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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영훈의 마지막 수

by 로도스로

“합의를 할 예정이니, 판결 선고기일을 미루자는 이야기인가요?”

재판장이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재판장님.”

소원철 변호사의 말투는 어느 때보다 공손했다.

“피고인은 이 사건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피해자가 입은 상처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부디 피고인에게 조금의 시간을 주시어 피고인과 피해자가 이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화려한 언변으로 변론을 마친 소원철 변호사는 허리를 살짝 숙이기도 했다. 재판장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재판장은 옆에 있는 배석판사에게 의견을 구했다. 두 명의 판사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법정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잠시 뒤 드디어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판결 선고를 일주일 뒤로 연기하겠습니다.”

재판부가 퇴장하자 오영훈과 소원철 변호사는 악수를 하며 기쁨을 나눴다.

“변호사님!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재판을 마치고 나온 심정순이 씩씩거렸다.

“판결 선고하는 날에 갑자기 합의를 하겠으니 판결을 늦춰달라는 경우도 있나요?”

고혁두가 대답했다.

“아주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합의를 하겠다는 건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느 정도의 피해 배상을 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니 법원 입장에서는 판결 선고를 미루고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이죠.”

“오영훈 그 인간이 저에게 용서를 구한다고요?”

손아정은 격양된 목소리였다.

“말은 그럴 듯 하게 했지만, 결국 불리한 판결이 나올 것 같으니 이제 와서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거 아닌가요?”

“네, 맞아요. 일종의 꼼수인 셈이죠. 합의 여부가 피고인의 형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만 합의를 했다고 해서 유죄가 무죄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합의는 오영훈이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네, 변호사님.”

판결 선고 연기라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놀라고 분노했던 심정순, 손아정, 손준철은 고혁두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적잖이 안심되었다.


***

재판을 마친 손준철은 근무장소인 플렉스빌리지 아파트로 향했다. 플렉스빌리지는 평균 가격이 20억 원이 넘는 고가의 아파트였다. 광주시의 고위 공무원, 유명 의사, 기업 대표 등 광주에서 목에 힘깨나 주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했다.

아파트 입구에 담배꽁초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금연이라고 아무리 방송을 하고 안내를 해도 꼭 그걸 어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손준철은 급하게 담배꽁초를 주워들고 근무지인 경비실로 들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경비실에선 장 주임이 택배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중요한 일 있다고 한 건 잘 끝났어요?”

“뭐 그럭저럭이요. 나머지 정리는 제가 할 테니, 얼른 퇴근 준비하세요.”

“전 먼저 들어가 볼 테니, 수고하세요.”

손준철이 경비원 교대일지에 출근시각을 적고 있을 무렵, 지하주차장에 소원철 변호사의 검은색 고급 세단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소원철 변호사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 고객님의 소중한 택배는 경비실에 맡겨 두었습니다.

지난 재판에서 승소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산 최고급 양주가 이제 도착한 모양이었다. 문 앞에 놔두고 가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워낙 고가의 양주라 혹시라도 분실위험이 있어 경비실에 두라고 요청해둔 상태였다.

경비실에 들어가자 손준철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2305호 택배 찾으러 왔어요.”

소원철 변호사가 말하자 손준철은 부지런히 택배 상자를 뒤졌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손준철은 법정에서 소원철이 오영훈을 열심히 변호하던 걸 떠올렸고, 소원철 변호사는 재판을 끝내고 손아정과 함께 법정을 나서던 손준철을 기억했다.

“여기서 또 뵙네요.”

소원철 변호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네...”

손준철은 시선을 피한 채 겨우 대답했다.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변호할 수가 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원철 변호사는 자신의 밥줄을 거머쥐고 있는 이 아파트의 입주민이었다.

“그럼 전 이만...”

경비실을 나온 소원철 변호사는 오영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대표님! 생각보다 합의가 수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원철은 이어서 플렉스빌리지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을 맡고있는 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사장님, 잘 지내셨죠? 소원철 변호사입니다.”

