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연예인하고 싶어서 안달인 애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우리 회사에 오디션 보러 온 애들만 해도 부지기수야. 데뷔조에 끼워졌다고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지? 착각하지마. 지금이라도 내가 맘 바꿔 먹으면 넌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동안 꾸어온 꿈이 간절한 만큼 오영훈의 말이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건 아니었다. 손아정은 오영훈의 팔을 뿌리친 뒤 보컬레슨실 문고리를 잡았다.
“이년 봐라?”
이 정도 말하면 고분고분하게 굴 것이라 생각했던 오영훈은 손아정이 의외로 완강하게 거부하자 욕구가 더 강하게 끓어올랐다. 반쯤 열린 보컬레슨실의 문을 닫은 뒤 손아정의 뺨을 세게 갈겼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손아정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사이, 오영훈은 손아정을 소파 위로 밀쳤다. 그 뒤의 시간은, 폭력과 야만의 시간이자 짐승의 시간이었다.
***
이야기를 끝낸 손아정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는 눈물이 다 말라 버렸는지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건 심정순이었다.
“아이고, 저런...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느새 노을은 이미 져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험한 생각도 참 많이 했어요.”
심정순은 손아정의 팔에 숱한 상처가 있는 걸 발견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심정순이 손아정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
“잘못은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한 거지, 아정 씨 잘못은 절대 아니에요.”
그 말을 듣자 손아정의 눈물이 터졌다.
“절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심정순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손아정은 심정순의 품에 안겨 오래 울었다.
심정순이 손아정에게서 손아정의 사연을 직접 듣고 있을 무렵, 고혁두도 손준철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손준철은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을 멈추었다. 딸이 겪었을 그 야만적인 일을 생각하자 다시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손준철의 이야기를 듣는 고혁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움켜쥔 주먹이 분노로 떨렸고 온갖 험한 욕설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손준철은 당장 오영훈을 찾아가서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가장 악랄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오영훈을 응징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흉기를 준비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손준철은 그러지 않았다. 오영훈이 불쌍하거나 자신이 받을 처벌이 두려워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딸이 받은 상처가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제 몸 하나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직 걱정되는 건 딸 뿐이었다. 자신이 오영훈을 응징한 일로 인해 처벌을 받을 때에 손아정이 느낄 상처와 고통이 두려웠다.
“변호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저희 딸 사건 좀 맡아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손준철은 고혁두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잡은 두 손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고혁두는 골똘하게 고심했다.
“저의 뜻보다 중요한 건 아정 씨의 의지가 아닐까요?”
손아정과 고혁두가 나란히 마주 앉았다. 손아정은 고혁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짝 내린 상태였다.
손아정이라고 해서 고소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게 두려웠다. 그 인간과 대면한다는 일 자체가 여전한 고통이었다.
“만약 고소를 한다면 저도 경찰이나 검찰에 나가야 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고소인 조사를 할 때 가서 피해 사실을 진술해야 하고요.”
피해자에게는 잔인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사법 체계상 현실이 그랬다. 손아정은 그 일을 다시 생각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그냥 묻어두는 게 나을까?’
손아정의 마음이 흔들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손아정이 입을 뗐다.
“변호사님! 저, 고소하겠습니다. 고소해서 그 인간이 꼭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요. 변호사님!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최선을 다해서 아정 씨를 돕겠습니다.”
고소장을 제출한 날, 고혁두, 심정순, 손준철, 손아정은 거실에 빙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손아정 사건이 끝날 때까지 고혁두와 심정순이 손아정의 집에 머무르기로 하면서 자연스럽게 식사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돼지갈비찜이었다. 심정순은 살이 많이 붙어있는 갈비 한 대를 손아정의 밥그릇에 놓아줬고 손아정은 감사 인사를 한 뒤 갈비를 뜯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과일을 먹으면서 TV를 보는데, 송원진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송원진 주택공사 충북지역 본부장의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오늘 주택공사 충북지역 본부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습니다.”
파란색 압수수색 박스를 든 여러 수사관들이 주택공사 충북지역본부로 들어가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신상건이 기사를 작성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올린 뒤 여론의 방향이 바뀌자 검찰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충주지방검찰청 공공수사2부는 오전 10시부터 주택공사 본부장실 및 예산 담당 부서, 입찰 관련 부서, 인사 부서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습니다. 검찰은 검사와 수사관 10명 이상을 투입하여 송원진 본부장이 주택공사 입찰과 관련하여 입찰 참가 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하였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사의 리포팅이 마무리될 때쯤 스튜디오에 있는 앵커가 물었다.
“송원진 본부장은 금품 수수 외에도 다양한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폭행 사건도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송원진 본부장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는 얼마 전 호텔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송 본부장은 술에 만취한 상태로 난동을 부렸고 그 과정에서 기자 한 명이 폭행을 당했습니다. 검찰은 압수수색이 끝나는 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뉴스를 보고 있던 건 고혁두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뉴스를 시청 중이던 신상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꼴 좋다, 송원진.”
