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검에서 오영훈 사건이 사실상 잠자고 있는 동안, 청주지검에서는 송원진에 대한 수사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청주지검은 토지주택공사 충북지역본부를 비롯한 여러 곳에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확보한 증거물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청주지검에서 디지털 포렌식 수사를 담당하는 윤훈성 수사관은 주택공사 인사팀이 사용하던 컴퓨터에서 가져온 하드 디스크를 살펴보고 있었다. 현재 하드 디스크에 남아 있는 파일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하지만 원래 진짜배기는 삭제된 파일에 있는 법이다. 삭제된 파일을 얼마나 완벽하게 복구해 내는 지가 진정한 실력을 가리는 기준이 된다.
윤훈성 수사관은 복구 프로그램을 돌린 결과를 유심히 살펴봤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지워진 파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는 고의로 삭제된 파일도 포함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어, 이게 뭐지?”
윤훈성 수사관의 눈에 걸리는 엑셀 파일이 있었다. 윤 수사관의 손이 빨라졌다.
“와우, 빙고!”
윤 수사관이 복구해낸 파일을 살피던 담당 검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수사관님, 정말 대단하세요.”
다음날 뉴스의 메인 기사는 송원진에 대한 것이었다.
- 주택공사 충북지역본부가 특혜 채용 용도로 관리해온 것으로 의심되는 인사정보 기록 파일을 검찰이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검찰의 관계자에 따르면,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복구해낸 파일에는 특혜 채용에 관한 사항이 명시돼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이른바 ‘브이아이피(VIP) 추천 리스트’가 존재했던 셈입니다.
그 시각 맹경혜도 그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잠시 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맹경혜의 보좌관이었다.
“의원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뉴스가 이어졌다.
-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이른바 ‘브이아이피(VIP) 추천 리스트’가 존재했던 셈입니다. VIP는 각계 각층의 주요 인사들이 포함되었는데, 법사위 소속 유력 국회의원도 채용 청탁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강하게 몸을 떨던 맹경혜는 옆에 있던 휴대폰을 벽에 던졌다. 벽에서 강한 파열음이 났다.
청주지검의 채용비리 수사는 광주지검에도 알려졌다. 원칙적으로 청주지검 사건은 광주지검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이래저래 얽혀있게 마련이고, 특히 정치적인 영향이 있는 사건은 더욱 그랬다. 광주지검 지준민 검사장은 간부들을 불러모았다.
“지금 청주지검에서 대대적으로 채용비리 수사하는 것 다들 잘 알고 있지? 그 사건 어떻게 될 것 같나?”
“아무래도 사건의 파장이 매우 클 것 같습니다. 민감한 사안이라 젊은 층의 분노가 매우 큽니다.”
“청주지검에 확인해 봤더니, 맹경혜 의원의 이름이 엑셀 파일에 명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조만간 맹경혜 의원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준민 검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 지검에 맹경혜 의원 관련 사건이 있다고 했지?”
“네, 맹 의원의 아들이 성폭행 사건이 있습니다. 뒤탈을 없애려면 원칙대로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저희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검찰은 오영훈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오영훈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에이! 썅”
***
오영훈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공판기일에 법정에 출석한 오영훈은 검은색의 정장을 말쑥하게 입고 나타났다.
재판장이 호명하자 오영훈은 피고인석으로 움직였다. 어깨를 쫙 펴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모습의 그는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였다. 방청석에 앉아 오영훈의 모습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 손아정이었다. 힘들더라도 오영훈이 죗값을 받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하게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고혁두가 앉아 있었다.
“검찰의 공소사실 잘 들었습니다. 공소사실에 대해서 피고인은 인정하나요?”
재판장이 묻자 오영훈의 옆에 앉아 있던 소원철 변호사가 일어났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무테안경을 썼고 왁스를 발라 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최대한의 단정함을 보여줬다.
“피고인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합니다. 피고인과 손아정 씨가 성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두 사람의 합의에 따른 것입니다. 성인 남녀가 좋아서 관계를 가진 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합의? 좋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아정이 혈압이 치솟았다. 변호사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그건 오영훈이 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영훈은 조그마한 반성의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무표정하게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지루한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가끔 하품도 했다.
오영훈은 YH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었던 정가희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정가희는 오른손을 들고 증인선서문을 읽어나갔다.
-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오영훈의 변호인 소원철이었다.
“증인은 손아정 씨를 아나요?”
“잘 알고 있어요. 우린 같이 연습생 시절을 보냈거든요.”
“손아정 씨는 평소 어떤 성격이었나요?”
“아정이는 악바리였습니다.”
“악바리라는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해 주시겠어요?”
“좋게 말하면 엄청난 노력파였고 나쁘게 말하면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이라는 의미입니다.”
“아, 그렇군요. 손아정은 증인에게 ‘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무조건 연예인이 되고 말겠다.’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변호인은 모호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지만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손아정이 연예인이 되려고 자발적으로 오영훈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걸 은연 중에 내비친 것이다.
