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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녹다운

by 로도스로

대연습실의 문을 연 사람은 바로 오영훈이었다.

“아니, 당...당신이... 여...여...기에 어떻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고혁두가 평소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바쁜 변호사님이 이 늦은 시각에 남의 회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

오영훈은 서서히 고혁두에게 다가왔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요?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오영훈은 장난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오영훈은 아까 대연습실에 들어왔다가 나갔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고혁두는 어안이 벙벙했다.


***

약 5분 전. 대연습실을 나와 4층 대표실로 간 오영훈은 책상 아래의 금고를 열어 현금 뭉치 세 개를 꺼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현관에 내렸다. 오영훈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 경비실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얼른 나와 오영훈에게 인사를 했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자신보다 연배가 훨씬 높은 경비원이 인사를 했지만 오영훈은 여전히 본체만체였다. 경비원을 지나쳐 가던 오영훈이 걸음을 멈췄다.

“이 봐요. 건물 관리 좀 똑바로 해요. 경비실에 앉아서 TV나 보고 있으라고 피 같은 돈 주는 거 아니니깐. 좀 전에 3층 대연습실 보니까 불이 환하게 켜져 있더라고. 경비원이라는 사람이 건물 전기 관리도 안 하고 뭐해요? 지 돈 나가는 것 아니라고 대충대충 하는 거지.”

공무원들 뇌물로 몇 백만 원 주는 건 어쩔 수 없는 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얼마 되지도 않는 대연습실 전기요금은 무척이나 아까운 모양이었다.

“하여튼 태도가 문제야. 그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경비나 하는 거잖아.”

갑작스러운 인신공격에 경비원은 당황했다. 아까 순찰을 돌 때 대연습실 불이 꺼져 있는 걸 분명히 확인했었는데 다시 켜졌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쌍욕을 먹는 게 억울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어쨌든 오영훈은 자신의 생계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뭐라도 만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고심하던 경비원의 머리에 뭔가가 번뜩 떠올랐다.

“아, 대표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인터넷 장애 건은 잘 처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경비원은 오영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오영훈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걸어가던 오영훈이 발걸음을 멈췄다.

“인터넷 장애라니?”

“아까 인터넷 수리 기사가 와서는, 대표님께서 인터넷 장애 생겼다고 연락하셨다고 말했는데, 대표님께서 연락을 하신 게 아닌가요?”

경비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눈에는 내가 인터넷 장애 같은 하찮은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인 것처럼 보여?”

칭찬 한 번 받아보려다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만 경비원은 심히 당황했다.

“아... 그게... 인터넷 수리 기사가 그렇게 말해서 저는 대표님께서 시키신 줄로만...”

경비원은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전화를 했다고? 수리 기사가 그렇게 말했어요?”

“네, 분명히 대표님께서 지시를 했다고 말했어요.”

뭔가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불현듯 아까 대연습실에 불이 켜져 있던 게 떠올랐다. 오영훈의 촉이 발동했다.

“지금 당장 CCTV 돌려봐.”

CCTV에는 인터넷 수리기사 작업복을 입은 고혁두가 찍혀 있었다.

“어디서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왔네.”


***

고혁두와 오영훈은 대연습실에서 마주 섰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아, 그게.... 손아정 씨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물건이 있어서 대신 가져가려고 왔어요.”

오영훈은 고혁두를 쏘아봤다.

“재판에 쓸 중요한 증거라도 찾으러 왔나?”

오영훈이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고혁두는 흠칫 놀랐지만 최대한의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럴 때일수록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직감한 고혁두가 서둘러 대연습실을 나가려고 했다.

“어딜 가려고?”

오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체격의 남자 네 명이 고혁두를 막아섰다.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오영훈이 부른 용역업체 직원들이었다.

고혁두는 사방을 살폈다. 창문이라도 있으면 창문을 깨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3층 대연습실에는 창문도 없었다.

‘물리적인 힘을 써서라도 돌파해서 가야 하나?’

고혁두는 제일 앞에 있는 사람부터 공략했다.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고혁두의 동작이 워낙 재빨랐던 까닭에 용역업체 직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고혁두가 첫 번째 사람을 공격하는 사이 나머지 세 명이 고혁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 사람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그만!”

소리를 지른 사람은 오영훈이었다.

“책상물림인 줄 알았더니, 우리 변호사님 싸움도 아주 잘 하시네.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어.”

그리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검고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물건, 바로 총이었다.

“그렇게 쫄 것 없어요. 실탄이 든 총은 아니고 가스총이니까. 하지만 가스총도 맞으면 꽤나 아프니 허튼짓은 하지 말고요.”

고혁두의 동작이 멈칫했다.

“아무래도 난 저 가방이 수상하단 말이야.”

오영훈의 말이 끝나자 용역업체 직원 한 명이 고혁두에게 다가가서 가방을 빼앗으려 했다. 카메라가 든 가방을 순순히 내놓을 리는 고혁두가 필사적으로 가방을 지켰다.

그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스총이 발사되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니까.”

정면으로 가스총을 맞은 고혁두는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고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혁두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오영훈이 고혁두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오영훈은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확인했다. 그 영상에는 자신이 손아정을 끌고 보컬 연습실로 데리고 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촬영되어 있었다.

“CCTV는 다 지웠는데 이런 게 남아 있었네. 하마터면 아주 큰 일 날 뻔했어.”

오영훈에게서 다시 카메라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혁두는 손을 뻗어봤지만, 점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오영훈은 카메라를 바닥에 있는 힘껏 내던졌다. 카메라의 부속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로 부족하다 생각했던지 경비원에게 말했다.

“망치 가져와.”

