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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새로운 증거

by 로도스로

고혁두의 전화가 울렸다.

“고혁두 변호사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KMS방송국 시사보도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한수경 PD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사건의 진실’이라는 보도프로그램의 연출을 맡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이라면 고혁두도 몇 번 본적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주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탐사프로그램이었다.

“저희 프로그램에서 이번에 연예기획사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중에는 연예기획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범죄도 포함이 되고요. 연예기획사 대표의 성폭행 사건을 취재하던 중 변호사님이 피해자 측을 대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잠깐 인터뷰 괜찮으실까요?”

고혁두는 인터뷰를 하는 게 손아정 사건에 도움이 될지를 생각했다. TV프로그램이 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래도 TV 프로그램이 연예기획사의 다양한 비리와 범죄를 다뤄서 사회적인 관심도가 높아지면 재판부도 손아정 사건을 조금 더 꼼꼼하게 챙겨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수경 PD가 질문을 던졌다.

“연예기획사에서 성범죄가 종종 일어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연예기획사 대표와 연습생은 전형적인 갑을관계입니다. 대표는 연습생의 데뷔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기획사 대표는 그 힘을 악용하는 거구요.”

이 인터뷰로 인해 나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지에 대해 그때의 고혁두는 알지 못하였다.

‘그 사건의 진실’이 방영된 건 인터뷰로부터 2주가 지난 뒤였다. 부산의 어느 정신병원의 휴게실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병문안을 온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한 남성은 휴게실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다.

“한국의 연예기획사,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타이틀이 나온 뒤에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중간에 오영훈 사건과 재판 진행 과정도 다뤄졌고 고혁두가 짧게 인터뷰를 한 내용도 방송되었다.

“연예기획사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범죄에 대해 수사기관의 적극적인 수사와 법원의 엄정한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고혁두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남성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커졌다. 마치 아는 사람을 봤는데, 정확히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 뒤, 남성이 흠칫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괴성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남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 남자의 눈은 짝눈이었고 습관처럼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

오영훈의 두 번째 재판일이 다가오자 고혁두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난 재판에서 이뤄진 정가희와 백서영에 대한 증인신문은 결과적으로 오영훈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아정 씨, 혹시 시간 되나요? 잠깐 산책이나 할까요?”

고혁두가 손아정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집 주변의 공원을 산책했다. 갑자기 산책을 하자고 한 걸 보면 고혁두가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고혁두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날의 기억을 환기하는 게 아정 씨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지만,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손아정은 연습실을 떠올렸다. 떠올리기 싫은 악몽같은 곳이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손아정도 오영훈 재판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YH엔터테인먼트에는 총 5개의 연습실이 있었다. 대연습실 2개, 중연습실 2개, 소연습실 1개였다. 당시 손아정이 연습을 하던 곳은 대연습실이었다.

대연습실은 주로 안무연습을 하는 공간이라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대연습실 구석에는 작은 방이 하나 딸려 있었고 그곳이 보컬 연습실이었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보컬 연습실은 밀폐된 공간이었고 오영훈은 그곳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YH엔터테인먼트의 건물 구조를 찬찬히 살피던 손아정이 뭔가를 생각해낸 것 같았다.

“혹시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대연습실에 CCTV가 2대 있었어요.”

“보컬 연습실에는요?”

“보컬 연습실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대연습실 CCTV를 확인해 보면, 술에 취한 오영훈이 저를 강제로 보컬 연습실로 끌고 가는 모습이 찍혀 있을 거예요. 이거면 저희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겠죠?”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손아정이 반색했다. 고혁두가 냉정하게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게 지금도 남아 있다면요.”

검찰이 오영훈을 기소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영훈은 건물 관리를 맡고 있는 직원을 불렀다.

“우리 회사에 있는 모든 CCTV 메모리 카드 가져와, 지금 바로.”

잠시 뒤 직원이 메모리 카드를 한 움큼 가지고 왔다. 오영훈은 직원이 가져온 메모리 카드를 받자,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사무실 한쪽에 있는 골프채를 꺼냈다. 한껏 힘을 줘서 골프채를 내려치자 메모리 카드는 이내 박살이 났고,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골프채로 메모리 카드를 부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오영훈은 발로 메모리 카드를 짓이겨 밟았다. 그렇게 CCTV 영상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뒤 손아정이 급히 고혁두를 찾았다.

“변호사님, 저 새로운 증거가 될 만한 게 생각났어요.”

“새로운 증거라고요? 그게 뭔가요?”

고혁두가 놀라서 물었다.

“연습실에 CCTV 말고 카메라가 한 대 더 있어요.”

손아정의 노래 실력은 연습생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했다. 하지만 춤실력은 다소 부족한 편이었다. 오로지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대연습실에는 거울이 있어 자신이 어떻게 춤을 추는 볼 수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춤에 온전히 신경을 쓰다 보면 동작이 제대로 되는지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카메라였다.

그날도 카메라로 촬영을 하던 중에 오영훈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니 그 장면이 촬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건 발생 무렵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 카메라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고 기획사를 나올 때에도 겨우 몸만 빠져나오느라 카메라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손아정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고혁두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직 카메라가 남아 있을까요? 그것도 오영훈이 없애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오영훈은 그 카메라에 대해 알지 못해요.”

손아정이 카메라를 설치해 둔 곳은 대연습실 구석에 있는 청소도구함 안이었다. 거의 매일 안무 연습을 하는데 매번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힘들어 보관 장소가 필요했는데, 청소도구함이 제격이었다.

“좋은 정보네요. 당장 그 카메라를 확보해야겠군요.”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증거물을 확보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서 증거를 강제로 가져오는 것이다. 검찰-법원이라는 두 단계를 거치는 동안 시간이 꽤 걸릴 것이고, 그동안에 오영훈이 그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다.