“네, 그렇게 말하는 걸 자주 들었습니다.”
정가희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증인이 보기에 평소 손아정 씨와 피고인의 사이는 어떤 편이었나요?”
“대표님이랑 아정이는 아주 친밀한 사이였어요. 대표님도 다른 연습생들보다 아정이를 더 아끼고 아정이도 대표님을 잘 따랐어요.”
“혹시...”
소원철이 잠시 말을 멈췄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였나요?”
검사가 일어났다.
“본 사건과 상관없는 질문입니다.”
소원철도 물러서지 않았다.
“본 사건의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강제로 일어난 것인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사이가 먼저 규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재판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피고인 측의 주장이 타당해 보입니다. 증인은 답변을 하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사귄 건지는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귄다는 소문은 파다했어요.”
손아정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손아정은 친구였던 정가희가 적이 되어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있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검찰 측도 증인신문을 하시겠습니까?”
“YH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했던 백서영 씨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백서영이 들어왔다. 20대 초반의 백서영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증인신문은 검찰 측이 먼저 시작했다.
“증인은 2019년 8월 29일 경의 일을 기억하나요?”
“네.”
“그날 있었던 일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날은 저랑 제일 친한 친구의 생일이라 친구 친구들 몇 명이 모여서 생일 파티를 했습니다. 회사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오영훈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백서영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때 오영훈 대표는 어떤 상태였나요?”
“술에 많이 취했는지 약간 비틀거리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증인은 다음날, 그러니까 2019년 8월 30일에 손아정을 만난 적이 있나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아마 그 다음 날 정도에 지나가다가 복도에서 아정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손아정의 표정이 어땠나요?”
“얼굴이 굉장히 안 좋아 보였습니다. 안색이 하도 나빠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오영훈이 사건 발생일에 술에 취해 있었고 다음 날 손아정의 표정이 안 좋아보였다는 진술은 손아정의 진술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검찰 측이 질문을 마치자 오영훈의 변호를 맡은 소원철 변호사가 반격을 시작했다.
“증인은 2019년 8월 29일에 오영훈 대표가 술에 취해 비틀대면서 회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오영훈 대표를 본 게 밤인가요, 낮인가요?”
“생일 파티가 끝난 뒤이니 밤입니다.”
“증인이 오영훈 대표를 본 건 밤 시간이라 주위가 많이 어두웠을 텐데, 그게 오영훈 대표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걸음걸이와 옆모습이 비슷했습니다.”
“걸음걸이와 옆모습이라... 그걸로 증인이 본 사람이 오영훈 대표라는 걸 100% 확신할 수 있나요? 참고로 증인은 진실만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소원철 변호사가 압박을 가하자 백서영은 약간 주눅이 들었다.
“100%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전 오영훈 대표를 봤다고 생각합니다.”
“증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그냥 넘어가죠.”
소원철 변호사가 질문을 계속했다.
“증인은 그날 회사로 다시 들어갔나요?”
“아니요.”
“그럼 증인은 밖에서만 오영훈 대표를 봤을 뿐이고, 그날 회사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네.”
설령 술에 취해 오영훈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게 곧 오영훈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고, 소원철 변호사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역시 소원철은 베테랑 변호사답게 예리하게 반격을 펼쳤다.
“또 증인은 2019년 8월 30일에 손아정을 봤고 손아정의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손아정 씨가 안부를 묻는 증인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나요?”
“아정이는 특별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증인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죠? 예를 들면 단순히 감기 기운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연습하는 게 힘들었거나 아니면 다른 일이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백서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원철 변호사의 잠깐 뜸을 들이더니 백서영을 향해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증인은 현재도 YH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나요?”
“아니에요.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증인은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YH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을 텐데, 연습생을 그만둔 이유가 뭔가요?”
“그건...”
백서영이 우물쭈물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오영훈 대표는 증인에게 담배를 끊을 것을 권고하였는데 증인은 계속 담배를 피웠고, 심지어는 담배 피는 사진을 SNS에서 올려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죠?”
백서영은 체념하듯 대답했다.
“네.”
“또한 증인은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해서 외박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은 YH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오게 된 것이고 오영훈 대표에게 원망을 많이 가지고 있죠?”
백서영은 강한 어조로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백서영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원철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통해 백서영에게는 ‘여러 모로 불량한 연습생 생활로 YH엔터테인먼트에서 쫓겨난 뒤 오영훈에게 반감이 많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방청석에 앉아 재판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고혁두는 재판부의 얼굴을 봤다.
재판부의 표정에서 백서영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느껴졌다. ‘백서영이 한 증언은 오영훈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거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겠구나.’라는 표정으로 백서영을 보고 있었다.
고혁두는 답답함을 느꼈다.
‘하아. 이거... 재판이 쉽지 않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