***
손아정은 광주지방검찰청 앞에 섰고 그 옆에는 고혁두 변호사가 있었다.
“아정 씨, 이제 들어갈까요?”
담당 검사인 김강혜 검사는 30대 초반의 여성 검사였다.
“지금부터 고소인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조사는 김강혜 검사가 묻고 손아정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체로 일어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어떻게 오영훈을 알게 되었고, YH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조사 시작한 지 2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 김강혜 검사가 말했다.
“어느 정도 사실관계 정리는 끝난 것 같네요.”
고혁두와 손아정이 검사실을 나가려고 할 때, 김강혜 검사가 불렀다.
“변호사님, 가시기 전에 휴게실에서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실까요?”
휴게실은 복도 끝쪽에 있었다. 손아정은 1층으로 먼저 내려가고 고혁두가 휴게실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김강혜 검사가 다가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까 검사실에서는 보는 눈도 많고 해서 아는 체를 못했는데 여긴 휴게실이니 편하게 말씀드리려고요. 저 기억 안 나세요?”
고혁두는 찬찬히 김강혜 검사를 뜯어봤다. 낯이 익은 얼굴이기는 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4년 전에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 근무하셨죠?”
김강혜 검사가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났다.
김강혜 검사의 첫 부임지가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이었고 고혁두도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근무 층도 다르고 부서가 달라 친분이 깊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고혁두도 오다가다 김강혜 검사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선배님, 소식은 간간이 들어왔습니다. 옷 벗으셨다는 이야기 듣고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저, 근데 이 사건이요... 끝까지 하실 건가요? 피의자를 꼭 법정에 세워서 유죄 판결까지 받으려고 하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당연합니다. 그러려고 고소한 거니까요.”
김강혜 검사가 잠시 뜸을 들였다.
“원래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과거의 인연도 있고 해서 변호사님께 특별히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 사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검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런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손아정 씨는 아주 구체적이고 일관적으로 피해 사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기소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리적으로만 보면 그렇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김강혜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윗분들이 이 사건에 관심들이 많으세요. 적당한 선에서 합의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피의자 쪽에도 좀 압박을 가해서 합의금이라도...”
김강혜 검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혁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겁니까? 적당한 선이라뇨? 하루하루가 고통이고 지옥인데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다고요? 지금 와서 돈 몇 푼 받는다고 그 일을 깨끗이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지금 담당 검사로서 할 이야기입니까?”
고혁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김강혜 검사가 한발 물러섰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세요? 전 그냥 제안을 드린 것뿐입니다.”
“다시는 그런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혁두는 인사도 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손아정은 검찰청 1층 로비에서 고혁두를 기다렸다. 검찰청 로비에는 검찰의 주요 활동을 홍보하는 게시판이 있었다. 이달의 광주지방검찰청 소식이라는 제목 아래 각종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손아정이 게시판 속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자 고혁두가 다가왔다.
“아정 씨,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손아정이 한 사진을 가리켰다.
- 관내 지역구 국회의원과의 간담회
사진 속 인물은 판사 출신으로 광주가 지역구인 맹경혜 국회의원이었다. 지역구에서만 내리 3선을 한 그녀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었다.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기만 해도 힘이 센데 거기다가 맹경혜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했으니 검찰에게 맹경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맹경혜 입장에서도 검찰은 필요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에 맹경혜와 검찰은 간담회 형식을 빌어 자주 자리를 갖곤 했다.
“어! 이 사람?”
“많이 닮았죠? 유전자의 힘이란 참 무서워요.”
사진 속 인물은 판사 출신으로 광주가 지역구인 맹경혜 국회의원이었다. 맹경혜는 오영훈과 똑 닮아 있었다.
***
손아정이 자신을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영훈은 사무실의 집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어디서 깝치고 있어?”
온갖 성질을 다 부린 뒤에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오영훈은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다.
“아들, 왔어?”
맹경혜가 반갑게 오영훈을 맞았다.
“안 그래도 간장게장 실한 게 있어서 집에 오라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딱 맞춰서 왔네.”
“제가 먹을 복이 있잖아요.”
오영훈은 실실 웃으며 맹경혜의 팔짱을 꼈다. 싫지는 않았지만, 평소와 달리 유난히 살갑게 구는 아들이 낯설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우물쭈물하던 오영훈이 입을 뗐다.
“엄마, 실은....”
그리고 다음 날 맹경혜는 광주지방검찰청의 지준민 검사장과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의원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중식당의 가장 안쪽 방에서 기다리던 지준민 검사장은 맹경혜가 방을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검사장님!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두 사람은 북경오리를 안주 삼아 마오타이를 나눠 마셨다. 만난 지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맹경혜는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지준민 검사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요즘 의원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사건이라도 있으신가요?”
기다렸다는 듯 맹경혜가 냉큼 대답했다.
“검사장이 말씀 꺼내셔서 하는 이야긴데, 요새 신경이 쓰이는 일이 좀 있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