신속한 대응이 필요했다. 그러니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선 고혁두는 직접 YH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죠?”

YH엔터테인먼트 건물의 경비 업무를 맡고 있는 경비원이 물었다. 고혁두가 대답했다.

“인터넷 장애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고혁두는 모자를 눌러쓰고 작업용 점퍼를 입은 상태였다.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공구함까지 들고 있으니, 영락없는 인터넷 수리 기사의 모습이었다.

“인터넷 장애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제가 한 번 확인해 볼게요.”

경비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고 시도했다. 고혁두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전화를 거신 분이 오영훈이라고 하던데, 여기 아닌가?”

고혁두가 다급하게 말했다. 혼잣말처럼 했지만, 경비원이 들을 수 있게 일부러 크게 말했다.

“네? 지금 전화를 한 사람이 오영훈 대표님이라고 했어요?”

“대표인지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암튼 최대한 빨리 고쳐달라고 아우성이더라고요.”

경비원도 오영훈이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잘 알고 있었다. 오영훈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당장 잘릴 각오를 해야 한다.

“아, 그럼 얼른 들어가세요.”


고혁두가 YH엔터테인먼트를 방문한 그 시각, 오영훈은 회사 근처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요새 이래저래 짜증 나는 일이 많아 술을 마시는 날도 잦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광주시청 건축과의 진 과장이었다.

“광발모가 내일인 거 까먹으신 거 아니죠?”

‘광발모’는 “광주의 발전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약자이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실상은 광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 이를테면 시청의 고위 공무원, 사업가, 정치인들이 모여서 술 마시고 노는 모임이었다. 광발모는 공무원들이 사업가들로부터 뒷돈을 챙기는 자리이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고 난 뒤 지역의 사장들은 공무원들에게 차비나 용돈 명목으로 돈을 전달했다.

‘거머리 같은 놈. 이런 상황에서도 돈을 뜯으려고 하다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 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별 탈 없이 계속 영업을 하려면 시청의 고위 공무원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통화를 마친 오영훈은 지갑을 확인했다. 지갑에는 5만 원권 지폐 한 장과 1만 원권 지폐 세 장이 전부였다.

“실탄을 채워야겠네.”

오영훈의 사무실 책상 아래에는 금고가 하나 있다. 현금, 중요한 장부를 관리하는 금고였다. 오영훈은 가게를 나와 회사로 향했다.

오영훈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건물 보안을 맡고 있는 경비원이 관리실에서 나와서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오영훈은 그냥 본체만체하며 경비원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직행했다.


고혁두는 우선 사무실 배치도를 확인했다. 3층에 있는 대연습실은 손아정이 말한 것과 동일한 구조였다. 청소도구함은 대연습실 구석에 있었다.

‘제발 카메라가 있어야 할 텐데…’

간절한 염원을 담아, 청소도구함 문을 열었다.

고혁두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그 소리는 절망감을 담은 한숨이 아니었다. 안도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 청소도구함 안에는 검은색 소형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고혁두가 카메라에 저장된 동영상 파일을 확인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하차하면서 문이 열릴 때 나는 알림음이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씨X.”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오영훈이 신경질을 부리며 소리를 냈다.

“요샌 별것도 아닌 게 다 성가시게 구네.”

신경질을 부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영훈은 엘리베이터를 발로 뻥 차기까지 했다. 대표실이 있는 4층을 누른다는 걸 실수로 3층을 누른 건 본인이면서 오영훈은 괜히 엘리베이터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대연습실에 있던 고혁두는 문에 귀를 쫑긋 세우며 밖의 동정을 살폈다.

“출입문이 닫힙니다.”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혁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오영훈이 ‘열림’ 버튼을 눌렀다. 3층 대연습실의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오영훈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대연습실로 걸어갔다. 대연습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오영훈이 들어왔다.

“누구 있어?”

오영훈이 크게 소리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고혁두는 대연습실 안쪽의 보컬 연습실로 숨었다. 하마터면 오영훈에게 걸릴 뻔했는데, 간발의 차이였다. 하지만 오영훈은 곧바로 대연습실을 떠나지 않고 대연습실 중앙을 가로질렀다. 오영훈의 구두가 바닥에 닿으며 나는 소리가 대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구두 소리가 보컬 연습실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고혁두의 심장은 쿵쿵쿵 뛰었다. 이제 오영훈과 고혁두의 거리는 불과 1m도 남지 않았다. 오영훈은 보컬 연습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오영훈이 문을 열기만 하면 고혁두의 정체는 바로 발각될 위기였다. 고혁두는 긴장감으로 온몸에 땀이 솟았다.

바로 그때 오영훈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세요, 엄마?”

“이번 주말에 시간 되면 가족 식사나 할까 하고.”

맹경혜와 통화하느라 고혁두는 보컬 연습실의 문을 열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대연습실을 나가 4층 대표실로 향했다. 오영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고혁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고혁두는 오영훈이 대연습실을 나간 뒤에도 한동안 보컬 연습실 안에 있었다. 다시 오영훈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흘러 다시는 오영훈이 오지 않은 거라는 생각이 들자, 고혁두는 보컬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고혁두의 작업복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고혁두는 차분하게 카메라의 동영상을 검색했다.

사건 발생일에 촬영된 동영상을 재생하니, 대연습실에서 춤연습을 하고 있는 손아정이 보였다. 빠르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얼마 뒤 오영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아정이 말한 그대로였다.

“됐다. 이거면 되겠어.”

고혁두는 카메라를 챙겨서 공구함 가방에 넣었다. 이제 무사히 YH 엔터테인먼트를 빠져나가서 법정에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고혁두가 대연습실을 나가려는 순간 출입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을 보고 고혁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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