“소 변호사님께서 어쩐 일로 저에게 다 전화를 주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

손준철이 교대근무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관리소장이 불렀다.

“손 주임, 잠깐 얘기 좀 해요.”

관리소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우리 회사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죠?”

“이제 3년 다 되어 갑니다.”

관리소장은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후하고 내뱉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이번 달까지만 나오시고 다음 달부터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손준철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고 주민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손 주임 열심히 일하는 거야 내가 잘 알죠. 그런데 회사에서 결정한 거라....”

손준철은 플렉스빌리지에서 일을 하지만 플렉스빌리지 소속은 아니었다. 플렉스빌리지는 관리회사에 아파트 경비, 청소 등의 전반적인 업무를 맡겼고 관리회사가 손준철과 같은 경비원을 고용하는 형식이다. 관리회사에게 계속 아파트 관리 업무를 맡길지를 결정하는 건 플렉스빌리지 입주자대표회의였다.

“나도 뭔 일인가 싶어서 회사에 물어봤는데,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인 박 사장님이 회사에 전화를 한 모양이에요.”

그제야 손준철은 아까 봤던 소원철의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구인지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치사한 새끼....”


***

다음날 손준철의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여보세요.”

“소원철 변호사입니다.”

쌍욕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어쩐 일이죠?”

“오늘 비번이시라고 들었는데, 잠깐 저희 사무실에서 이야기 좀 나누시죠. 저희 사무실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소원철 변호사의 사무실은 상당히 넓었다. 바닥 마감재가 대리석이라 매우 고급스러운 느낌이 났다.

“바쁜 분께서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나요?”

“서로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따님 문제로 상의를 드리고 싶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저희 쪽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

소원철 변호사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준철이 입을 열었다.

“합의 이야기라면, 됐습니다.”

손준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희는 절대 합의 안 합니다.”

손준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자 소원철 변호사가 손준철을 잡았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아직 어떤 제안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손준철은 일단 소원철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듣자하니 손아정 씨는 그냥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창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야 할 나이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죠. 제 생각에는 아정 씨가 지금처럼 집에만 있는 것보단 대학을 다니면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아, 물론 대학 등록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저희 측에서 모두 부담할 테니까요. 그리고 음악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한다면 실용음악과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손준철은 주먹을 꾹 쥐었다.

‘결국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건가...’

“돈으로 대충 때우겠다는 게 아닙니다. 저희 측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걸로 피해를 보상하고자 하는 겁니다.”

소원철은 이미 손준철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돈 이야기를 하면 속물이라고 말하는데 깨놓고 말해서 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솔직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큼 간편하고 공정한 것도 없습니다. 물론 돈을 받는다고 해서 아정 씨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오영훈 대표가 감옥에 간다고 해서 아정 씨가 완전히 괜찮아질까요? 설령 오 대표에게 실형이 선고되더라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사회로 복귀할 겁니다. 그럴 바에야 실리를 챙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엇이 진정으로 따님을 위한 길인지를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손준철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 따위 개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그 개소리가 아주 틀린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소원철 변호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황토색 서류 봉투에서 합의서를 꺼냈다. 합의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 1. 고소인(손아정)이 피고소인(오영훈)을 성범죄로 고소한 사건에 관하여 고소인은 피고소인으로부터 일체의 피해를 변제 받았음을 확인한다.

- 2. 고소인은 본 건과 관련하여 향후 민사・형사를 포함한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한다.

소원철 변호사가 합의금으로 제시한 금액은 3억 원이었다.

“3억 원이라…”

한 달 내내 경비원으로 뼈가 빠지게 일해서 받는 월급은 200만 원 남짓이었다. 3억 원은 손준철이 12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월급을 모아야 얻을 수 있는 돈보다 많은 액수의 돈이었다. 합의금을 받는다고 해도 물론 그 돈으로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딸이 겪었던 그 참혹한 피해의 대가로 돈을 받아 호의호식한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대신 그 돈으로 딸 손아정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봤다.