경비원에게서 망치를 건네받은 오영훈은 카메라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

오영훈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법정 내부.

“지금부터 이 사건의 피해자 손아정에 대한 증인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증인이 피고인과 대면하여 진술하면 심리적인 부담을 느껴 정신의 평온을 현저하게 잃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됩니다. 따라서 형사소송법 제165조의2에 따라 차폐시설을 설치하고 증인신문을 진행하겠습니다. 피고인은 뒤로 돌아앉으십시오.”

증인석과 피고인석 사이에는 병풍 모양의 가림막이 설치되었다. 손아정은 오영훈을 볼 수 없고 그건 오영훈도 마찬가지였다.

손아정의 손에 힘을 줬다. 가림막이 있어 오영훈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뒤에 그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아정은 심호흡을 한 뒤 힘겹게 피해사실에 대해 진술했다.

검찰 측의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나니 몸의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이 남아 있었다. 오영훈의 변호인 소원철 변호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피고인은 평소에도 가끔씩 밤에 회사를 방문하곤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건... 맞습니다.”

“피고인은 연습생들의 연습상황을 확인하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증인이 있던 장소에 방문한 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게 손아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알겠습니다. 증인의 말대로 그날 피고인과 두 사람 사이에 강제적인 성관계가 있었다고 가정을 해보죠. 성범죄 피해를 당한 사람은 바로 산부인과에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야 증거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증인은 그 일이 있은 뒤에 산부인과에 갔나요?”

“아니오.”

“아, 산부인과에 가지 않았군요.”

소원철 변호사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성폭행은 중대한 범죄입니다. 산부인과는 가지 않았더라도 경찰서에는 당연히 갔겠죠? 증인의 진술대로라면 엄청난 범죄 피해를 당한 거니까요. 증인은 경찰서에 언제 갔습니까?”

소원철 변호사는 이미 손아정이 사건 발생 직후에는 경찰서에 가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경찰서에... 가지 않았습니다.”

손아정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아, 그래요?”

소원철 변호사는 양팔을 벌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자세를 취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장된 제스쳐였다. 얄밉지만 꽤나 훌륭한 연기력이었다.

“그렇게 큰 피해를 당하고도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날은 너무 무서워서...”

“그날 증인의 심리 상태를 묻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됩니다.”

소원철 변호사는 단호한 어조로 손아정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증인은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에도 회사에 나왔죠?”

“네.”

“만약 증인의 주장대로 피고인이 증인에게 성폭행을 했다면 그 후 증인은 매우 괴롭고 힘든 상태에 있었겠네요?”

“그렇습니다.”

“증인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피고인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도 당연히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랬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손아정은 웬일로 오영훈의 변호사가 자신의 편에서 서서 공감하는 듯한 말을 꺼내는가 싶었다.

‘이거 뭔가 불길한데?’

고혁두는 소원철 변호사가 저런 말을 하는 건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그 걱정이 현실화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원철 변호사는 황갈색 서류 봉투를 꺼냈다.

“재판장님! 사진 한 장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그 서류 봉투에서 나온 사진을 본 손아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진은 사건 발생 다음 날 피고인과 증인이 만나서 함께 찍은 겁니다.”

사진은 오영훈이 찍은 셀카였다. 소원철 변호사가 사진의 배경을 가리켰다.

“먼저 이 사진이 촬영된 장소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커피숍은 오영훈의 회사 근처에 있는 곳인데, 깔끔한 인테리어와 세련된 분위기로 인기가 많은 곳입니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세련되게 잘 나와서 SNS에선 ‘인생사진 맛집’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장소입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이 데이트를 할 때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죠.”

김강혜 검사가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 소원철 변호사는 반격의 틈을 주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사진의 구도 및 표정을 눈여겨 봐 주십시오.”

사진에는 오영훈의 앞모습과 손아정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앞쪽에 있는 오영훈은 치아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보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정한 연인이 커피숍에서 데이트를 하다 즐거운 순간을 기념하기 사진을 찍은 것처럼 보입니다.”

참다못한 김강혜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지금 추측에 기반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재판장도 김강혜 검사에 동의했다.

“인정합니다. 변호인은 추측성 주장을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재판장님.”

소원철 변호사는 한 발 물러났다.

“뭐 연인이 아닐 수는 있습니다. 남녀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요. 연인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도저히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끔찍한 범죄를 당한 피해자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손아정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창밖을 보고 있어 오른쪽 얼굴만 보이는 까닭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사진 상으로는 봤을 때는 아주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소원철 변호사는 방청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증인은 끈질기게 주장합니다. 피고인에게 성폭행을 당해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당했다고.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증인은 커피숍에서 피고인을 만나 한가하게 셀카를 찍었습니다. 그것도 연인들이 주로 가는 카페에서 말입니다.”

소원철 변호사는 재판부를 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저히 제 상식으로는 범죄 피해자의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의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원철 변호사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이거였다.

‘손아정은 성폭행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다. 그저 피해자인 척하는 꽃뱀일 뿐이다.’

손아정은 뒷통수를 강하게 가격당한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그….그…..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원철 변호사는 증인신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피고인석으로 돌아갔다. 걸음걸이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했다.

방청석에 앉아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고혁두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이걸 어떡한다...”

깊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

그날 밤 고혁두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상대는 조용했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시죠?”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잘못 걸린 전화인가 싶어 끊으려고 할 때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어기... 혹시...”

남자 목소리였다.

“고혁두 검사님, 아니 변호사님인가요?”

“제가 고혁두 맞습니다. 누구시죠?”

“동생 이름은 고예지 맞나요?”

그때부터 고혁두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당신 누구야?”

상대방은 정체를 밝히는 대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제가 당신 동생을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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