도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사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문장들은 손아정이 겪었던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고혁두는 노트를 덮었다. 가슴에 무거운 돌이라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손아정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어렵긴 해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재판을 뒤집어봐야겠어.’

그때였다. 하얀빛이 고혁두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놀랍다는 생각보다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랜만인데.’

하얀빛은 이내 사그라들었는데, 그 빛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고혁두는 휴대폰을 꺼냈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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