‘그 돈이 있으면 아직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이 있으면 다른 20대의 또래 아이들처럼 옷도 사고 가방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이 있으면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해외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돈은 절대 받고 싶지 않은 돈이지만, 손준철이 딸에게 해주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손준철의 마음이 흔들렸다. 또한 오영훈 측은 손아정이 다닐 만한 학교도 알아 봐준다고 했다. 소원철 변호사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무엇이 진정으로 따님을 위한 길인지를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손준철은 고심을 거듭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손아정의 아버지라고 해도 이 문제를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직접 피해를 당한 손아정의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집으로 돌아온 손준철은 손아정의 방문을 두드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손준철이 아주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말이다. 아까 오영훈의 변호사를 만났는데...”

손준철은 소원철 변호사를 만난 일과 소원철 변호사가 어떤 합의안을 제시했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구나. 너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니 너의 결정을 존중하마.”

손아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손준철은 소원철 변호사가 전달한 합의서 봉투를 책상에 놔두고 손아정의 방을 나왔다.

사실 손아정도 오늘 소원철 변호사의 전화를 받았었다.

“손아정 씨, 맞죠? 오영훈 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소원철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죠?”

“긴히 드릴 이야기를 있는데, 잠깐 시간될까요?”

“전 그쪽과 이야기할 게 없어요.”

손아정은 단호했다. 막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소원철이 말했다.

“아버님의 일입니다. 아버님이 플렉스빌리지 아파트에 근무하시죠?”

“지금 저희 뒷조사하시는 거예요?”

“뒷조사라뇨.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사는 곳이 거긴데, 우연히 아버님을 봤을 뿐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제가 아파트입주자대표회장과 친분이 좀 있는데요, 아버님이 곧 일을 그만두실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손아정이 화들짝 놀랐다.

“근무성적이 좋지 않아서 근로계약을 해지하려는 모양이에요. 아버님이 계속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제가 나름 힘을 쓰고 있기는 한데, 아정씨도 아버님을 위해서 뭔가 노력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합의를 하라는 종용이자, 협박이었다. 그날 밤 손아정과 손준철의 방은 아침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

두 번째로 잡힌 오영훈의 판결선고일. 방청석에 앉아 있는 고혁두, 손아정, 손준철, 심정순의 표정은 하나같이 매우 어두웠다. 모두 입은 다문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오영훈과 소원철 변호사는 여유가 가득했다.

“소 변호사님! 합의서는 잘 전달했죠?”

“네, 대표님.”

“그쪽이 합의를 할까요?”

소원철은 고개를 돌려 손아정 쪽을 바라봤다. 손아정의 무릎 위에는 황토색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서류봉투 겉면에는 ‘변호사 소원철 법률사무소’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소원철이 합의서를 담아 손준철에게 줬던 그 서류봉투였다.

“합의서 오늘 제출할 겁니다.”

“큭큭큭.”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 예상한 듯한 반응이었다.

“엄청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돈 준다고 하니 꼬리 내리네.”

“돈 앞에 장사 있나요?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가 참 무서운 거죠.”

“이번 재판에선 소 변호사님이 고생 많으셨어요. 빨리 끝내고 제가 좋은 곳에서 한 번 찐하게 대접하죠.”

곧 재판부가 들어오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지난 재판에서 피고인이 피해자 측과 합의를 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요?”

재판장의 질문에 소원철 변호사가 일어나서 대답했다.

“피고인 측은 피해자 측을 만나 피고인의 뜻을 성실하게 전달하였고, 원만하게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소원철 변호사가 손아정과 손준철을 쳐다본 뒤 말했다.

“합의서는 피해자가 직접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재판부의 시선이 방청석으로 향했다.

“피해자 측, 지금 합의서를 제출할 건가요?”

그 말이 끝나자 손아정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황토색 서류 봉투를 든 상태였다. 피고인석으로 걸어간 손아정은 황토색 서류 봉투에 든 합의서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오영훈은 예의 그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게 나랑 게임이나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멍청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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